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좀비들
김중혁 지음 / 창비 / 2013년 4월
평점 :
판매중지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핸드폰에 경보 문자가 잔뜩 와있다. 사람들이 좀비로 변하고 있다는 알림이다. SNS에 들어가 보니 세상은 난리 통이고, 방문 밖에서는 이미 좀비로 변한 엄마가 방문을 쾅쾅 치고 있다. 이때 좀비 엄마를 해치우고(?) 탈출할 수 있을까? 나는 아마도 못 할 것 같다. 좀비가 되어버린 엄마도 내가 사랑하는 엄마인데, 엄마를 해치우기보다는 엄마한테 물리는 쪽을 택하지 않을까?

 

김중혁의 좀비들은 좀비들 틈에서 살아남는 생존 서바이벌이라기보다 한때 가족이었던 좀비 몸의 상처를 보며 슬퍼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자, 여러 이별과 만남을 거듭하며 한층 단단해지는 주인공의 성장 소설이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주인공이 변화하는 모습이 여실히 드러난다. 채지훈은 초반에 자신의 기분을 1에서 10까지의 숫자로 표현했지만 뚱보 130과 홍혜정을 만나고부터는 그 숫자가 의미를 잃는다. 엄마와 형의 죽음에 의미 없는 하루하루를 보냈던 주인공이 홍혜정의 죽음은 진심으로 슬퍼하고 그리워할 줄 알게 되고 좀비로 변한 뚱보130을 불구덩이에서 구하기 위해 몰아닥치는 좀비들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2010년에 출간된 책인 만큼 철 지난 내용이기는 하지만 김중혁 작가의 유머와 상상력이 소설 전체에 퍼져 있어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다만 내용 간의 개연성이 조금 떨어지는 듯하다. 줄거리 요약을 하는 데 연결이 뚝뚝 끊겨 그러던 어느 날없이는 이어지지 않는 느낌이었다.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삶은 일직선이었다. 하나의 사건은 이전 사건의 결과이자 다음 사건의 원인이었다. 도미노가 다음 도미노를 넘어뜨리듯 모든 사건은 연결돼 있었다. 맨 처음 도미노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처음이란 중요한 게 아닐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이곳에 서있다는 것이고, 지금의 이 사건은 또다른 사건의 원인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 P23

외로움 때문에 내 기분은 오래간만에 1로 떨어졌지만 예전의 1과는 달랐다. 예전의 1이 1에다 1을 백번 정도 곱해서 나온 결과였다면, 그날밤의 1은 3에서 2를 뺀 1이었다. - P77

그중에서 어떤 문제가 생길지 알 수 없었다. 문제가 전혀 생기지 않을 수도 있고, 이 모든 문제가 한꺼번에 닥칠 수도 있었다. 어떤 문제가 닥친다 하더라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리 준비해서 막을 수 있는 문제는 거의 없을뿐더러 막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시간낭비다. 모든 문제에는 답이 붙어 있게 마련이다. 문제가 닥치면 그 문제를 자세히 들여다보기만 하면 된다. 그 속에 답이 있으니까. - P87

이해하는 것과 겪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다. - P102

"무엇이든 일 퍼쎈트만 관심을 더 가지면 많은 게 변해요. 엄마가 현이를 하루에 일분만 더 생각했더라면 아무도 죽지 않았을 거예요. 여섯 명의 목숨을 살릴 수 있었겠죠."
"그럼 다른 게 바뀌었겠죠. 어차피 모든 가능성은 백 퍼쎈트 이내고, 하루는 이십사 시간뿐이니까요." - P138

우리는 정작 알아야 할 것들은 알아내지 못하고, 알 필요가 없는 것들을 너무 많이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 P139

홍이안은 이야기하는 도중에 미간을 찡그리는 버릇이 있었는데, 농담을 시작하기 전에 주로 그랬다. 미간에서 농담이 시작되는 모양이었다. 대륙과 대륙이 뒤틀리는 자리에서 지진이 만들어지듯 눈썹과 코와 이마가 맞부딪치는 자리에서 농담이 발생하는 거다. 그렇게 발생한 농담은 한랭전선이 이리저리 얽혀 있는 입가로 진출해 턱 쪽의 온난전선과 결합한 다음 얼굴 전체에 웃음을 발생시키는데, 웃음이 시작되면 온몸의 온도가 1도 정도 상승하는 효과가 나타난다. - P191

충격이란 건 말이죠, 받아들이는 쪽에서 마음만 먹으면 아무 일도 아닌 게 될 수 있는 겁니다. - P233

우리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냄새는 바닥에서 낮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앉아 있으니 냄새가 심해졌다. 바닥에 붙어 있던 냄새들이 내 몸을 타고 엉덩이와 허벅지에 묻으면서 점점 위로 올라와 배와 등과 목을 타고 온몸을 휘감은 다음 결국 코로 들어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P338

나는 예전부터 죽음 이후의 삶이 궁금했다. 내가 죽는다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면,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된다면, 내가 지금 붙잡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이 도대체 무슨 소용일까 싶었다. 한때는 모든 게 부질없게 여겨졌다. 관계란, 사랑이란, 집착이란, 실망이란, 희망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싶었다. 아무것도 시작하고 싶지 않았고, 끝이 뻔히 보이는 길은 걸어가고 싶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일에 처음과 끝이 있다는 게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처음과 끝은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몰랐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이곳에 서 있다는 것이고, 지금의 이 사건은 또다른 사건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 지금 이곳에 서 있다는 것이 기적처럼 여겨졌다. 누군가는 죽었고, 누군가는 죽을 테지만, 누군가는 계속 살아남아서 기적처럼 길을 걸어가야 할 것이다. - P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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