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 세 편의 에세이와 일곱 편의 단편소설 인류 천재들의 지혜 시리즈 1
버지니아 울프 지음, 정미현 옮김 / 이소노미아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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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버지니아 울프는 '어려움', '난해함'이란 형용사로 수식되는 작가였다.

첫 입문작이었던 <등대로>가 제대로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해 쓰여진 소설이라, 일반적인 서사 문학에 익숙했던 나에겐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도 내 문학적 수준이 높아졌다고 할 순 없으나, 버지니아 울프를 처음 접했던 그 당시에는 고전문학 독서모임에 나간지 채 몇 달도 안됐을 시기였다.

하나의 풍경에서 자꾸 다른 생각들로 확장해가는 의식의 흐름을 보고 있자니 내 생각도 자꾸 다른데로 퍼져나갔다.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 고역이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그렇게 고통스러운 독서경험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다 접하게 된 이소노미아 '인류 천재들의 지혜시리즈'

첫 권은 악명으로 남아 있는 버지니아 울프의 <WHY>였다.

그간 읽은 다른 책에서 버지니아 울프의 진취적이었지만 내면은 불안했던 삶이나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작품들 이야기를 들으면 슬며시 호기심이 일었지만 아직 내 수준은 그녀를 감당할 수 없다는 생각에 주저했었다.


결론적으로 버지니아 울프를 다시 만나게 되어 다행이다.

<WHY>는 편견으로 점철될 뻔했던 그녀를 재발견하게 해주었다.


이 책에는 버지니아 울프의 세 편의 에세이와 일곱 편의 단편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대표작보다는 작가가 가진 다양성을 즐길 수 있게 만들겠다는 기획의도는 정확히 들어 맞았다.

학문적 의미보다는 가벼운 정신적 체험에 포커싱했다는 것도 어렵게 느껴지는 고전을 그야말로 '즐기는 고전'으로 전환해주었다.


첫 작품인 <여자의 직업>은 버지니아 울프가 현 시대에 재조명되고 있는 '페미니즘적인' 측면을 여실히 드러내는 에세이다.

글쓰는 작가로서 내면에서 자신의 욕망과 생각을 검열하는 집안의 천사과 싸우고 결국 순종적인 그 존재를 죽여버렸다는 그녀.

집안의 천사를 죽인 뒤 남은 건 허위에서 벗어난 나 자신이라 말한다. 

직업을 가진 여성은 여전히 맞붙어야 할 환영이 널려있고, 넘어서야 할 수많은 편견이 포진해 있다며, 우리가 넘어야 할 장애물과 왜 싸워야 하는지 늘 의문을 제기하고 검토해야 한다 강조한다.


또한 첫 고료로 페르시안 고양이를 사고, 언젠가 소설을 써 멋진 자동차를 갖겠다는 그녀의 솔직한 욕망처럼 여성들이 경제적 독립성을 가지고 자기만의 방을 자기만의 것으로 채우길 바라는 당부가 담겨있다. 

이 에세이가 쓰인 건 1931년, 영국에서 여성 참정권이 인정된지 겨우 3년이 지났을 무렵인데 이런 생각을 하다니 진짜 멋진 언니다!!


1934년에 쓰인 두 번째 에세이 <WHY>는 그동안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대학 교육을 받게 된 버지니아 울프가 책이 가진 학문적 깊이에 전혀 못미치는 부실한 대학 교육, 오히려 허세 섞인 사교 모임에 가까운 시스템을 보며 개탄하는 글이다. 남성들 너네가 그렇게 고매한 척 하던 게 겨우 이거냐? 하면서 고급스럽게 업신여김을 날리는 멋진 언니.

읽을 당시에는 지각하지 못했지만, 편집 여담을 보며 깨달았다. 

그녀가 살았던 시대를 생각해보면 그녀가 남긴 글이 얼마나 시대를 앞서간 통찰이었는지를.


단편 소설 중에는 그녀의 전매특허 같은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쓰인 소설도 있지만, 서사가 뛰어난, 그래서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흥미진진한 소설도 있었다. 

<유령의 집>과 <유산>이다.


<유령의 집>은 겨우 두 페이지 남짓의 초단편 소설인데, 읽고 나면 긴 여운이 남는다.

자신이 살았던, 사랑의 추억이 곳곳에 스민 집을 찾아온 유령 부부가 자신들이 숨겨 둔 보물을 찾는 이야기는 슬프고 아름다웠다.


<유산>은 갑작스럽게 교통사고로 죽은 아내를 그리워 하던 남자가 아내가 남긴 일기장을 보며, 아내의 죽음과 관련된 엄청난 반전 비밀을 알게 된다는 이야기다. 편집 여담에서 언급한 것처럼 정말 영화로 만들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흥미로운 스토리였다.


<벽에 남은 자국>은 버지니아 울프의 '의식의 흐름'을 보여주는 소설인데, 읽을 때는 다소 난해했지만 편집 여담에서 말한대로 타인의 의식 속에 동참하는 기분으로 머리 속에 파생되는 생각들을 그대로 읽어보자라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 

사실 문장들은 하나하나 너무나 시적이고 아름다웠다. 

그 문장들이 전혀 연결성이 없어서 무얼 말하고자 하는지 애써 파악하려 했던 자세가 난해한 기분을 만든 것 같다.


이 책에 담긴 그녀의 에세이들이 제법 마음에 들어서, 일단은 소설보다는 그녀의 대표 산문인 '자기만의 방'부터 도전해봐야겠다.


앞으로 읽어나갈 이소노미아 '인류 천재들의 지혜 시리즈'가 모두 이렇게 어렵게 느껴지던 고전을 흥미와 즐거움의 영역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우선 번역과 편집이 너무 좋다.

진심으로 이 고전을 즐겁게 읽게 만들겠다는 오랜 고민이 엿보인다.

게다가 자신들의 고민을 가감없이 털어놓는 '편집 여담'도 책을 읽는 재미를 배가한다.

꿈보다 해몽같은, 전혀 공감이 안갔던 여러 세계문학전집 속 작품 해설보다 훨씬 매력적이다.


책만 예쁜 줄 알았더니, 내용도 무척 알찬 '진정한 책 덕후'들이 만든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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