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브릭 Kubrick 1
강도하 지음 / 애니북스 / 2009년 2월
평점 :
품절


열아홉에 <보물섬>에서 신인만화가상을 받으며 데뷔.
본명인 강성수로 작품을 발표하며 '언더그라운드 만화가 제1세대'로 불림.
웹사이트에 2004년부터 '위대한 캣츠비' 연재,
웹만화 연출과 형식의 혁신적인 발전을 불러옴
<위대한 캣츠비>가 뮤지컬, 드라마로 제작되며 영화 판권 또한 계약된 상태
미국, 프랑스,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등에서 청춘 3부작의 판권 계약 체결
대한민국 만화대상과 오늘의 우리만화상, 독자 만화대상 수상.
<풀하우스>로 유명한 대한민국 대표 순정만화가 원수연 작가의 남편.
젊은 만화가들이 존경하는 만화가이자 듬직한 형님.

 

만화가 '강도하'를 얘기하자면 수식어가 자연 화려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화려함의 핵심에는 강도하의 '청춘 3부작'이 있다.

'3부작'은 시리즈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이자 단단한 숫자이기에 문화예술계에서 심심찮게 3부작을 접할 수 있다. 일례로 영화판에는 박찬욱의 복수 3부작 - <복수는 나의 것> <올드 보이> <친절한 금자씨>가 있고, 문학판에는 공지영의 위로 3부작 - <즐거운 나의 집>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괜찮다, 다 괜찮다>가 있으며, 만화판에는 강도하의 '청춘 3부작 - <위대한 캣츠비> <로맨스 킬러> <큐브릭>이 눈부시게 빛을 발하고 있다. 

 

청춘 3부작의 출발 _ <위대한 캣츠비>     

<위대한 캣츠비>는 연재 당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작품이다. 에피소드 위주의 가벼운 웃음이 만개하던 '웹툰'이라는 새로운 공간에 완벽하게 짜인 서사와 영화를 능가하는 감각적인 화면 연출, 명대사 열전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제된 대사, 직립보행하는 동물들이 인간 캐릭터로 등장하여 나누는 사랑과 배신과 고통은 청춘을 겪어본 이들이라면 누구나 환호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본명인 '강성수'로 활동하던 언더그라운드 만화가 시절과 달리 '강도하'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선보인 그의 작품 <위대한 캣츠비>는 적당한 진중함과 트렌디한 감성, 젊고 세련된 감각으로 대중들의 시선을 끌고 입맛을 사로잡았다. 한마디로, 무겁고 진지하되 충분히 대중적인 요소를 지닌 작품이 바로 <위대한 캣츠비>였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작품 <위대한 개츠비>가 사랑에 미친 개츠비의 순정을 다뤘다면, <위대한 캣츠비>는 고양이 캐릭터 캣츠비의 사랑과 흔들리는 청춘을 담았다 하겠다. 

완벽한 짜임새와 웹상에서의 폭발적인 지지를 통해 <위대한 캣츠비>라는 콘텐츠는 당연하게도 여러 장르에 접목되었으며, 대중성과 상업성을 겸비한 수작에 대한 관심 또한 급증, 문화 예술의 다방면에 판권이 계약되며 뮤지컬, 드라마로 제작되어 호응을 얻었다. 구체적인 일정은 알 수 없으나 영화화 또한 진행 중이라고 한다. 케이블 TV에서 상영된 <위대한 캣츠비>에선 매주마다 외박하는 야생 버라이어티 예능 프로그램에서 한창 인기몰이를 하는 가수 'MC몽'이 '캣츠비'로 열연하기도 했다.

강도하의 진화, 또는 언더그라운드로의 회귀 조짐
청춘 3부작의 두 번째 작품 _로맨스 킬러

<로맨스 킬러>는 청춘 3부작 중 서사의 짜임이나 개연성에 있어 가장 완벽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위대한 캣츠비>때 보여주었던 강도하의 명성과 대중의 호응도가 조금씩 하향 곡선을 그린 시발점이 된 작품이기도 하다. 
 

예전에 사석에서 강도하 님과 술자리를 함께한 적이 있다. 강도하 작가님은 당시 모 방송의 교양 프로그램 심사위원으로 방송에 격주 출연 중이셨는데, 어찌어찌 나 역시 그 방송에 출연자로 예닐곱 차례 출연한 게 인연이 되어 녹화 후 술자리에 함께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말 그대로 '기회'가 아닌가. 애독자로서 작품에 대한 얘길 나누다가 무례하게도 이렇게 여쭈었다.


