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의 모험 - 원문을 죽여야 원문이 사는 역설의 번역론
이희재 지음 / 교양인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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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나의 하찮은 기억력이 참 싫다. 한 번 본 책의 줄거리는 며칠만 지나도 까먹고 외워두고 싶은 지식은 매번 뒤적여 찾아보지 않으면 안 된다. 기억력이 좋았다면 그런 수고스러운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수도 있고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의 실력도 쑥쑥 늘어날 텐데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오늘도 역시 여러 책을 뒤적거린다.

 

하지만 외워서는 풀리지 않는 문제도 있는 법. 이희재 번역가가 쓴 번역의 모험이 그렇다. 번역의 탄생에서는 이것은 번역투이니까 이렇게 고치세요하는 답이 있었다면 이 책은 이게 더 자연스러운데, 어때요?’라는 물음을 던지는 듯하다. 저자는 그다지 부자연스러워 보이지 않는 문장을 조금씩 요리조리 바꿔 명료한 문장으로 만들어 내는데, 저자가 바꾼 문장을 보고 나면 이전 문장이 얼마나 어색했는지 실감하게 된다. 예를 들어 한 부분을 들여다보자.

 

The speakers, who arrived last night, were able to meet the students.

위의 영문을 어젯밤에 도착한 연사들은 학생들을 만날 수 있었다고 옮기면 정확한 번역이 아닙니다. 한국어 번역은 어젯밤에 도착하지 않은 연사들도 있고 그 연사들은 학생들을 못 만났다는 뉘앙스를 풍깁니다. 하지만 영문은 앞뒤에 쉼표를 찍어주어 연사들은 어젯밤에 모두 도착했다고 분명히 밝힙니다. 그러니 연사들은 어젯밤에 도착했고 학생들을 만날 수 있었다로 옮겨야 정확합니다.

 

하지만 본인이 지닌 한국어 역량에 따라 바꾸기 전과 바꾼 후의 문장에 큰 차이가 없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그만큼 오랜 번역 경험에서 나온 저자의 실력이 가치를 지닌 것이리라.

 

번역가뿐만 아니라 글을 다루는 사람이라면 꼭 한 번씩은 읽어봐야 할 책인 듯싶다. 기억력이 안 좋은 나는 수십 번은 읽어야 하겠다.

문학어는 번역이 쉽지 않습니다. 작가가 쓴 단어와 문구의 뜻을 정확히 알려면 해당 작품 하나뿐 아니라 작가가 쓴 모든 작품, 작가의 삶도 고스란히 알아야 해서 그렇습니다. 창조적이고 실험적인 작가일수록 그렇습니다. 단어 하나를 제대로 옮기려면 그 작가의 삶과 모든 작품을 아우르는 거대한 맥락에 두고 이해해야 합니다. - P37

고전 라틴어의 틀을 명료하게 확립한 키케로는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문장부호에 기대지 말고 글 자체의 짜임새와 리듬으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쉼표가 없어도 머리에 잘 들어오는 글이 좋은 글입니다. 단어의 위치에 따라 글이 흐려지고 밝아집니다. - P40

말하듯이 글을 써야 합니다. 글처럼 쓰려고 하는 문장은 지저분해지기 쉽습니다. 말하듯 쓰려고 하는 문장은 저절로 깨끗해집니다. 문장부호에 안 기대고 소리만으로 청중을 사로잡았던 고대 그리스의 시인처럼 글을 써야 합니다. - P43

독자가 자원을 아낄 수 있으려면 중요한 대목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글을 써야 합니다. 그러자면 중요하지 않은 대목에서 불필요하게 독자의 관심이 쏠리지 않도록 신경써야 합니다. - P102

비교 대상 자체가 낯설고 생소하다면 글에서 제시하는 비교 대상은 글의 흐름을 오히려 끊어놓습니다. 원문에 담긴 내용은 최대한 살려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번역자가 사소한 대목까지 있는 그대로 옮겨놓으면 독자가 고통스러워집니다. - P106

번역가는 기존의 사전에 없는 뜻에 기어이 이름을 지어주고야 마는 사전편찬자의 마음으로 이 말과 저 말을 잇는 징검다리를 만들어내겠다는 절박감이 있을 때 좋은 번역가가 될 수 있습니다. 사전편찬자는 낯선 말을 만났을 때 건너뛰지 않고 기어이 뜻을 밝혀내는 번역가의 마음으로 이 사전 저 사전을 뒤지면서 기존의 사전에 없는 뜻을 찾아내려는 간절함이 있을 때 좋은 사전편찬자가 될 수 있습니다. 번역가는 사전편찬자입니다. - P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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