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이름들의 낙원
허주은 지음, 유혜인 옮김 / 창비교육 / 202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평단 도서 제공)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은 주체가 해야할 선택이다. 고로 주어진 운명을 깨는 것 또한 주체가 할 수 있는 선택이다.

일생에 주어진 매 선택의 기로 앞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며 살고 있을까?

포도청 다모로 일하게 된 '설'은 운명에 당당히 맞선다.

조선시대라는, 여성이라는, 노비라는 제약을 뛰어넘고자 분투하는 인물이다.

책을 한 페이지씩 넘길 때마다 독자는 점점 설이 존재하는 조선으로, 한양으로, 포도청으로, 그 체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끝내는 '설'이라는 인물 그 자체가 되어 소설의 이곳저곳을 누빈다.

연쇄적인 살인으로 음산한 분위기가 풍기는 한양에서 죽음을 조사하고 사건의 진상에 한 발씩 다가가다 보면 결국 맞닥뜨리는 질문은 이것이다.

믿음과 확신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무엇을 믿고, 무엇을 확신할 것인가?




-




개인적인 믿음이 허락되지 않았던 시대에, 스스로 옳다고 확신하는 것을 저버리지 않은 자들이 있었다.

연쇄적인 살인의 피해자가 된 이들의 공통점은 '천주교'를 믿는 신자였다는 점이다.

주어진 운명을 벗어나는 것의 결과가 죽음으로 돌아왔던 이 시대에, '믿음'이 얼마나 숭고한 가치였을지 가늠할 수 있다.

살인사건을 조사하며 촘촘하게 들어오는 역사 배경과,

저만의 서사를 가진 입체적인 인물이 퍼즐처럼 들어맞으며 더 생동감있는 세계를 창조해낸다.

-

소설을 이끄는 많은 등장인물이 있다.

한 종사관, 견, 심 부장, 이 대장, 안 생원, 최 도령 ...

이들은 모두 남성이다. 남성의 권력과 지위를 휘두른다.

그러나 소설을 '진짜로' 이끌어가는 것은 이름 없는, 이름 지워진, 이름이 중요하지 않은 인물이다.

설, 소이, 혜연, 애정, 소이, 우림, 련 .....

이들은 여성이고, 노비이다. 권력과 지위 따위 없으며, 복종하고 충성을 바쳐야만 한다.

작가는 이 모든 이름 없을 존재들에게 하나하나 이름을 붙여 주었다.

이름을 '잃어버리기' 위해서는 원래부터 가지고 있어야 한다. 없었던 것은 잃어버릴 수가 없으므로. 고로 잃어버린 것은 되찾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잃어버린 이름을 가진 자들은 어떻게 될까? 이들이 찾아갈 '낙원'은 어디에 있을까?

진실에 다가갈수록 믿음은 흔들리고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게 된다.

사건은 자꾸만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데, 설은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갈 수 있을까.

'있어야 할 곳', '내가 있을 곳'을 찾아 분투하는 소녀의 이야기이자

동시에 "내 인생의 주인"이 되기 위한 사람들의 이야기.

결말을 향해 미친듯이 달려가다 보면, 우리 안의 '무언가'도 조금은 변화했음을 깨닫는다.

내가 생각하는 소설의 힘이란 이런 것이다.

독자를 '나' 밖으로 꺼내고 다른 세계로 데려가는 힘.

다른 경험을, 다른 인생을 이해하는 힘 말이다.



2025. 04. 0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