"작가님 작품을 보면 요즘은 예전의 언더그라운드 만화가 '강성수'로 회귀하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작가주의와 완벽주의를 추구하시는 건 독자로서 환영인데, 구름 위로 올라가신 듯해 일반 대중에게 어필하는 면에선 아쉬움이 있어요."라고 말이다. 이런 당돌함이라니, 순전히 쐬주의 힘이다. 
그런데 작가님께서는 의외로 담담히 - 화도 안 내시고 - "저도 요새 고민이에요."라고 겸손히 말씀하셨다. 한마디로 '락발라드'로 대중의 인기를 얻은 대중가수가 실은 '락'을 하고 싶었기에 정규 앨범 2집을 락으로 꽉꽉 채워 넣었는데, 대중은 여전히 '락' 스러운 '발라드'를 원한다고나 할까? mp3가 지원하는 음역과 깊이는 한정되어 있고 사람들은 출퇴근길 지하철이나 약속에 늦는 친구를 기다리는 동안 지루함을 달랠 달콤하면서도 적당히 있어보이는 노랠 원하는데, 강도하의 노래는 mp3가 감당할 수 없는 음역과 깊이를 지녔다는 게 맞겠다. 

하지만 그의 만화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초반에는 너무나 일상적이고 평화롭기까지 한, 이웃집과도 같은 평온함이 연출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게 바로 치명적인 함정이다. '강도하표 반전'이라 불릴법한 '막판 뒤집기'가 슬슬 드러나는 후반부엔 따라가기에 숨이 차오를만큼 이야기가 스피디하게 진행되며, 그 '반전'은 10년 동안 사용하여 거뭇한 손때가 묻고 심지어 칼자루가 손에 맞게 변형된 날카롭고 빛나는 회칼로 옆구리를 저며내는 듯한 고통과 슬픔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옆구리의 살점이 너덜해지고 자신의 창자를 스스로의 눈으로 확인하게 된 그 순간에야 비로소 독자는 '아, 초반의 평온함과 반복되는 일상이 사실은 치밀한 계산과 미칠듯한 폭풍우의 전조였구나'라고 알아차리게 된다. 

내공이 부족한 창작자들의 '반전을 위한 반전', 개연성이 떨어지는 반전을 '그저 시적 허용'정도로 얼버무린 채 밑도 끝도 없는 극단적인 상황을 제시하고 독자를 코너에 몰아붙이는 얄팍한 수쓰기를 반전이라 생각하는 무리와 강도하의 반전이 차원을 달리하는 것은 바로 이때문이다. 강도하의 반전은 모래늪과 같아 단단한 일상이라 여겨 발을 딛다 보면 어느새 절망과 고통의 수렁에 온몸이 빨려들어간 것을 뒤늦게야 발견하게 된다. 강도하의 세계는 치밀하고 단단하여 엉킨 올을 풀어낼 수가 없으니, 가장 빨리 빠져나오는 길은 모든 매듭을 단칼에 쳐내버리는 길 뿐이다. 하지만 반전이라 불릴만한 아픔과 상처를 낳게 한 현실을 어찌 단칼로 잘라버릴 수가 있단 말인가. 단칼로 자를 수 없고 한올 한올 풀어가며 사는 게 인생인데, 그렇게 단단히 엮여 수면 위로 떠오른 현실이 강도하의 결말이 주는 아픔인데 어찌 단칼로 자를 수 있단 말인가. 아니, '반전'이라는 어휘는 적당치 않다. 강도하는 그저 삶과 상처와 고통의 원인과 결과만을 보여줄 뿐이지만, 그 무게감과 충격이 너무 강해 '반전'이라 말하며 벗어나려는 것이 아닐까? 현실로 받아들이기엔 가슴이 너무 아프니, 그저 '반전'이라 여겨버리면 부담감과 현실의 무게가 줄어들지도 모른다. 아주 잠깐동안은.  


