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숲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 지음, 권수연 옮김 / 포레 / 2015년 10월
평점 :
절판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의 책은 몰입이 쉬운 책은 아니다. 주인공이 범인에게 다가가기까지 많은 분야의 지식과 정보들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이번 책에서도 정신의학, 고인류학, 유전학 등을 고루 등장시키고 있으며 남미 지역에 대한 지리학적 정보와 역사적, 정치적 과거까지 들먹이고 있다. 그러나 해당 분야들을 넓고 얕게 다루고 있어서 이 때문에 골 아파 못 읽을 정도는 아니다.


보통 인기 높은 장르소설들은 선정적 잔혹함에 몸서리치게 하거나 페이지를 빠르게 넘어가게 하는 속도감 넘치는 전개를 펼친다거나 혹은 나 같은 멍청한 독자들은 상상도 못할 반전들로 재미를 주곤 하는데 이 책은 조금 다르다. 목을 서서히 조여오는 밧줄 같다고나 할까. 책 초반부에야 당연히 주인공은 범인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니 그런 분위기를 느낀다 해도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다. 그런데 클라이맥스에 이르러서도 작가는 절대 서두르는 법이 없다. 범인과 주인공의 대치가 독자로 하여금 피를 말리게 한다. 일부러 이런 말 저런 말해가며 시간을 끄는 것도 아니다. 충분히 긴박하고 위험천만한 순간임에도 그 장면을 구석구석 맛보게 한다고나 할까. 영화에서 범인을 겨눈 총알 한방이 발사되고 그 순간을 잠시 느리게 보여주는 장면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방금 전까지 보여주던 눈 돌아갈 정도로 정신없는 액션 장면 바로 다음에 그런 슬로 모션이 잡혀도 관객들은 진행이 느려졌다고 불평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장면이 순간의 긴장감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고 꼭 쥔 손에 힘을 한번 더 주게 만들 뿐. 토마토에 소금을 약간 뿌려먹으면 토마토 특유의 단 맛이 더 살아나듯이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의 책에는 그런 맛이 존재한다.


다만 이번 책에서는 몇 번의 우연들이 사건과 범인에게 접근할 수 있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데, 그 부분이 많이 아쉬웠다. 이탈리아 장인이 한 땀 한 땀 공들여 짠 것 같은 예술품 만들 듯이 작품을 그려내는 작가의 작품에 이런 우연이 끼어들다니 사실 많이 아쉽다. 주인공 잔의 캐릭터 역시 완전해 보이지 않는다. 어린 시절 겪었던 충격적인 사건의 기억은 이 끔찍한 여정(?)을 끝까지 버티게 한 원동력이 되어주었다고 치자. 책 초반에 등장하는, 구제불능의 남자에게 빠져 넘지 말아야 할 선인 직업윤리까지 던져가며 질척거리는 모습과 신경질적이고 까탈스러우며 금욕주의자다운 자기 절제를 하는 그녀와 신경안정제에 의존하는 잔의 모습은 뭔가 균형이 맞지 않아 보인다.


방대한 분야의 지식과 정보를 쏟아부었기에 마지막에 등장할 범인의 정체와 진실이 무엇일지 무척 기대했었는데 사실 좀 약했다. 완성도만을 놓고 따져봤을 때 작가의 예전 작품들에는 살짝 못 미치는 듯하다. 그래도 이번 책은 다른, 강력한 한방이 있다. 책 표지... 우와~ 너무 무섭다. 책을 읽다가 내려놓아야 할 때는 항상 뒤집어 놓게 되더라. 그 눈빛, 잔이 책 속에서 내내 느꼈을 공포, 그 자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개인주의자 선언 - 판사 문유석의 일상유감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성비 좋은 행복 전략이라는 관점으로 생각하면 직업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집착할 필요도 없다. 우선 자기 힘으로 생존하는 것이 생명체의 기본 사명이므로 냉정하게 현실적으로 자기가 선택 가능한 직업 중 최선을 선택하여 생계를 유지하되, 직업은 직업일 뿐 자신의 전부를 규정하는 것은 아니므로 취미 활동, 봉사, 사회 참여 등 다양한 행복 활동을 병행할 수 있는 것이다. 춤추는 것을 좋아한다고 반드시 백댄서가 되어 평생 춤만 춰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일하면서 동호회 활동으로 홍대 앞에 나가 춤을 춰도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재능과 열망의 크기에 따라 합리적으로 선택하면 그뿐이다. 이런 식으로 위험을 분산하면 행복할 기회가 늘어나고 소소한 행복의 플랜B, 플랜C를 계속 만들어갈 수 있다.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는 과학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족이라는 병 - 가장 가깝지만 가장 이해하기 힘든… 우리 시대의 가족을 다시 생각하다
시모주 아키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살림 / 201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왜 너는 가족을 거부했을까. 가족이라는 피할 수 없는 관계 속에 도사리고 있는 슬픔을 깨달았기 때문이야. 서로에게 기대고, 서로를 보호하는 관계와 안이한 감정에 잠겨 위로를 찾는 그 거짓됨을 못 본 척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지.

