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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통기한이 지난 시간들을 보냈다 ㅣ 청춘문고 25
장하련 지음 / 디자인이음 / 2020년 6월
평점 :
절판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 그 사람과 함께 간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우연히 이 책을 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사람과 사랑에 상처받는 일을 너무 두려워했고, 그가 유통기한이 지난 시간 속에 머물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이 책을 선물로 주고 싶었다. 공감되는 문장에 줄을 긋고 동아줄에 포스트잇을 붙여서. 그러나 생각보다 어두운 분위기에 아직도 책을 전해주지 못했다.
디자인이음이 독립출판에서 주목받는 책을 문고판으로 리뉴얼해 ‘청춘문고 시리즈’를 발간했다. 그 스물다섯 번째 작품이 장하련의 《유통기한이 지난 시간들을 보냈다》이다.
장하련 작가는 독립 출판으로 《유통기한이 지난 시간들을 보냈다》, 《취하지 않고서야》, 《같은 향수를 쓰는 사람》 세 권을 냈고, 그 중 《같은 향수를 쓰는 사람》을 뺀 두 권은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비릿한 냄새가 났다. 상실의 고통은 유통기한이 지난 상한 것이었다. 유통기한이 지난 시간들을 보냈다. 오래전 담아둔 감정들은 열리지 않는 뚜껑에 갇혀 썩어갔다. 무슨 이유와 미련이 그토록 남아 비워내지도 못하고 한참을 그렇게 피워낸 곰팡이처럼 살았을까.(p.7)
작가는 이 책의 제목이 앞을 볼 줄 모르고 그저 남겨놓은 것만 바라보던 미련한 자신을 자책하는 문장이라 말한다. 누군들 그런 시간 속에서 헤매지 않았으랴. 그 시간과 감정을 담담히 써 내려간 작가의 용기가 대단할 따름이다.
책 제목에 마음이 끌린 사람이라면 곰팡이가 핀 시간 속에 살아봤던 사람 혹은 살고 있는 사람이리라. 그런 사람이 이 책을 본다면 잠시 침잠할 수도 있을 듯하다. 그러나 자신이 지금 과거의 시간을 사는 건 아닌지 돌이켜볼 수 있을 것이다.
A와의 연애가 끝나자 A를 통해 받아 온 사랑을 잃었고 A라는 존재를 잃었다. 오늘 A와 헤어져서 아팠고, 아마 내일 역시 아파할 것이다.… 그렇게 계속 계속 사랑을, 사람을, 수많은 것을 잊지 않고 잃어간다. 생각보다 꽤 많은 걸 잃으며 살았다. 그에 따른 고통이 있었다면, 마음껏 사랑했기 때문일 것이다.… 버리지 못한 미련 때문에 더욱 또렷하게 아팠다.… 괴로울 땐 온 힘을 다해 괴로워하고, 회복의 순간에는 최선을 다해 나를 회복시켰다.… 상실 속에는 슬픔도 있고 분노도 있다. 그리움도 있고 미련도 있다. 수많은 감정이 한데 뒤섞여 오늘은 용서를, 내일은 분노를 표출하는, 뒤죽박죽 엉켜버린 감정 곡선에 물음표를 던지며 갈대처럼 휘청거린다. 결국 나를 책망하기도 한다. 상실에 대한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우리는 불완전한 사람일 뿐이다. 모든 삶은 완벽할 수 없으니까. - P11
고요함이 켜켜이 포개진 멍든 새벽이었다. - P15
손을 잡고 거닐던 그날들이 셀 수 없이 가득 차서 그 기억들이 체한 듯 얹혀 속이 울렁거렸다.… 진득하니 남아 있을 줄 알았던 여운인데 추억이 기억으로만 남았다. - P17
우리는 진작에 끝이 났지만 끝나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수많은 쉼표를 거쳐 마침표를 찍었다.…그러니까 우리 각자, 서로 잘 살면 좋겠다. - P23
어떻게 보면 나는 누군가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해주는 누군가의 사랑을 사랑한 것인지도 모르겠다.…새로이 찾아온 사랑을 지나간 사랑 위에 포개어 덮었다.… 당신을 잃어서 내가 아픈 건지, 단지 사랑받지 못하는 절망감에 아픈 건지 잘 모르겠다.…무엇이 답이든 나는 그 답을 부여잡고 온갖 것의 의미를 부여하며 더 아파할 것이다. - P25
꿈에서 깨어난 새벽에도 그 캄캄한 새벽에도 내 손바닥에 너의 뺨이 느껴져서 그 손을 가득 쥐고 한참을 울었다. - P35
침대 머리맡에 둔 핸드폰에서 작은 진동이 울린다 싶으면 행여나 너일까 싶어 즉각적으로 심장이 반응하는 날이 있었다. 자다 깬 새벽에는 부재중 전화도, 열지 않은 메시지도 없는 굳게 입을 다문 핸드폰을 보고 베갯잇에 얼굴을 파묻은 채 아쉬움을 토해내며 다시 잠드는 날도 있었다. - P37
그만해야겠다고 생각하고서 정작 멈출 수 있었던 것은 단 하나도 없는 것 같다. 눈곱만치도 미련 없는 척 굴며 등을 돌려도 그림자는 그곳을 떠나지 못하는 게 다반사였다. 사는 게 녹록지 않다. - P40
거칠게 몰아치는 파도에 멀미가 나서 어서 잔잔해지라며 다그쳤는데, 잔잔해지고 보니 삶의 이유조차 까마득히 멀어진 듯 사는 게 지루해졌다. - P54
생각은 생각의 꼬리를 물고 제멋대로의 상상력이 덧대어져 끝내 혼자만의 착각과 오해와 의심의 결과물을 내민다. - P56
한참을 고민하다가 용기 내어 한 마디 한 마디 힘을 주어 말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얕은 대답이 건너왔다.… 홀가분해지겠다고 꺼낸 용기가 더욱 짐이 되어 돌아왔다. - P60
가질 수 없는 것을 탐하는 순간 내 인생의 모든 것이 못마땅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굳이 내뱉을 필요가 없었다. 꾸역꾸역 집어삼키는 게 차라리 나은 순간이었다. - P61
익숙해진다는 건 더 이상 특별하지 않다는 말일 수도 있겠지만 분명 예외도 존재한다고 믿어. 적어도 우리는 그 예외에 속한 인연이길 바라는 마음이야. 더 이상 너를 잃고 싶지 않아, 나는.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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