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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이곳에 왔다. 그 사이 여러 가지 일이 있었고, 바빴고, 여유가 없었다. 오늘 쉽게 잠들지 않을 것 같다. 류이치 사카모토의 에세이를 읽으면서 그동안 일본과 연관된 것들이 계속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오늘은 이대로 밤을 새도 괜찮을 것 같은, 그런 밤이다. 현재 시간 1시 50분이다. 


  Ryuichi Sakamoto의 에세이 <<음악으로 자유로워지다>>(청미래, 2023)를 어제, 오늘  완독했다. 시기상으로는 이 책이 먼저 출간됐지만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위즈덤하우스, 2023)를 먼저 읽었다. 두 권 모두 올해 출간됐다. 올해 3월에 그는 타계했다. 암 투병 중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부고 기사에 슬펐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지상을 떠나갈 때, 나의 시간을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된다. 그의 유고작 제목인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는 특히 그렇다. 나 역시 앞으로 몇 번의 "봄"을 볼 수 있을까. 


  류이치 사카모토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사기사와 메구무의 에세이에서 언급된 몇 줄이었다.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전공투를 경험한 세대의 새로운 흐름을 언급하면서 류이치 사카모토 음악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던 것 같다. 간간이 그의 이름을 접했고, 영화 <<류이치 사카모토:coda>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내게 일본은 좀 특별한 나라다.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갖고 있다. 근대 식민지 지식인의 일본에 대한 양가 감정을 이해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큰아버지 두 분은 재일동포로 일본에서 삶을 마감하셨고, 아버지는 해방이 되면서 한국에 돌아오셨다. 십 대, 이십 대까지 일본은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30대에 근대 문학을 공부하면서 새롭게 일본과 대면하게 되었다. 조선의 지식인 절대 다수가 일본 유학을 했고, 일본을 통해 우리는 서구 문물을 접했다. 우리의 근대 문학은 '일본'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고 근대 문학 역시 일본 문학의 이식이라 할 수 있다. 교육의 효과로 오랜 시간 나는 '반일'의 카테고리 안에서 머물러있었다. 현재도 여전히 그렇다고 할 수 있지만 지금은 조금 넓은 시선으로 사리를 분별하려고 한다. 임종국의 <<친일문학론>>을 읽으면서 근대 문학 작품과 사상서를 읽으면서 '친일'과 '반일'의 경계가 그리 간단치 않음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현재도 마찬가지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너무 길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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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들어 몇 개의 전시회를 다녀왔다. 클래식 공연하고 전시회를 다닌 덕분에 내 정보가 어디로 흘러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몇 군데서 얼리 버드로 예약할 수 있는 문자가 왔다. 50% 할인된 가격에 전시회와 숙소를 예약할 수 있어서 좀 더 관심이 갔다. 속초도 그렇게 다녀오고. 


  소마 미술관의 <다시 보다:근현대미술전>, 서울 시립미술관의  에드워드 호퍼전, 건대 CVC 아트 뮤지엄의  마티스전, 더 현대의 라울 뒤피전을 다녀왔다. 다들 나름대로 특색 있는 전시회였다. 근현대미술전을 제외한 나머지 세 개의 전시회 작가의 공통점이 있다. 모두 19세기 후반에 태어나 20세기 중반까지 활동을 했다는 점이다. 세계 1,2차 대전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세대이다. 특이한 점은 마티스를 제외한 에드워드 호퍼와 라울 뒤피는 생소한 작가였다. 두 사람 모두 국내 전시는 처음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화가들만 하더라도 열 손가락이 부족하다. 에드워드 호퍼와 라울 뒤피가 미술사에 언급이 안(덜)되거나 국내에 소개가 늦은 이유가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미술에 문외한이기에 내가 잘 모를 수도 있다는 점을 제외하고라도. 그들의 작품 세계가 주류와는 달라서일까. 아니면 시대 정신에서 조금은 빗겨나 있었을까. 아무튼 내게는 조금 낯선 작가들이다. '호퍼'라는 이름만 듣고서  줄곧, 길 위의 철학자 에릭 호퍼로 착각하고 있었다.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린 줄 알았다는. ㅋ