 또 아이를 낳아, 어머니와 똑같이 애정에 이끌려 다니는 자신의 모습도 보고 싶지 않았겠지.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서 부모가 되고, 그것이야말로 인간으로서의 성장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너는 성장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던 거겠지.

 면면하게 이어지는 자연계의 흐름, 봄이 되면 마른 땅속에서 새싹이 돋아나는 현상, 모든 것이 얼어붙는 겨울에도 깊은 땅속에는 봄을 기다리는 무수한 생명이 있잖아. 그 끝없이 이어지는 생명으 연쇄가 끔찍해서 너는 그냥 너이고 싶었던 거야.

 그러나 너 혼자 온전히 저항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거대한 흐름에 떠내려가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지 않았을까.

 언젠가는 반려도 이 세상을 떠나는 날이 오겠지. 지금 너는 그날에 대비해 혼자임에 익숙해지려고 준비하고 있구나.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나, 어둡고 먼 길을 홀로 걸어왔던 것처럼 마지막에는 결국 혼자라는 것을 마음속으로 수도 없이 되뇌면서 말이야.   - p. 230~23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차일드 44 뫼비우스 서재
톰 롭 스미스 지음, 박산호 옮김 / 노블마인 / 201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원작을 먼저 봤어야 했다... 근데 그랬으면 영화가 더 재미없었겠지... 각설하고, 이런 데뷔작을 쓰는 사람들은 얼마나 천재인 건가. 실제 있었던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지만 역사적 배경을 바꿔 재탄생시키는 작가의 솜씨는 그야말로 탄복할만했다. 책을 읽는 동안 쓸데 없는 군더더기나 의미 없는 문장 따위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훌륭한 목수는 못을 쓰지 않는다고 들었다. 이 작품을 표현하는 데 있어 이만큼 정확한 수식어는 찾아볼 수 없겠다. 완벽하게 짜인, 훌륭한 작품이다.


영화의 경우 실력 있는 배우들의 연기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설정 등을 배제하여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를 만들어버렸다. 그중 한 가지만 언급하자면 살인범이 왜 그런 일들을 벌였는가에 대한 설명이 없다. 작품에서 일반 시민들이 잔인하게 아이들을 죽이는 살인자에 대해 상상하기를, 패전 후 러시아의 사회 질서를 무너뜨리려는 나치 추종자들 중 하나일 거라는 대목이 나온다. 영화는 아마 그 부분을 슬쩍 차용하려 한 듯 하나, 그마저도 정확히 밝히지 않았다.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는 법이다. '그냥'이라는 대답으로 넘어가기엔 우린 너무 많이 알고 있다.


이 책은 액션/스릴러(알라딘 분류 기준)라는 장르 안에 가둬두기엔 너무 크다. 구 소련 공포 정치 시대의 배경과 인간 군상들에 대한 묘사가 너무 리얼하다. 숨죽이고 눈 돌리고 웅크린 채 살아가는 사람들의 한껏 낮춘 숨소리마저 들리는 듯한 책이다. 이런 책은 수상 타이틀이나 유명인의 추천이 불필요하다. 오래도록 살아남아 계속 회자되고 읽힐 테니까. 각종 지라시들과 선정적인 읽을거리 틈에서 오염된 내 눈과 뇌가 재충전 된 듯하다. 그야말로 좋은 작품이 주는 파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늘도 화를 내고 말았습니다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5년 9월
평점 :
절판


개념 없고 예의 없고 배려 없는 사람들... 그들을 어디까지 이해해야 하는 걸까. 나이가 많다고 몸이 불편하다고 그 모든 것들이 다 없었던 일이 되거나 용서되는 것은 아니다. 참아야만 하는 입장에 있는 나는 언젠가부터 짜증과 화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화'라는 것은 개개인마다 소화할 수 있는 적정 한계량이 있는 것 같다. 그 이상이 넘어가면 감정의 동요를 숨길 수가 없고 적절한 방법으로 발산하거나 해소하지 못하면 병이 난다. 결국 난 여기저기 계속 아프기 시작했고 병원비는 점차 불어나고 있다. 언제까지 참아야 할까... 어떻게 풀어야 할까... 이 또한 곧 지나가리라,며 스스로를 달래보지만 그 언젠가의 미래를 위해 오늘의 난 아프고 초라하다.



 

미래를 위해 지금의 '즐거움'이 줄어드는 것은 수험 생활만으로 충분히 넌덜머리.

천천히, 그리고 즐겁게 해나가면 된다고 생각한다.

라고 주절거리고 있다가는 언제까지고 출세하지 못하겠지만…….   - p. 15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