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의 변신
피에레트 플뢰티오 지음, 이상해 옮김 / 레모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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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녀는 도시에서 문이 열리자마자 커피를 한 잔 마시러 갈 카페를,

유리로 된 거대한 건물에서 자신이 치르게 될 면접을,

그들이 그녀에게 줄 일자리를,

그리고 곧 찾아올 저녁을 생각한다.

'분명해, 이게 내 삶이야.' 그녀는 속으로 이렇게 말한다."


피에레트 플뢰티오 <여왕의 변신> '여왕의 궁궐' 중 / 레모


리딩투데이 주당파에서 함께 읽은 책 <생각하는 여자>에서 신화학자 마리나 위너는 동화 속 여성캐릭터에게 발견되는 억압적 이데올로기를 지적했다. 예속과 순종을 답습시킨다는 것. 동화 속 해피엔딩은 가부장적인 세계에 종속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걸 어른이 되어 다시 곱씹어 본다.


하지만 마리나 위너는 동시에 동화가 가진 비도덕적인 면, 호기심 많은 말괄량이 - 도덕적 시각에서는 놈팡이 같은 녀석-의 모험이 보상을 받는 전복적인 즐거움도 함께 언급했다. 동화가 즐거웠던 이유- 특히 나는 빨강머리 앤과 말괄량이 삐삐를 좋아했다- 아마 현실에서 내가 날리지 못한 강력한 사이다 한방을 누군가가 대신 해줬기 때문이었을 거다.


이 책 <여왕의 변신>은 우리에게 익숙한 샤를 페로의 동화를 새로운 이야기로 재창조한 단편모음집이다. 흥미로운 소재인데다 프랑스의 권위있는 문학상인 공쿠르상 수상작이라 하여 더욱 기대가 되었다. 책에서 재해석하는 샤를 동화는 <엄지 동자>, <신데렐라>, <빨간 모자>, <푸른 수염>, <잠자는 숲속의 미녀>, 그리고 그림형제의 <백설공주>다.


샤를 페로의 동화는 당시 프랑스 구전되던 민담을 순한 맛으로 각색한 이야기인데, 프랑스 혁명 전 너무나 피폐했던 민중의 끔찍한 삶이 녹아 들어있어 어느 나라의 민담보다 잔혹한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재창조된 <여왕의 변신>도 잔혹하고 성적인 묘사가 적나라했다. 마치 서사가 모호한 프랑스 예술영화를 보는 듯한 단편들이 많았다. 뒤에 딸린 문학평론가의 해설이 없었으면 이 이야기가 담은 의미는 고사하고, 대체 어떤 동화를 재해석한 것인지 인지하기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첫 장인 <식인귀의 아내>는 동화 <엄지 동자>에서 아주 잠깐 등장한 식인귀의 아내의 숨은 사연을 재창조한 이야기다. 버려졌던 아이였던 그녀는 우연히 식인귀를 따라나선다. 하지만 그녀 앞에 펼쳐진 삶은 더욱 가혹하다. 수간과 생식을 일삼는 폭력적인 성향의 남편과 똑 닮은 성향의 일곱 식인귀 아이들을 돌보며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가던 그녀 앞에 무능력한 형들을 돌보고 있는 엄지 동자가 나타나고, 두 사람은 자신들을 착취하는 공간을 떠나 서로를 온전히 느끼며 사랑을 나눈다.

이 장에서 묘사된 식인귀 아내가 겪었을 폭력적 상황은 너무나 끔찍해서, 사지를 절단하는 슬래셔 무비를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남성 감독들에게서 관찰되는 불필요한 폭력성, 가학적인 장면의 전시 등을 반복하고 있었다. 여성적인 재해석에서 기대했던 감성적이고 섬세한 묘사와 전복적인 쾌감은 별로 기대할 수 없었다.


두번째 장은 신데렐라 스토리를 남성 버전으로 바꾼 <신데렐로>다. 주인공 신데렐로가 처한 환경은 신데렐라와 동일하지만, 마냥 착하고 순수하지 않다. 자신의 처지를 잘 파악하고 처세에 능한 영악한 남자다. 돌의 마법으로 무도회에 참석한 그는 일약 스타가 되고 온 나라의 여인들의 마음과 몸을 사로잡아 버린다. 하지만 그에게 나타난 진정한 사랑은 왕을 대신해 나라를 통치하고 있는 지적이고 현명한 왕비. 두 사람은 엄청난 나이차에도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고 신데렐로는 왕비와 결혼해 왕이 된다.


이 책에서는 연하 남자 판타지가 '신데렐로' 외에도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는데, 전복적이라기 보다는 남성적 문화를 답습하는 묘한 불쾌함이 들었다. 그리고 신데렐로에게 모여든 귀족 여인들의 행태는 남자에게 몸을 내주며 헌신하는 여성들이란 기존의 고정관념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서 아쉬움이 남았다.


