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의 거짓된 삶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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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거짓말. 어른들은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 정작 자기들은 끊임없이 거짓말을 늘어놓는다."

엘레나 페란테 <어른들의 거짓된 삶> p218 / 한길사


성장소설이란 무엇일까? 대부분 성장소설에서는 좋고 옳은 방향으로의 개선이나 이러한 내적 성장을 기대한다.

하지만 최근 독서모임에서 함께 읽은 <수레바퀴 아래서>에서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삶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도 성장소설이 될 수 있음을 배웠다.

엘레나 페란테의 소설 <어른들의 거짓된 삶>도 이러한 부류의 성장소설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 엘레나 페란테는 아직 보진 못했지만 소문은 무성한 HBO의 인기 드라마 <나의 눈부신 친구>의 원작을 쓴, '나폴리 4부작'으로 유명하다.

나폴리를 배경으로 두 여성의 성장담을 담았던 전작은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극찬을 받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소설에도 그러한 요소가 있을까 생각하며 기대했다. 결론적으로 주인공에게선 주체적인 삶을 선택하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주인공 조반나는 중산층에 학구적인 교사 부모님 밑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13살 소녀다. 성적이 떨어지던 조반나는 어느날 자신이 사랑하는 부모가 '점차 빅토리아를 닮아간다'는 얘기를 나누는 것을 엿듣게 되고 좌절에 빠진다. 빅토리아는 아버지의 여동생, 조반나의 고모로 제대로 본 적은 없지만 추함과 악함의 대명사이다. 조반나는 고모를 직접 만나봐야겠다 생각하고 부모를 졸라 고모가 사는 곳을 찾아간다. 아버지가 불우한 유년시절을 보낸 빈민가에서 여전히 살고 있는 고모. 질투심이 많고 유부남과 바람을 핀데다 물질적으로 계속 아버지에게 의존하며 아버지의 삶을 망가뜨렸다는 고모의 거칠고 직설적인 모습은 조반나에게 예상 외의 매력을 준다. 정제된 듯한 부모의 교양 넘치는 대화 속에서 소외감을 느낄 때면 조반나는 고모를 찾아갔다. 고모는 17년 전 자신과 바람을 폈던 유부남 엔초가 사망하자 엔초의 아내와 세 명의 자녀-토리노, 줄리아나, 코라도와 유사가족처럼 지내고 있다. 조반나는 이들 속에 합류되길 바라며 고모로부터 연결된 세계를 친구인 안젤라와 이다에게 과장되게 포장해 들려준다. 


한편 고모는 조반나에게 부모처럼 되지 않으려면 부모의 본 모습을 제대로 보라고 충고하고, 어른들의 세계를 관찰하던 조반나는 테이블 밑에서 어머니와 마리아노 아저씨의 발목이 엉킨 모습을 목격하며 혼란에 빠진다. 하지만 실제 불륜에 빠진 건 아버지와 코스탄차 아줌마였다. 아버지는 고모가 조반나에게 선물한 팔찌를 코스탄차 아줌마에게 선물했고, 코스탄차 아줌마는 비밀이 밝혀지자 조반나에게 팔찌를 돌려준다. 존경했던 아버지의 위선적인 모습에 혐오를 느끼는 조반나는 점차 위악적으로 변해간다. 낙제를 하고, 성적으로 접근하는 코라도의 요구를 다 들어주는 등 삶을 방치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이런 조반나의 모습은 부모에게 수치스러움과 죄책감을 부르고, 조반나는 가정에 닥친 비극을 모조리 빅토리아 고모에게 넘기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며 고모를 멀리한다. 


조반나의 이런 반응에 화가 난 고모는 팔찌를 돌려달라고 협박하고, 고모를 찾아간 조반나는 고모의 강요로 들어간 성당에서 줄리아나의 애인인 로베르토를 보고 첫 눈에 반하게 된다. 조반나의 짝사랑은 이성적 사랑보단 동경에 가깝다. 밀라노에서 대학 생활을 하며 세련된 엘리트들 속에서 지내는 로베르토를 자신에게 과분한 존재로 여기며 항상 관계에 불안을 느끼는 줄리아나. 조반나는 그녀를 격려하며 두 사람의 관계를 위해 기꺼이 헌신한다.


지적인 모습으로 존경했던 아버지는 불륜을 저지르고 가정을 배신한 무책임한 어른, 

따뜻하게 자신을 감싸주던 어머니는 남편의 배신에도 계속 의존적인 모습을 보이는 유약한 어른,

강인하고 열정적인 줄 알았던 고모는 자신과 마르게리타 가족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고 싶은, 신경쇠약에 걸린 예민한 어른,

아버지와 열성적으로 지적인 토론을 나누던 마리아노 아저씨는 조반나의 몸을 훑는 천박한 어른,

조반나의 주변에는 추악한 본질을 거짓과 위선으로 포장했던 어른들만 존재한다.


어쩌면 로베르토는 유일하게 조반나가 원했던 어른의 모습이었는지 모른다.

지적인 대화로 생각의 틀을 깨어주는, 언제나 옳은 방향을 알고 제시해줄 것 같은 그런 어른 말이다.

그래서 한 여성을 사랑하고, 성적인 관계를 맺는 평범한 남성으로서의 로베르토에게 묘한 거리감을 느낀다. 


이 소설에서 소유자가 바껴가는 팔찌는 추한 욕망을 상징하는 것 같다. 원래는 팔찌는 엔초의 장모, 마르게리타의 어머니 것이었다. 이를 엔초가 훔쳐 자신의 내연녀 빅토리아 고모의 어머니에게 선물했고, 조반나의 아버지는 다시 어머니가 빅토리아에게 팔찌를 물려주고 돌아가시자 조반나 핑계를 대고 팔찌를 받아 자신의 내연녀 코스탄차 아줌마에게 선물한다. 조반나에게 온 팔찌는 빅토리아 고모가 속박하고 싶은 줄리아나에게로 간다. 팔찌는 다시 조반나에게 돌아오고, 조반나는 어른들의 추악한 세계로 진입하던 곳에 불행의 바통같은 팔찌를 두고 온다.


처음에는 섬세한 중딩 감성이 도저히 공감이 안가서 조반나의 위악에 웃음이 나기도 했지만, 돌아보면 내 십대 시절도 이렇게 깨지기 쉬운 예민함 속에서 보냈다. 그때는 어른들이 죄다 환멸스럽고, 위선 덩어리처럼 보였다. 조언이랍시고 하는 말들에 일부러 가시 돋힌 말로 대꾸했다. 삶을 함부로 망가뜨리려는 내 모습을 두고 어른들이 죄책감에 안절부절하면, 왠지 묘한 쾌감을 느꼈다. 


돌이켜보면 우리의 사춘기도 조반나처럼 옳고 성숙한 방향으로 귀결되지 않았다. 오히려 잔인한 세상을 목도하며 위선과 위악을 배워갔다.

그리고 소설은 어른이 된다는 것이 인간적으로 성숙함을 의미하지 않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현실의 성장은 결코 아름답거나 이상적이지 않음을.


"다음 날 나는 이다와 함께 베니스로 향했다.

우리는 기차에서 그 누구도 경험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어른이 되기로 약속했다."

엘레나 페란테 <어른들의 거짓된 삶> p477 / 한길사


그래서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어른이 되어 갔음을.

조반나와 이다처럼.


★ 네이버독서카페 '리딩투데이'에서 출판사 지원으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솔직한 리뷰를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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