  평소에는 혼자 다니는 편인데 이번에는 동행이 있었다. 에드워드 호퍼전에는 선배와 갔고, 라울 뒤피전에는 동료와 갔다. 두 사람 모두 나와 비슷한 연배라서일까. 그림을 보는 시선이 비슷했다. 에드워드 호퍼전에 동행한 선배는 호퍼의 작품에서 별 감동을 못 받았다고 했다. 몇 몇 그림은 인상적이었지만 전체적으로는 그저 그랬다고. 시대에 대한 고민이 느껴지지 않아서라고. 세계 1,2차 대전을 겪은 세대인데 호퍼의 그림은 중산층의 삶을 대변한는 듯한다고. 라울 뒤피 전을 함께 본 동료 역시 이외 비슷한 말을 했다. 고흐나 모딜리아니를 비롯해 가난한 화가들의 작품에 비해 라울 뒤피의 그림은 그 시대에 어려움에 비해 밝음에 집중돼 있는 것 같다고. 나는 두 사람의 생각에 어느 정도 동의하면서도 각자의 방식으로 그 시대를 건너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시대를 겪어내고 표현하는 방식이 모두 동일하지는 않을테니까. 슬픔의 느낌을 누군가는 무채색으로, 누군가는 밝은 색으로 표현한다. 그림의 색채나 조형만으로  판단하는 건 쫌... 언제부턴가 명료하고 단정적인 표현이 불편해졌다. 20대에는 명확하고 이성적이고 분명한 것이 좋았고, 그런 세계를 지향했다. 그런데, 이제는 정 반대다. 무엇이든, 이분법적인 것이 불편하다. 나이가 들었나보다.


  내가 네 개의 전시회에서 느낀 것은 20세기 벽두를 인식하는 시선이었다. 20세기 초, 중반을 바라보는 시선이 흥미로웠다. 근현대미술전은 평소에 보기 힘든 월북 작가들의 작품을 볼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특히 변월룡의 에칭은 케테 콜비츠의 작품 분위기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호퍼와 마티스, 뒤피의 공통점은 '30년대의 파리'라고 할 수 있겠다. 세 작가가 파리에서 마주한 적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30년대에 파리라는 공간에 있었다는 점에서 당시 여러 미술 유파의 영향을 받았으리라. 마티스의 그림은 후기에 머물러 있어서 그 흔적을 확인하기는 힘들었지만 호퍼와 뒤피의 그림에서는 인상파와 야수파의 분위기가 보이기도 했다. 나혜석은 1927년부터 1년 넘게 세계 여행을 했고, 프랑스에도 머물렀다. 독일 화가인 케테 콜비츠, 노르웨이의 뭉크 역시 1930년대에 프랑스에 체류했다. 미국의 소설가인 헤밍웨이 역시 파리에 있었고. 현재도 그렇지만 1930년대의 파리는 예술가들에게 특별한 공간이었다. 세계 화단의, 예술가들의 꿈의 동산이라고나 할까. 라울 뒤피의 색채가 참 좋았다. 샤갈의 색채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뒤피의 색채는 파스텔톤에 가까워서 더 따뜻하게 다가왔다. 전기 요정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전기 요정은 미리 공부를 하고 가거나 도슨트의 설명을 듣는 것이 좋겠다. 감동이 배가 되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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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란 무엇인가
김영민 지음 / 어크로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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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의 <<공부란 무엇인가>>를 읽었다. 일리야 밀스타인의 <A Library by the Tyrrhenian sea>가 책표지다. 제목과 잘 어울리는 그림이다. 일러스트라 좀 더 친근하게 다가온다. 그가 쓴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이은 두 번째 책이다. 잘 읽힌다. 저자의 강점이다. 학술적인 글을 쓰는 사람이 가볍지 않은 주제를 이해하기 쉽게 글을 쓰기란 쉽지 않다. 그런 점이 독자들이 그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 중의 하나인 것 같다. 김영민 식의 유머에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겠다.

제목부터가 호기심을 끈다. 한국인에게 '공부'는 각자의 사연 하나 쯤은 가지고 있을 만한 소재다. 공부를 잘한 사람은 잘한 사람대로, 못하거나 안한 사람은 그 나름대로 '후회' 한 조각 쯤은 안고 있지 않을까. 이 책에서의 공부는 광의의 공부이기보다는 '대학'이라는 공간 안에서의 '공부'에 방점이 찍혀 있다. 물론 책의 앞부분에 일반론적인 성격의 글이 실려있지만.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겠다. 첫째는 대중 일반에게, 둘째는 대학생에게, 세번째는 공부를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공부 방법을 알려준다. 그런 점에서 대학 공부와 연관이 없거나 '배움' 자체에 뜻이 있는 독자에게는 그다지 큰 의미가 없을 지도 모른다. 또 공부를 업으로 삼은 사람에게는 익히 알고 있거나 일반론적인 내용이라 큰 도움이 안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대학에서 기계적으로 수업을 듣고 있는 학생들에게, 직업으로서의 '학문'에 뜻을 둔 사람에게, 대학에서의 공부가 궁금한 사람에게는 흥미로운 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내게 인상적인 부분이다.

"섬세함은 사회적 삶에서도 중요하다. 섬세한 언어를 매개로 하여 자신을 타인에게 이해시키고 또 타인을 이해하고자 하는 훈련을 할 때, 비로소 공동체를 이루고 살 수 있다. 거칠게 일반화해도 좋을 만큼 인간의 삶이 단순하지는 않다. 거친 안목과 언어로 상대를 대하다 보면, 상대를 부수거나 난도질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제대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런 식의 거친 공부라면, 편견을 강화해줄 뿐, 편견을 교정해주지는 않는다. 섬세한 언어야말로 자신의 정신을 진전시킬 정교한 쇄빙선이다." 84쪽.