  

<로맨스 킬러> 본문 중

<위대한 캣츠비>에 열광했던 수많은 네티즌들이 충성독자로 남아 <로맨스 킬러>를 지켜주지 못한 것은, 더 완벽한 반전을 위한 사전 포석의 과정, 이야기의 초입이 느린 걸음을 보였기 때문이다. 분명 '킬러'가 주인공인데 하는 일이라곤 꽃집을 운영하는 부인 옆에서 셔터맨 노릇이나 하는 듯하고, 딸 친구의 허연 허벅지를 보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숨기지 못하니 영 못미덥지 않은가? 멋지게 총질 좀 해주고 빌딩 사이를 날아다니면 좋으련만. 이게 무슨 킬러 중의 킬러 '로얄'이더냐. 살인면허증이 아니라 장롱에 처박힌 1종 보통 운전면허보다 못할 지경이다. 현역 시절에 사용하던 권총을 땅에 고이 묻어둔 '한 때 최고였던' 킬러라니. 땅에 총을 묻으면 기관총이라도 주렁주렁 열린단 말이냐. 아, 마우스 클릭질 못하겠다. 길고 긴 스크롤을 내렸는데 오늘도 원조교제스러운 이야기냐, 사랑에 빠진 킬러는 그저 두부처럼 물렁하기만 하다. 그러니 난 떠나련다. 이런 식으로 독자들이 떠나간 게 아닐까? 하지만 떠난 그들은 모를 것이다. 손이 끊어진 애송이 킬러와 '로얄'의 복귀, 사랑이 되어버린 우정과 그 우정의 배신, 아내의 과거와 상처, 피투성이의 슬픈 결말을. 




청춘 3부작의 완결, <큐브릭>의 표지 이미지. 좌측부터 <큐브릭>1권, 2권, 3권이다. 

청춘 3부작의 완결, 완벽한 장인으로의 거듭남 - <큐브릭> 

렇다, 어디에서 본 적 있다. <큐브릭>의 표지는 비틀즈의 마지막 앨범 '애비 로드'의 재킷 이미지를 차용했다. 애비 로드는 비틀즈의 마지막 앨범이자 가장 잘 구성된 앨범이라 평가받고 있으며, 또한 비틀즈 멤버들의 불화가 절정에 치달았을 때의 작품이기도 하다. 애비 로드의 재킷은 음악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가장 많이 패러디 되기도 했다.
 

억지 춘향이긴 하겠다만, 애비 로드의 앨범 재킷을 차용한 <큐브릭>은 강도하 '청춘 3부작'의 완결작이며, 가장 깊은 슬픔을 담고 있으며, 대중과 아티스트 강도하와의 간극이 가장 멀어진 작품이라 말할 수 있겠다.

박찬욱 감독은 '복수 3부작'의 첫 작품인 <복수는 나의 것>의 실패를 뒤로 하고 <올드 보이>를 통해 멋진 성공을 거두었다는데, 강도하는 '청춘 3부작'의 첫 작품 <위대한 캣츠비>를 통해 화려하게 등장하여 마지막 작품인 <큐브릭>으로 쓸쓸한 뒷모습을 보였다 할 수 있다. 물론 <큐브릭>의 완성도는 최고다. 하지만 일상에 쓰이는 그릇은 놋그릇이나 막걸리 사발, 국그릇인데, 강도하는 <큐브릭>을 통해 국보급 청자를 만들어 버렸다. 청자는 박물관에 있을 물건이고, 우리의 일상에서 쓸 막그릇과는 거리가 멀다. 청자를 만든 장인은 뿌듯할 터이며 도공들은 그를 우러러 보겠지만, 백성들은 오늘도 막걸리를 받아올 양은 주전자나 남은 반찬과 찬밥 말아 쓱싹 비벼먹을 막그릇을 원한다. <큐브릭>이 우러러볼 완성도에 비해 널리 사랑을 받지 못하는 이유이다.

