가출생활자와 독립불능자의 동거 라이프 - 페미니스트 엄마와 (아직은) 비혼주의자 딸의 자력갱생 프로젝트 : Flower Edition 그래도봄 플라워 에디션 1
권혁란 지음 / 그래도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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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페미니스트라 자칭하지 않았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기 위해 뾰족한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처럼 살아왔다. 어쩌다 남초 직장으로 이직을 하게 됐을때는 만연한 성차별적 상황들에 노골적으로 분노하다가 장년 아재들의 얼굴을 여러번 붉히게 만든 바람에 회사 생활이 힘들어지기까지 했지만, 엄마는 그런 딸을 크게 걱정한 적이 없었다. 결혼 정년기가 한참 지나고도 집구석에 붙어있자 오히려 마음을 놓아버린 듯 함께 오붓히 살아가는 미래를 꿈꿨던 것 같다. 그러다 내가 결혼을 해버렸고 그때부터 엄마의 걱정은 시작되었다. 스스로는 남편에게 의존적인 삶을 살아왔지만, 그간 딸의 독립적인 삶을 지지했던 엄마였기에 그러한 태세 전환이 놀라웠다. 엄마에겐 조신하지 못하고 제 수가 틀리면 나이 불문 말대답을 꼬박 꼬박하는 독불장군 같은 딸이 물가에 내놓은 아이마냥 불안했나보다. 시댁에게 자주 연락드려라, 남편에게 그러면 안된다, 사랑받으려면 어떻게 한다 등 순종적인 며느리와 아내가 되길 강요하는 엄마의 잔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페미니스트 엄마라면 어떨까? 


<가출생활자와 독립불능자의 동거라이프>는 페미니스트 엄마와 비혼주의자 두 딸이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저자 권혁란은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에서 글을 써왔고 여러 권의 여행서를 낸 작가이다. 그녀가 보여준 엄마의 모습은 우리의 통념과는 사뭇 다르다. 길 위에서 글을 쓰는 사람이기에 자주 집을 비웠고, 딸들은 알아서 잘 컸다. 항상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느라, 남편과 자식들에게 헌신 하느라 진짜 자신은 잃어가는 모성애 신화 속 엄마의 존재는 그녀에게서 찾을 수 없다. 오히려 딸들에게 기대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엄마다. 



그런 엄마를 둔 탓에 첫째는 속깊은 K-장녀이면서 집안 대소사를 모두 책임지는 똑부러지는 살림꾼이 다됐다. 둘째도 취업을 한 뒤 제 앞가림을 해나가며 스스로 삶을 잘 꾸려나가는데, 이 딸들 독립할 생각이 없다.


세상이 너무 험해서다. 혼자 사는 여자에게 도사린 온갖 위험들. 데이트 폭력으로 사그라진 여린 목숨들. 무서운 세상에 엄마는 딸들에게 감히 연애하라 종용할 수 없다. 결혼은 또 어떤가. 집 한 채 마련해줄 수 없는 부모인데 어떤 미래를 그리라고 결혼하라 마라 간섭할 수 있을까. 



책을 읽으며 여성이, 그리고 젊은 세대가 감당해야 할 현실의 무게가 무시로 느껴졌다. 딸을 낳아 '자식 없는 팔자'라는 소리를 들었던 설움은 이제 사라졌지만, 여전히 딸을 낳으면 마음이 편하지 않다. 어떤 일을 당할지 노심초사 걱정이 된다. 장성한 딸들과 살아가는 가정에 제멋대로 판단내리는 무례한 눈길도 견뎌야 한다. 


엄마와 엄마의 엄마가 겪었던 시대의 야만은 지금보다 여성에게 훨씬 가혹했지만, 어쩔 수 없다 체념했던 시대였다. 그래도 저자는 이래서는 안된다 소리를 내는 발화자였기에 딸들의 시대는 달라야한다는 의지가 책 속 곳곳에서 읽혔다. 여성의 삶을 속박하는 구식 풍습들을 견뎌낸 엄마이기에 더욱 절실하게 느껴졌다. 예민한 감수성으로 차별적 시선과 여성의 평범한 삶을 짓누르는 굴레들을 찾아내는 저자의 글을 읽다보면 공감이 가면서도 내가 너무 무딘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자각도 하게 된다. 



결국 방이 3개 뿐인 아파트에서 네 가족이 각자의 방을 갖고 살아가기 위해 리모델링 공사를 감행한다. 함께 하지만 각자의 길을 존중해주는 가족의 동거 생활에는 내 가족만이 최고라는 편협한 가족애도, 서로에게 마이너스이기만 한 질척임도 없다. 딸들의 삶을 염려하는 저자도 우선 제 삶을 살아가기 바쁘다. 코로나로 발이 묶였지만 언제든 짐을 싸서 떠날 수 있는 엄마라서, 딸들의 등을 밀어주는 바람은 아니지만 삶을 가로막는 맞바람만 아니길 바란다.



지금 우리 엄마의 걱정은 내게 어떤 바람일까? 우리 엄마는 자신이 살았던 시절을 기준으로 나를 걱정한다. 엄마의 걱정은 내가 결혼을 했다는 이유로 달라진 시대, 달라져야할 생각과는 반대로 흘러버렸다. 혼자일때는 얼마든 자유로울 수 있지만 결혼한 여자에게 자신을 지키는 건 어려운 일이라고. 사랑받는 아내, 며느리가 되는 것이 지상 최고의 과제인 것처럼. 그렇게 되면 나를 잃어가는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이건 전혀 내 삶을 응원하는 방식이 아니기에 나는 유난히 그 잔소리가 듣기 싫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 책을 엄마에게 보여주고 싶다. 딸이 살아갈 시대를 이렇게 이해해달라고. 




덧붙여 저자의 글을 처음 접했는데 글이 너무 아름다웠다. 분노하는 순간 조차 정갈한 한복을 입고 다붓하게 앉은 여인의 모습처럼 기품 있었다. 어떤 글을 말 맛이 살아 있어 시어처럼 보이기도 했다. '공존'이라는 꽃말을 가진 호자나무를 탐스럽게 그려낸 Flower Edition과 아름다운 문장들이 잘 어울려 참 멋진 책이었다.



※ 네이버카페 리뷰어스클럽에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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