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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향 ㅣ 시공사 베른하르트 슐링크 작품선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박종대 옮김 / 시공사 / 2013년 4월
평점 :
품절
페터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방학은 진정 아름답다. 기차를 타고 할아버지댁으로 가서 아름다운 호숫가 옆의 집에서 평화로운 시기를
보낸다. 저녁마다 <기쁨과 재미를 주는 소설 총서>를 편집하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모습도 그림처럼 눈앞에 떠오르고, 할아버지가 손자와
산책하며 들려주는 전쟁사 이야기들도 귓가에 옹알이처럼 들려오는 듯 하다. 종이가 귀했던 시절인지라 할머니가 연습장 용도로만 사용하라며
주신 이면지에 쓰여진 카를의 귀향 이야기가 페터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다. 물론 성장기에 뭔가 전환점이 될 만한 일은 그것의 크고 작음에 관계는
없다. 귀향 이야기가 페터에게 어떤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하다. 어머니와의 사이에서 금기시 된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 페터는 무의식에서부터 그
존재에 대한 궁금증과 그리움이 있었을 테니까... 다만 나는 이런 류의 자아 찾기나 자신의 근원에 대한 궁금증을 좇아 가는 이야기가 참
불편하다. 아버지의 뒤를 좇는 과정은 그 시대적, 역사적 사건들과 분위기에 맞게 암울할 수 밖에 없지만 초반의 그것과 너무 극명하게 대비되는
지라 페터 못지 않게 내 마음도 불안하기만 했다. 그렇게 다정하고 현명한 조부모님을 두고도 사람은 굳이 아버지란 존재가 필요한 것인가...
어머니가 그리 냉정하고 비밀스런 분이 아니었다면 페터의 호기심은 덜 했을까 궁금하다. 베른하르트 슐링트가 존재와 존엄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가는
데 있어 일가견이 있음을 알고 있지만 불편한 내 마음을 나까지 외면할 수는 없었다. 이책, 방출이다...
[ 내 기억 속의 방학은 깊고 잔잔하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는 시간이다. 그리고 고르게 흘러가는 삶, 반복되는 삶에 대한 약속이다.
아주 사소한 부분만 다르게 일어날 뿐 항상 똑같은 것이 반복되는 그런 삶, 전체적으로는 줄지어 고르게 굴러가지만 어떤 것도 방금 지나간 것과
똑같지 않은 파도 같은 삶 말이다. - p. 38 ]
[ 나는 바바라의 집에 전화를 걸었지만 그녀가 받는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확인만 하지 않았을 뿐, 여러 번 그녀의 집 전화번호를
눌었고, 두세 번 벨이 울린 다음에 곧바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녀를 깨우거나 곯리려고 그랬던 덧이 아니고, 한 번만 더 울리면 전화를 받을
것 같아 그랬던 것도 아니었다. 나는 다만 그녀의 인생에서 두세 번 정도의 전화벨 소리는 되고 싶었을 뿐이다. - p. 141 ]
[ 나는 내가 잘못하지도 않은 일로 사과하고 나자 너무 서글펐다. 나중에야 나는 그것이 엄마와의 평화를 위해 내 자존심을 판 행위였다는
것, 자신이 잘못하지도 않은 일을 사과해야 하는 자기비판의 모든 형식이 결국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무너뜨리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존감이 붕괴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어른이 돼서까지 나 자신을 배신하고 싶지 않았다. - p. 36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