<큐브릭>은 청춘 3부작 중 앞선 두 작품에 비해서도 초반 몰입력이 다소 떨어진다. 금니 빼고 점 하나 찍은 다음 "저 그 여자 아닌데요?"라 말하며 복수의 칼날을 가는 막장 드라마의 속도에 익숙해진 대중들이 받아들이기엔 너무 더디다. 말도 안 되는 스토리의 막장 드라마 속도는 인정할 만한데, 완벽한 구성의 수작은 오히려 느리다 폄하된다니 안타까울 뿐이다. 토끼가 빠르고 거북이가 느리다 탓하면 될일인가? 토끼는 뜀박질도 빠르지만 교미도 빠르게 끝나지 않는가? 거북이는 좀 느린 듯해도 등껍질로 점치는 데도 쓰고 갑골문자 운운하며 교과서에도 등장하고, 느린만큼 장수의 상징이라 여겨져 여러모로 쓸만한 녀석인데, 왜 토끼의 빠른 뜀박질에만 주목하는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자, 웹에서 연재할 때 댓글 수 좀 적고 페이지뷰 좀 적으면 어떤가. <큐브릭>을 접하면 왜 이 작품이 '청춘 3부작'의 완결편임을 알 수 있다. 완결편인 만큼, 청춘 1,2부작을 먼저 읽을 것을 권한다. 3부작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청춘'에 대한 작가의 메시지를 온전히 접하려면 순서대로 차분히 읽는게 좋겠다. 그렇게 순서를 따르며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도 좋겠다. <큐브릭>에 등장하는 열아홉, 스물의 청춘들을 이해하고 보듬기 위해선, 그러는 게 좋겠다. 

네 명의 청춘 캐릭터는 각자의 쓰라린 상처를 끌어안고 살아가는데, 극화체의 세심한 그림과 달리 그들의 과거와 상처를 설명하는 장면은 조악한 명랑만화처럼 일부러 헐렁하게 표현되어 있다. 믿고 싶지 않고 부정하고만 싶은 과거의 상처들은 오히려 밝고 가벼운 명랑만화 스타일의 그림체와 극단의 대비를 이루며 더 깊은 슬픔을 끌어낸다. 외면과 상처는 계속되고, 그들의 사연을 알게 된 이상 책 너머 독자는 더이상 한가한 독자가 아니다. 독자 역시 상처투성이의 청춘인 미우이자, 소영이이자, 수경이자 독우이다. 살 거죽이 벗겨져 쓰린 상처에 솔솔 소금을 뿌린듯 <큐브릭>을 만난 후엔 가슴이 아파온다. 결론을 향해 치닫게 되면 될수록, 그들이 외면하고자 한 현실과 상처는 성큼성큼 그들 눈 바로 앞으로 다가온다. 벗어날 수 없다. 지워버릴 수도 없다. 그들의 사연을 말하는 것은 <큐브릭>을 접한 독자들에게 실례이자 스포일러 짓이 될 듯하니, 책장을 다 덮은 후에도 아픔과 눈물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고만 해두자.

......

큐브릭은 팔다리와 머리, 몸통이 분해되는 작은 인형, 장난감의 한 종류이다. 다른 큐브릭을 데려와 팔다리를 끼워 맞춰도, 그들은 서로 이종배합되듯 교차되고, 서로를 공유한다. 청춘의 삶에 그 어떤 상처나 이물질이 끼어들어도 청춘은 여전히 큐브릭이며, 또다른 큐브릭은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공유한다. 위로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삶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는 것이며, 상대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청춘은 불완전하지만 아름답고, 그렇기에 불완전하며 아름다운 또다른 청춘을 위로할 수 있다. 청춘에는 그런 힘이 있다.

땅바닥에 버려진 큐브릭 조각들이 마지막에 하나의 조합을 이루어 완전체가 되고, <큐브릭>은 희미하나마 생명력이 충만한 희망을 보이며 끝을 맺는다. 마치 <위대한 캣츠비>에서 친구의 아이를 임신한 여인을 가슴과 사랑으로 품은 캣츠비의 눈에 맑은 하늘이 보였듯이 말이다. 달동네 창문 너머, 고층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에 간신히 걸린 삼각형 모양의 기하학적 하늘, 한 뼘 크기의 하늘일지라도, 청춘에겐 눈부신 파랑이자 희망인 것이다. 밑변과 높이가 만나 면적을 이루는 삼각형, 조그만 하늘의 희망빛처럼, 큐브릭은 상처와 아픔도 청춘을 완성시키는 조각이자 서로를 위로하고 치유하며 사랑하는 힘의 완성과 결합이라 말하고 있다. 

초승달은 처연하지만 아름답다. 점점 살이 차올라 세상을 받아들이는 원, 보름달이 될 날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청춘은 불완전하고 비루하지만 아름답다. 보듬어줄 청춘과 오늘보다 조금은 더 나아질 내일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끝과 세상의 바닥을 보여주는 강도하의 청춘 3부작이 그저 슬프게만 남지 않는 것은 초승달 같은 청춘의 시린 아픔과 아름다움, 초승달에서 보름달을 보는 희망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청춘들에게 그대들은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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