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근 해가 떴습니다
장경혜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누구나 잘 아는 동요, '둥근 해가 떴습니다'가 마치 영화의 OST처럼 그림책 사이로 흐른다. 그림책 <둥근 해가 떴습니다>는 동명의 동요 노랫말에 그림을 덧입힌 책이다. 해서 처음에는 단순한 생활동화로 생각했다. 둥근 해가 뜨면 자리에서 일어나 깨끗하게 씻고 유치원에 간다는, 아이의 기상부터 하루의 일과를 보여주는 착하디 착한 생활동화 말이다. 그런데 <둥근 해가 떴습니다>를 보다 보니 생활동화라 하기에는 너무 단순한 구조인지라 눈에 걸린다. 

예컨대 그림책 전체가 영화의 롱테이크와 같은 시선을 유지한다. 카메라를 방 한구석에 딱 고정시켜 놓고, 그저 필름을 돌리고 촬영한 분량을 통으로 보여주는 듯한 롱테이크. 그림책 글은 노랫말답게 경쾌하게 흘러가는데, 그림책은 내내 어두운 방에 있는 아이와 엄마만을 보여준다. 너무 단조롭고 심심하다. 이건 뭐냐, 예술영화이더냐. 공간적 배경이 처음부터 끝까지 아이가 누운 방 그대로이고, 시점 또한 변함이 없다. 쉽게 말해 카메라를 방에 고정시켜 놓은 것도 모자라 높낮이 역시 고정불변인 것이다. 다만 줌인, 줌아웃으로 아이와 엄마 얼굴을 화면 가득 채우느냐 멀리에서 잡느냐 정도의 차이. 공간의 전환이 없다보니 색채의 변환 또한 없고, 구도 또한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등장인물 역시 엄마와 아이로 한정되어 있어서 심심하고 단조롭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애니메이션을 보면 3D 입체 영상이 정신 없을 정도로 휙휙 돌아가는데, 독립 예술영화마냥 저예산으로 카메라 한 대에 필름 한 롤로 다 해먹으려 하다니, 이 그림책은 아무리 생활동화라지만 너무 한 거 아닌가 싶다.

  

다시 읽었다. 이 작품이 서울동화일러스트레이션상 대상 수상작이라는데, 필력과 드로잉 선맛은 무척 훌륭하지만 글은 동요에서 가져온데다가 기승전결이나 재미있는 사건도 없는 단순한 생활동화라는 점을 생각하면 '대상 수상'이 납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읽었을 때에야 비로소 이 책을, 수상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아이는, 하루 종일 방 안에 누워만 있었다. 아이가 방 밖으로 한 걸음도 내딛을 수 없기에 카메라는 롱테이크가 된 것이고, 작가의 시선은 아이 옆에 붙박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작가의 말을 읽어보니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는 일곱 살 진우는 근육병에 걸려 집에서 누워만 지낸단다. 

다시 읽으며, 쉽게쉽게 책장을 넘길 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하나둘 씩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와 엄마만의 방. 다른 가족 없이 아이와 엄마만이 아침을 맞는 방. 그 방은, 아침이 되어도 햇볕이 스며들지 않는다. 창을 가로지른 스테인레스 방범창 너머로는 나무의 초록이나 밝은 햇살이 아니라 그저 벽돌로 쌓아올린 담, 내지는 건물 외벽만이 보일 뿐이다. 왠지 마지막 잎새 하나 달랑거릴 듯한 벽돌담. 아이와 엄마는 지하에 둥지를 틀었나 보다. 부족한 햇살을 보충하려는 듯 해바라기 무늬 벽지로 도배한 작고 어두운 반지하 방. 아이가 일어나자 엄마는 TV를 켠다. TV에서는 밝고 경쾌한 동요 '둥근 해가 떴습니다'에 맞춘 듯 여자 아이와 강아지가 나와 이를 닦고 몸을 흔든다. 브라운관 너머에서는 여자 아이와 심지어 강아지마저도 이를 닦는데, 아이는 둥근 해가 떠도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다. 노랫말 처럼 '세수할 때는 깨끗이' '이쪽 저쪽을 닦아'야 하는데, 아이는 꿈쩍도 할 수 없으니 엄마는 세숫대야에 물을 받고 물수건으로 아이의 목을 훔친다. 

바깥으로 나갈 수도 없기에 누구에게도 아이의 얼굴을 보여줄 수 없건만, 엄마는 꼼꼼하게 아이의 머리를 빗질하고, 아이는 머리를 빗겨주는 엄마의 턱을 작은 손으로 사랑스럽게 쓰다듬는다. 세수하고 머리 빗은 모습이 어떠냐는듯, 엄마는 거울을 들어 아이를 비춘다. 거울 속 아이는 세상에서 제가 가장 예쁘다는 듯 사랑스럽고 밝게 웃고 있다. TV속 아이들이 웃으며 춤을 추는 동안, 아이는 꼭꼭 씹어 밥을 먹는다. 누운 자세 그대로, 팬티와 런닝셔츠 차림으로.  

