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즘
손원평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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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평 작가의 전작 중 내가 읽은 책은 BTS도 읽어 더 유명해진 <아몬드>가 아닌 <서른의 반격>이었다.

그때의 느낌은 재밌는 단막극을 보는 느낌. 영화 연출을 전공한 이력 때문인지 장면이 눈에 선하게 그려지는 묘사와 생생한 캐릭터들이 볼 만했던 걸로 기억된다.

그리고 두 번째 접한 소설이 신작 <프리즘>이다. 유원지를 배경으로 프리즘을 연상시키는 홀로그램이 새겨져 있는 책 표지, 하늘이 신비로운 색을 내뿜고 있는 제법 예쁜 책이다.

청춘의 고뇌, 성장담에 탁월한 듯한 작가의 전작과 다르게 '사랑'에 포커싱했다.


초여름에서 시작해 다시 여름으로 사계절을 돌아보는 구성으로 이 책에서 무엇보다 마음이 가는 부분은 계절에 대한 표현이었다. 계절이 품고 있는 고유한 분위기와 이에 연결되는 감정들이 와닿았다. 가령 나에게 여름은 한없이 열정적인 듯하지만 에어컨 바람의 쿨한 냉기같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싶은 계절이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한 해에 대한 불안을 일깨우는 가을, 어둠이 그늘을 드리우는 우울한 겨울, 조바심 나게 만드는 봄의 달뜸 등이 인물들의 관계 변화와 어우러져 잘 묘사되어 있다.


예진과 도원은 같은 건물 13층과 지하에서 일하는, 우연히 커피를 마시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로를 지켜보는 사이다.

도원은 이 적당함이 좋지만, 예진의 마음은 여름의 녹음처럼 점점 짙어진다.

재인과 호계는 베이커리 주인과 아르바이트생으로 잔잔하게 우애를 쌓아가고 있다.

처음엔 그다지 연결되어 있지 않을 것 같은 네 사람은 예진과 호계의 만남 이후 복잡하게 얽혀든다.


불면의 밤을 보내던 예진이 오랜만에 참여하게 된 오픈채팅방 정모에서 저 혼자 동떨어진 채 과묵하게 앉아있는 호계에게 말을 걸면서부터,

예진이 지하철에 자신의 감정을 기록하는 다이어리를 놓고 내리고 이를 신데렐라의 구두처럼 호계가 줍게 된 이후부터 적당한 선을 넘지 않던 관계들을 흘러넘친다.


예진은 도원의 초대에 호계와 호계의 고용주 재인을 불러 함께 연극을 보게 되고, 과거 같은 음악의 꿈을 키워가며 연인이 될 뻔했던 두 사람, 도원과 재인은 재회한다. 이번에는 재인을 놓치고 싶지 않은 도원은 적극적으로 재인에게 다가가지만, 재인은 아직 전 남편 한조와의 관계를 끊어내지 못한 상태다.

도원을 짝사랑하는 예진은 이 상황을 지켜보며 상처받고, 한철이란 이름의 남자와 감정 없는, 한철같은 연애를 시작한다.

예진에게 점차 특별한 감정을 갖게 되는 호계는 예진의 이런 도피적 만남에 폭언을 하며 두 사이는 멀어진다.

그렇게 모든 관계가 꽁꽁 얼어붙는 차가운 겨울이 오고 멀어진 네 사람은 '붕 뜬 기분이 못마땅해도 어쩔 수 없이 이끌려가는 계절' 봄,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며 새로운 시작을 향해 한발 내딛는다.


아내의 죽음 이후 시작부터 끝을 생각하는 도원, 연결된 관계를 끊어내는데 서툰 재인,부모님의 방관과 자신을 길러준 고용인 할머니에 대한 추억 사이에서 인간에 대한 사랑보다 혐오와 무관심을 키워온 호계, 그리고 상처 받기 싫어하면서 또 다시 사랑을 찾는 예진.


사실 이 소설에서는 이전작에서 느꼈던 캐릭터의 생생함을 느끼기 어려웠다.

뭔가 하나같이 쿨함을 가장한 사람들 같아서 와닿지 않았다.

특히 재인의 태도는 한결같이 침착하고 단호한데, 무엇 때문에 이전 관계를 끊지 못하고 질척이는 지 공감하기 어려웠다.

어린 동생을 잃은 트라우마나 사이가 좋지 않은데도 이혼하지 않고 살아가는 부모님에 대한 기억으로 설명하기에는, 자신에게 배신감을 준 한조에 대한 재인의 태도가 애매하다. 원망을 품으면서, 시종일관 쿨한 태도라니.

도원에게도 전 아내의 트라우마가 새로운 사랑으로 나아가는 데 어떤 방해를 줬는지 크게 납득하기 어려웠다.

오히려 초반에는 재인의 그림자가 너무 커서 다른 사랑에 몰입을 못하는 사람으로 느꼈으니까.

캐릭터들이 푹 이입되지 않고 스크린 속에서 움직이는 듯한 묘한 거리감이 느껴졌는지, 그 이유를 작가의 말을 통해 이해할 수 있었다.

작가에게도 사랑이 모든 관심사인 캐릭터들은 낯설었고, 자신과 닮은 구석이 전혀 없는 캐릭터들을 창조하며 거리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래도 호계와 예진의 이야기는 간질간질 연애세포를 자극했다.

재인과 도원 사이의 빌런이 되어 저지른 민폐짓이 거슬리긴 했지만, 두 사람의 설레여하는 마음이 예뻤다.

그토록 아꼈지만 자신의 발등에 상처를 줬던 프리즘을 상자 속에 쳐박아둔 예진은 호계가 떠난 후 어린 시절 그 상자를 열어 프리즘을 꺼낸다.

그리고 다짐한다.


"누가 내게 다가온다면 난 이렇게 반짝일 수 있을까.

또 나는 누군가에게 다정하고 찬란한 빛을 뿜어내게 하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누군가를 빛내주는 빛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손원평 <프리즘> / 은행나무 p261)


나를 통과해서 더 찬란해졌으면 하는 사랑. 그 마음처럼 나도 누군가를 사랑해주고 싶다.

덕질을 하든 무생물에 푹 빠지든 뭔가를 사랑하는 동안은 스스로가 얼마나 싱그러워지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최근 무기력에 빠진 내 마음이 다시 사랑으로 채워지길, 그래서 '사랑하는 마음'이 계속되길 바란다.


★ 네이버독서카페 '리딩투데이'에서 출판사 서평단 지원으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솔직한 리뷰를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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