세번째 장 <도대체 사랑은 언제 하나>는 잠자는 숲 속의 미녀를 재해석한 동화이다. 국정과 육아에 바빠 제대로 사랑을 나누지 못하는 왕과 왕비의 현실 부부 수난기를 다루고 있다. 왕비가 죽음에 처할 무렵 태어난 막내 딸에게 마녀가 물레의 저주를 내리려고 하자, 왕비는 그 저주는 백년 동안 자신이 이미 다 겪었다고 한탄하며 끝을 맺는다. '잠자는 숲 속의 미녀' 동화 속에서 무엇을 비틀고자 하는지 공감할 수 없었지만, 한 편의 블랙코미디 같은 동화였다.


네번째 장 <빨간 바지, 푸른 수염, 그리고 주석>과 다섯번째 장 <일곱 여자 거인>에서 비로소 이 책에서 기대했던 캐릭터들이 등장했다. 주체적이고 강한 여성이 주인공이 되는 동화들이다.

어려서부터 늑대를 길들일 줄 알았던 원령공주같은 빨간 바지(모자를 쓰지 않고 바지를 입는다)는 특유의 용맹함으로 저주에 걸려 괴물이 되어버린 푸른 수염에게서 감금되어 있는 아내를 구해낸다. '개구리 왕자'처럼 푸른 수염이 저주에 벗어날 수 있도록 구원한다. 압권인 것은 푸른 수염의 로맨틱함과 으리으리한 재산에 넘어왔던 아내들이 '인생에 남자는 필요없다'며 자신들끼리 짝을 지어 사라지는 장면이다. 삶의 주체성이 전이되는 장면이었다.


<일곱 여자 거인>은 백설공주의 미모를 시기 질투하며 거울 앞에서 자신의 외모에 대해 묻던 가련한 왕비에 대한 오명을 벗겨준다. 원래는 박사학위를 준비하며 자기 관리에도 철저했던 멋진 여성이었던 왕비가 거울로 표현된 주변 사람들의 기대와 억압 속에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시들어간다. 외모에 집착하며 점차 쇠약해져 가던 왕비는 궁을 떠나고, 모욕감을 느낀 왕은 사냥꾼에게 그녀를 죽일 것을 명한다. 사냥꾼은 가엾은 왕비를 사랑하게 되어 그녀를 발견하지만 살려준다. 숲을 헤매던 왕비가 발견한 곳은 여섯 여자 거인들이 사는 집, 그곳에서 강한 여성들 속에서 자신을 억눌렀던 억압에서 치유되는 왕비는 일곱번째 거인이 된다. 그리고 이 여성 거인들은 여성을 속박하는 상징 같은 거울을 깨부셔 버린다.


"그리고 나는, 나는 내가 그녀를 기다렸던 곳이 바로 거기, 안개에 묶인 아주 높은 그 울타리 앞이라는 걸 깨닫는다.

왕비여, 가요, 곤두선 나뭇가지들과 가시덤불의 붉은 발톱들과 튀어 오르는 돌들 속으로 가요.

당신의 허벅지와 이마와 어깨가 그 모든 것보다 더 끈덕지기를!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던져 집요하게 당신을 막는 숲을 헤쳐 나가요.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나에게 보여줘요.

물러서지 말아요. 나를 저버리지 말아요."

피에테르 플뢰티오 <여왕의 변신> p259 / 레모


여섯번째 <잠자는 숲 속의 왕비>는 약자의 삶에 관심을 가지는 따뜻한 심성의 소유자지만 자신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왕궁 식구들에게 식인귀라 불리는 왕비가 궁을 나와 세계를 떠돌며 세상과 마주하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에는 느닷없이 작가가 등장해서, 왕비의 모험을 응원한다. 하지만 호숫가에 놓인 배를 타고 정처없이 흘러가게 되는 왕비의 결말은 동화의 한계를 드러내는 듯 하다. 아마도 일곱번째 장을 이어가려고 만든 이야기가 아닐까 싶은... 난해한 이야기였다.


일곱번째 <여왕의 궁궐>은 기존 동화의 재해석이 아닌 피에레트 플뢰티오가 오롯이 창작한 이야기이다. 두 남편을 떠나보내고 궁궐에서 외롭게 늙어가던 여왕이 현실 세계의 자유로운 '깃털 단 여성'을 만난 후 궁궐을 나와 헤매는 이야기로 해설에 의하면 (극악의 난해함으로 읽은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과 같은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쓰여졌다고 한다. 나중에 여왕은 현실에서 일자리를 찾으며 자신의 삶을 찾아간다. 동화에서 뛰쳐나와 현실을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듯 하다.


개중에는 마음에 드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기대했던 부류는 아니였다. 아마도 나의 문학적 깊이가 부족해 해석이 어려운 탓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의 말에서 보여준 의도와 시도는 공감했다. 동화가 전하는 '위로하기'와 '인도하기' 기능으로 어린 소녀들에게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주입했던 동화들을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살려내는 것!


새로운 동화들이 더욱 더 활발하게 쓰여지길 기대한다.

지금 자라는 아이들이 더 나아진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달라진 언어로 쓰여진 이야기가 필요하니까.


★ 네이버독서카페 '리딩투데이'에서 출판사 지원으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솔직한 리뷰를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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