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들어 몇 개의 전시회를 다녀왔다. 클래식 공연하고 전시회를 다닌 덕분에 내 정보가 어디로 흘러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몇 군데서 얼리 버드로 예약할 수 있는 문자가 왔다. 50% 할인된 가격에 전시회와 숙소를 예약할 수 있어서 좀 더 관심이 갔다. 속초도 그렇게 다녀오고.
소마 미술관의 <다시 보다:근현대미술전>, 서울 시립미술관의 에드워드 호퍼전, 건대 CVC 아트 뮤지엄의 마티스전, 더 현대의 라울 뒤피전을 다녀왔다. 다들 나름대로 특색 있는 전시회였다. 근현대미술전을 제외한 나머지 세 개의 전시회 작가의 공통점이 있다. 모두 19세기 후반에 태어나 20세기 중반까지 활동을 했다는 점이다. 세계 1,2차 대전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세대이다. 특이한 점은 마티스를 제외한 에드워드 호퍼와 라울 뒤피는 생소한 작가였다. 두 사람 모두 국내 전시는 처음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화가들만 하더라도 열 손가락이 부족하다. 에드워드 호퍼와 라울 뒤피가 미술사에 언급이 안(덜)되거나 국내에 소개가 늦은 이유가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미술에 문외한이기에 내가 잘 모를 수도 있다는 점을 제외하고라도. 그들의 작품 세계가 주류와는 달라서일까. 아니면 시대 정신에서 조금은 빗겨나 있었을까. 아무튼 내게는 조금 낯선 작가들이다. '호퍼'라는 이름만 듣고서 줄곧, 길 위의 철학자 에릭 호퍼로 착각하고 있었다.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린 줄 알았다는. ㅋ
평소에는 혼자 다니는 편인데 이번에는 동행이 있었다. 에드워드 호퍼전에는 선배와 갔고, 라울 뒤피전에는 동료와 갔다. 두 사람 모두 나와 비슷한 연배라서일까. 그림을 보는 시선이 비슷했다. 에드워드 호퍼전에 동행한 선배는 호퍼의 작품에서 별 감동을 못 받았다고 했다. 몇 몇 그림은 인상적이었지만 전체적으로는 그저 그랬다고. 시대에 대한 고민이 느껴지지 않아서라고. 세계 1,2차 대전을 겪은 세대인데 호퍼의 그림은 중산층의 삶을 대변한는 듯한다고. 라울 뒤피 전을 함께 본 동료 역시 이외 비슷한 말을 했다. 고흐나 모딜리아니를 비롯해 가난한 화가들의 작품에 비해 라울 뒤피의 그림은 그 시대에 어려움에 비해 밝음에 집중돼 있는 것 같다고. 나는 두 사람의 생각에 어느 정도 동의하면서도 각자의 방식으로 그 시대를 건너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시대를 겪어내고 표현하는 방식이 모두 동일하지는 않을테니까. 슬픔의 느낌을 누군가는 무채색으로, 누군가는 밝은 색으로 표현한다. 그림의 색채나 조형만으로 판단하는 건 쫌... 언제부턴가 명료하고 단정적인 표현이 불편해졌다. 20대에는 명확하고 이성적이고 분명한 것이 좋았고, 그런 세계를 지향했다. 그런데, 이제는 정 반대다. 무엇이든, 이분법적인 것이 불편하다. 나이가 들었나보다.
내가 네 개의 전시회에서 느낀 것은 20세기 벽두를 인식하는 시선이었다. 20세기 초, 중반을 바라보는 시선이 흥미로웠다. 근현대미술전은 평소에 보기 힘든 월북 작가들의 작품을 볼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특히 변월룡의 에칭은 케테 콜비츠의 작품 분위기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호퍼와 마티스, 뒤피의 공통점은 '30년대의 파리'라고 할 수 있겠다. 세 작가가 파리에서 마주한 적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30년대에 파리라는 공간에 있었다는 점에서 당시 여러 미술 유파의 영향을 받았으리라. 마티스의 그림은 후기에 머물러 있어서 그 흔적을 확인하기는 힘들었지만 호퍼와 뒤피의 그림에서는 인상파와 야수파의 분위기가 보이기도 했다. 나혜석은 1927년부터 1년 넘게 세계 여행을 했고, 프랑스에도 머물렀다. 독일 화가인 케테 콜비츠, 노르웨이의 뭉크 역시 1930년대에 프랑스에 체류했다. 미국의 소설가인 헤밍웨이 역시 파리에 있었고. 현재도 그렇지만 1930년대의 파리는 예술가들에게 특별한 공간이었다. 세계 화단의, 예술가들의 꿈의 동산이라고나 할까. 라울 뒤피의 색채가 참 좋았다. 샤갈의 색채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뒤피의 색채는 파스텔톤에 가까워서 더 따뜻하게 다가왔다. 전기 요정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전기 요정은 미리 공부를 하고 가거나 도슨트의 설명을 듣는 것이 좋겠다. 감동이 배가 되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