그런데 갑자기 엄마가 가방을 메더니 나갈 채비를 한다. 나는 나도 모르게 속으로 '아니, 어머니, 이 애를 혼자 두고 어딜 나간단 말이에요!'라 소리지르고 말았다. 다행히 다시 보니 동요 '둥근 해가 떴습니다'에서 '가방 메고 인사하고 / 유치원에 갑니다. / 씩씩하게 갑니다'라는 대목에 맞춘 엄마의 행동이다. 유치원에 갈 수 없는 아이를 대신하여 가방을 메고 유치원에 가는 시늉을 한 것이니, 엄마의 마음은 얼마나 깊고 아름다운가. 엄마는 노랫말처럼 '씩씩하게 유치원에 가는' 모습을 보여준 셈이다. 

헛된 희망이나 꿈은, 바짝 마른 낙엽처럼 손아귀에서 부서지기 쉽다. 아이가 병을 이기고 둥근 해가 떴을 때 자리에서 일어나 스스로의 힘으로 세수하고 이를 닦는 것은 잡기도 어려운 꿈이거니와, 잡아도 부서져버릴 낙엽과도 같다. 하지만 아이와 어머니는 웃음을 잃지 않는다. 그저 막연하게 잘 될 거야, 어찌 되겠지, 하는 자조섞인 웃음, 체념한 웃음이 아니라 진짜 행복을 맛본 이들의 여유있는 웃음이다. 햇볕 한줌 들일 수 없는 반지하 방, 딸칵, 하고 알전구가 켜지면, 아이와 엄마는 마치 알전구를 떠오른 둥근 해라도 되는 양 행복하게 쳐다본다. 어떻게 웃을 수 있느냐고,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느냐고, 우리 모자의 삶에 둥근 해가 떠오를 날, 쨍하고 해뜰 날이 과연 올 거라 믿느냐고 악에 받쳐 소리를 질러도 어색하지 않을 상황에서, 아이와 엄마는 웃는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는 듯이. 

병든 노모는 자식에게 짐이 될 수 있으나, 병든 자식은 엄마에게 짐이 아니라 죄책감인 한편 살아갈 이유이다. 엄마는 아이를 힘껏 사랑한 만큼 죄책감이 덜어지기라도 할 듯 사랑을 줄 것이며, 죄책감과는 별개로 그저 아무런 이유없이 자식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림책 속 아이는 자신의 몸이 불편해도 사랑에 모자람을 느끼지 않는다. 누워있는 자신을 씻기고, 먹이고, 돌보는 어머니, 엄마의 손길에서 넘칠듯한 사랑을 본능적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사지가 멀쩡해도 사랑이 없으면 영혼에 욕창이 생길 수 있으나, 하루 종일 침상에 누워 있어도 엄마의 극진한 사랑과 보살핌을 받는 아이는 욕창 하나 없이 깨끗한 몸, 그리고 깨끗한 영혼을 지녔다. 엄마와 아이, 둘의 깨끗하고 사랑하는 영혼의 공명은 침침한 알전구마저도 떠오르는 태양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그림책의 마지막 장. 처음부터 끝까지 롱테이크로 비춰지는 좁고 어두운 반지하 방의 어둠과 가라앉은 색채에 익숙해진 독자의 눈을 아름다움으로 멀게 하려는 듯, 갑자기 눈부신 해바라기 밭이 펼쳐진다. 잘 살펴봐야 보인다. 아이가 휠체어에 앉아 있음을. 그리고 눈치 빠른 분들은 알아채셨겠지만, 이들에게 펼쳐진 건 진짜 해바라기밭이 아니다. 그저 반지하 방에 조금이나마 생기를 불어넣고자 벽에 바른 해바라기 벽지일 뿐이다. 어쩌면 떠오른 해님은 천장에 매달린 알전구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들 모자의 눈에는 둥근 해가 떠오른 드넓은 해바라기밭이다. 아무리 삶이 이들을 몰아부치고 벽처럼 가로막아도, 이들은 떠오른 해님을 보며 해바라기 꽃밭에서 웃을 수 있다.

진우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 일곱 살 소년입니다. 

하지만 태어나면서부터 팔다리에 자꾸 힘이 없어지는 근육병에 걸려 

언제부턴가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누워 지내고 있습니다. 

지금은 몸이 약해 유치원에 다니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꼭 친구들과 함께 학교에 다니는 것이 진우의 꿈입니다.

아빠가 되어, 겨우 부모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결혼을 앞둔 어느 여동생에게 이 그림책을 읽어주었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해서 겨우 참았다. 아직 엄마가 안 된 여동생에게 '아저씨 되니 센티해졌수다.'라는 놀림을 받기 싫었는지도.

하지만 그애도 곧 알게 되겠지. 자식 앞에서 한없이 눈물 많은 게 부모이지만, 한편으로 가장 강한 게 부모라는 걸. 나의 상처는 그저 딱지가 앉기를 기다리면 되지만, 내 아이의 상처와 아픔은 부모의 뼈에 불로 지져 새긴 상처와 아픔이라는 걸.  

작가의 말을 빌어 마무리한다. 

이 세상 알 수 없는 것들과 싸우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모든 분들께 이 책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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