개인적으로 우리 사회의 '말'과 '글'이 지금보다 섬세해져야 하고, '나의 말'이 허공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너'에게 올곧이 가 닿기 위해서는 좀 더 '낮은 목소리'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섬세함'에 대한 저자의 시각에 공감한다. 공부를 통해 '변화'한다는 것은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지는 것이다. 일상의 언어가 상대방을 이기는 데 목적이 있는 '언어'가 아니라 공감하고 함께 성장하는 언어였으면 좋겠다. 한 번 쯤 읽어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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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우스는 병원 출입구에서 독시아데스를 돌아보고 손을 흔든 다음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등 뒤에서 문이 닫히고 서서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571쪽.

속초에 왔다. 5월에 왔던 기억이 좋아서 다시 왔다. 그땐 당일치기로 왕복 표를 예매하고 왔는데, 바다빛과 오월의 햇살에 반해 1박을 했었다. 예정에 없이. 오늘도 원래는 올라가는 표를 예매했다. 그런데, 표를 취소하고 하루를 더 연장해 2박 3일의 여행이 되었다. 21층 숙소에서 내려다보이는 속초의 바다풍경에 반해 이번에도 예정이 없이.

오늘 <당신의 밤과 음악사이> 마지막 연주곡은 ˝prayer˝였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마지막 몇 장을 남긴 시간이었는데, 절묘하게 연주곡과 내 기분과 소설 작품이 일체가 된듯 했다.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을 것만 같은 그레고리우스를 위한 기도를 하고픈 마음이랄까. 어쩌면 나 자신을 위로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문장을 읽었을 때 시간은 자정을 넘기고 5분이 지나 있었다.

˝사람들이 뭔가에 몰리면 그는 고집스럽게 바깥에 머물러 있었다. 베스트셀러라는 책들을 몇 년이 지난 후에야 읽는 것도 이런 성격 때문이었다.˝(544쪽)

내가 이렇다. 꽤 오래 전 서점의 베스트셀러 진열대에서 이 작품을 봤다. 제목이 너무 낭만적이고 대중적이라 왠지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낭만적인 제목과는 달리 이토록 깊이있고 심오한 매혹적인 작품이라니. 작가에 대한 정보없이 작품을 읽었다. 읽고나니 작가의 자전적인 삶이 궁금해졌다. 그레고리우스와 아마데우는 작가의 페르소나가 아닐까. 작품의 분위기가 시종 내 기분과 맞닿아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책을 읽다가 자주 행간에서 길을 잃었고 그레고리우스와 동행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도 빠졌다. 알고리즘으로 내게 온 작가의 부고소식으로 만나게 된 작가와 작품. 과연 우연일까. 뭔가 특별한 인연을 맺게된 것만 같은. 그레고리우스와 마찬가지로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포르투칼의 현대사와 저항운동의 역사에 궁금증이 생겼다. 아마데우가 저항운동을 한 시기는 주제 사라마구가 공산당원으로 활동한 시기와 겹치는 게 아닐까. 주제 사라마구의 작품 만큼이나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내게 와 준 작가와 작품에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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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작가의 부고 기사가 문자로 내게 왔다. 《리스본행 야간열차》, 소설과 영화제목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다. 딱히 읽고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었다. 부고 기사를접한 독자들의 댓글을 보자 그에 관한 궁금증이 급 생겼다. 집 근처 도서관에 가서 빌려 읽을 생각이었는데, 한 곳은 없고, 다른 한 곳은 반납 기간을 넘겨 대출이 안된다. 읽고는 싶고 빌릴 수는 없어서 알라딘 서점에서 샀다.
  스벅에서 한 장 두 장 페이지를 넘기며 벌써 좋아졌고, 얼마 전 읽은 《스토너》가 생각났다. 왠지 스토너와 그레고리우스가 닮은 듯하다. 어떤 부분은 ˝나˝라는 인간도 비슷한 부류 같기도 하다. 오후 6시. 세음이 시작하는 시간이다. <콩>을 열자 익숙한 전기현 씨의 목소리가 흘러 나온다. 류이치 사카모토, 조 히사이시 조의 음악이 이어진다. 책과 음악, 창문 너머 어스름 저녁 풍경까지. 완벽한 토요일 오후다. 세음을 들으며 집까지 걸어왔다.
  밑줄 부분을 읽으며 올 초에 타계한 오에 겐자부로가 떠오른다. 그는 《읽는 인간》에서 언제나, 늘, 모든 순간에 책과 함께였다고 했다. 슬플 때나 기쁠 때나, 괴로울 때나....책과 음악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깊은 즐거움을 주지만 둘은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음악은 그 순간 기분을 최고조로 이끈다. 반면 책은 한 문장이, 한 장면이 시간 여행을 떠나게 한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때 그 장소로 순간 이동을 하게 한다. 물론 행복한 순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도 모든 순간에 이 둘은 나와 함께 하겠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모든 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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