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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드런 액트
이언 매큐언 지음, 민은영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5월
평점 :
피오나는 가사부(우리나라로 치면 가정법원쯤) 판사이다. 이혼 소송이나 아동학대, 양육권 분쟁 등을 담당하며, 그 능력 또한 인정받고 있는 59세의 판사다. 남편의 어처구니 없이 당당하고 뻔뻔한 외도 선언에(결혼은 깨지 않고 바람을 피우겠다는, 죽기 전에 열정적인 관계를 가져보고 싶다는 바램으로) 피오나는 절망한다. 빠르고 현명하며 냉정하되 합리적인 결정을 수시로 내리고 납득시켜야 하는 일상 속에서 피오나는 남편과의 관계를 깨지도, 차분히 돌아보지도 못 한다. 그 와중에 종교적인 이유로 수혈을 거부하는 백혈병 환자 '애덤' 사건을 맡게 된다.
낮 동안 피오나는 여러 가지 복잡한 사건들을 다루고 밤이 되면 남편과의 관계에 괴로워한다. 법과 원칙을 존중하는 삶을 택한 그녀에게 이런 위기와 변화는 다루기 어려운 문제다. 이성과 논리, 법과 판례로 설명하고 정의할 수 없는 문제들, 사람을 감정적으로 만들고 최악의 선택을 하게 만드는 문제 말이다. 피오나는 애덤을 만나 종교에 대한 무모할 정도의 믿음과 음악, 시에 대한 순수한 열정 등을 보고 위로받는다. 그러나 항상 냉철한 이성을 빛내고 쟁점들을 두루 살피어 짚어낸 문장으로 훌륭한 판결문을 작성해 오던 피오나는 갑작스레 닥친 혼란으로 인해 충동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이언 매큐언의 "속죄"에서도 그랬지만, 한 번의 말실수, 순간적인 판단 미스로 인한 행동의 결과가 일파만파로 번져가는 걸 일개 개인의 힘으로는 막을 수가 없는 법이다. 최초의 의도나 당시의 상황, 시간이 흐른 뒤에 찾아드는 심경 변화, 반성과 후회 따위와는 상관없이 한번 사람의 손을 벗어난 것은 되돌릴 수가 없는 것이고, 이언 매큐언은 그런 비극에 정통한 작가이다. 안타까운 건 항상 원칙을 지키며 살아온 사람은 한 번의 실수에 이토록 크게 고통받게 되는데, 잭 같은 사람은 잘못을 저질러도 큰 여파가 남지 않는다. 오랜 세월 쌓아온 부부만의 신뢰와 애정이 순간적인 열정과 쾌락에 밀려 내동댕이 칠만한 성질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뻔뻔하게 잭은 그걸 입에 담고 가방을 챙겨 피오나를 떠난다. 결국 후회하며 되돌아온 잭에게 피오나는 아무 말없이 새로 바꾼 현관 열쇠를 준다. 두 사람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내린 커피를 잭은 그녀 쪽으로 슬쩍 밀어준다. 뭐냐고, 이 불합리한 인생은...
애덤과 피오나가 정서적 교감을 나누는 대목에 예이츠의 시 "버드나무 정원을 지나"의 두 번째 연이 등장한다. 인터넷에 검색하면 나오는 번역보다, 이 책에서의 번역이 더 좋더라. 그래 봤자 단어 몇 개 다른 것뿐이지만, 시의 경우엔 유독 큰 차이로 다가온다.
강변의 들판에 내 사랑과 나는 서 있었지.
기울어진 내 어깨에 그녀가 눈처럼 흰 손을 얹었네.
강둑에 풀이 자라듯 인생을 편히 받아들이라고 그녀는 말했지.
하지만 나는 젊고 어리석었기에 이제야 눈물 흘리네.
흥미진진하게 홀딱 빠져들만한 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언 맥큐언이 아동 복지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 위해 이 책을 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작은 말 한마디, 사소한 몸짓 하나, 서투른 행동 등을 통해 사람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 관계... 그런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