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조용히 살고 있다 - 제8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이해경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12월
평점 :
품절


 

 

'chance 와 change'

  episOde,2  이해경_그녀 조용히 살고있다 


 



 

 

   
막연히 글을 쓰고 싶었다,
어떠한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다, 그래서 말 그대로 '막연히'다,

언젠가 어느 책에서 '모든 슬픔은,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것들에 관해 이야기 할 수 있다면 견뎌질 수 있다'는 한 문학 평론가의 말을 읽은 적이 있다,

나는 글을 쓴다면, 무언가를 견디기 위해서 그러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살기 위해 밥을 먹듯이, 살아가기 위한 수단 또는 도구로써, 온전히 견뎌내기 위해 글을 쓴다,
그러니까 어쩌면 말이다,

'과거는 그에게 언제나 후회막급이었다. 그래서 그는 공상하는 습관을 기르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막을 수 없는 후회를 비키는 방법은 정반대의 과거를 상상해보는 공허한 놀이뿐이었다. '

글을 쓰는 것은 상상만으로는 불가능 하다는 생각이다,
불가능을 상상하는것도 결국은 현실이다, 지금 내가 겪어내고 있는 것에서 비롯되는
불가능을 상상할 수밖에 없는 현실의 현실,

글을 쓰는 것은 현실이다,
그렇다면, 살아온 발차취를 더듬어 내가 말하고 싶어 견딜 수 없을 만한 화제 거리를 찾아본다,
여기 저기, 기억의 바다를 부유하는 감정의 조각들,

다른 환경에서 살아 왔으나 많은 것이 닮아 있고 그래서 소통할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다.
지금에 와서야 내가 그를 친구로서 아끼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된 그 사람과의 짧지않은 소통과정을 돌이켜보면, 나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오해했었고 그러니까, 지금에 와서야 '친구'로서 아끼고 있었던 것이라고 그때의 나의 감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은 서로에게 '다른' 이유로 상처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 사람과 그렇게 헤어지게 되어, 또는 나의 옆자리의 상실감이 크게 느껴져서 아파했다기 보다는 서로가 서로에게 꽃이 되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했었던 그 시간이 오해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이해하고 있는 그 사실이, 사랑에 대한 기대감을 무기력하게 했다, 그는 더 이상 나의 꽃이 아니며, 나는 더 이상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사람의 소통과정에서 '이해 와 오해' 라는 것,

요즘은 나 자신에 엄마를 투영해 보는 일에 골몰하고 있다. 엄마와 같은 삶을 살고 싶지 않아서 그대로 답습하고 싶지 않아서 엄마의 딸이지만 엄마와의 고리를 부정하고 싶어서 이십년 동안의 엄마와 삼십년 동안의 엄마, 그 이후의 엄마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것은 조각품을 360도로 관찰하는 것과 동일한 방법일 것이며 또는 화폭에 밑그림을 그리고 하나하나 색을 입혀가는 것과 유사한 방법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프다, 이해한다 생각하며 오해한듯 행동하고 또는 오해한다 생각하며 이해한듯 행동하는, 그 모호한 이해와 오해의 경계의 삶을 견딜 수 있다면,
견뎌 낼 수 있다면 대신 글을 써 줄 요량이다, 나는 엄마를 대신하여,

그런 생각으로 글을 읽어 나가다 마주하게 된 문장이 있었다

 
'그의 뒷덜미를 잡고 놓지 않은 꺼림칙한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그 사실무근일지도 모를소설이, 만에 하나 누군가에게 해가 된다면? 모르는 사람들이야 그 소설을 사실로 읽든 허구로 읽든 읽다가 팽개치든 개의할 바 아니었으나, 자기를 아는 사람들, 특히 소설 속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들에게 끼칠 파장을 무시해도 좋을 것인가, 만에 하나 아물었던 그들의 상처를 덧나게 한다면,
소설의 이름으로 그런 만행을 저질러도 되는 것일까. 그때 가서 소설은 소설일 뿐이라고 잡아뗀들 소용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않을 만큼만 드러내고 나머지는 감추면 될 것인가. 그 경계는 대체 어디쯤일까. 그런 게 있기라도 한 것일까. 알 수 없었다.'

니, 혼란에 빠진다, 글을 쓰려고 펜을 들고 나는, 이라 운을 떼고 생각해보니 혼란에 빠진다, 나의 고통을 덜어내기위한 방법으로 누군가에게 내가 덜어낸 고통을 대신 짊어지게 하려고 글을 쓴다,는 내가 그런 심판적인 위치에 서는 게 가당키나 한 것인지, 이것을 양심 속 일말의 가책이라고 해야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양심껏 글을 써야 하는 것인지, 누구나에게 보이기위한 착한 글을 써야 하는지, 검사받는 만점짜리 일기라도 쓸 참이었는지, 결국은 날 포장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은 것인지, 덮어두고 싶은 현실을 글로써 미화하려고 했었는지, 나도 참 알 수 없었다,

"완전한 허구라는 건 어떤 거야?"
"쓰는 나에게 허구로 느껴지는 소설. 그래야 남들도 봐줄 만하지 않겠니."

아무래도, 남들이 봐줄 만한 글을 쓰는 것은 무리다, 

 
'그녀는 알았다. 이런저런 핑계를 둘러대며 변변한 문장 하나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를 덮어둔 채 소설을 쓰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소설은 손끝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머리품을 파는 것으로 해치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쓰는 사람이 자신의 전 존재를 던져 누르고 짓이길 때 터져나오는 창자 더미 같은 것. 자신의 실존을 벼랑 끝으로 몰아세우는 결행 끝에 대면하게 될 정직한 자화상을 그려내는 것. 최소한, 생활의 굴레 속에 안주하는 비굴함에 기대어 찍어낼 수 있는 물건은 절대로 아니었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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