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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쿠데타와 나
장태완 지음, 이원복 엮음 / 이콘 / 2024년 1월
평점 :
영화 <서울의 봄>은 결말을 뻔히 알면서도 수직 상승하는 스트레스 수치가 느껴질 만큼 몰입감과 긴장감이 최고였던 영화였다.
영화 속 배우 정우성이 열연했던 이태신 수도경비사령관의 실제 모델인 故 장태완 장군의 회고록 <12.12 쿠데타와 나>가 절판되었다가 30년 만에 재출간되었다. 마침 출판사 문학동네에서 서평단을 모집하기에 신청을 했고 당첨되어 책을 읽어볼 수 있었다.
《12.12 쿠데타와 나》서평
장태완 장군의 증언을 토대로 한
영화 <서울의 봄>이 1979년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나기까지의 시차적 상황을
보여준 것이라면, 회고록<12.12 쿠데타와 나>는 12·12 군사반란 진압작전을 지휘하다가 실패한 장태완 장군의 군사반란의 진상 규명을 위한 증언, 군인으로서 자신의 삶, 군인정신, 그리고 가족들의 비극적인 삶을 써내려가고 있다.
"불충자 유구무언(不忠者 有口無言)의 속죄하는 마음으로 나는 지난 13년간의 세원을 침묵으로 일관해 왔다...... (중략)...... 12·12 군사반란을 진압해야 하는 정부 계엄군의 핵심적인 위치에서 진압 작전을 지휘하다가 실패하여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 된 장본인으로, 그 당시의 실증적인 증언을 국민 앞에 공개한다. 이것이 발생 원인과 진상을 규명하고 진압 실패의 원인과 교훈을 도출하는 데 일조가 되기를 바란다." p.5
영화 <서울의 봄>과 다른 12·12 쿠데타 결말
영화 <서울의 봄>의 마지막 장면은 12·12 쿠데타를 진압하지 못한 이태신(정우성) 사령관이 분노와 울분을 참지 못해 군사 반란의 주범인 전두환과 그의 일당들이 막아놓은 가시장벽을 맨몸으로 뛰어들어 대항하는 것이었다.
이 장면은 영화의 극적인 효과를 위한 상징적인 표현으로 생각된다. 실제로는 노재현 국방장관의 병력을 철수하고 상황을 끝내라는 명령에 따라 장태완 사령관은 비통한 심정으로 지시에 복종한다. 따라서 장태완은 1979년 12월 13일 오전 3시부로 일체의 전투 행위와 사격을 중지시키고 모든 부대를 원상으로 복귀 조치한다.
"12·12 군사반란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다. 거듭 말했듯 오래전부터 정권 찬탈을 목적으로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일부 정치군인들의 주도하에 치밀하게 계획된 쿠데타였다." p.214
장태완 수경사령관과 가족의 비극
영화 속 이태신(정우성) 사령관 역의 실존 인물인 장태완 수경경비사령관은 1931년생으로 1950년 6.25 동란이 터지자 19세의 학생 신분에서 전시 장교양성 기관이던 육군종합학교에서 단기교육을 받고 일명 '총알받이 소모 소위'라는 육군소위로 임관되어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를 수도 없이 겪는다.
그는 애국심이 뛰어나고 충직한 군인이기도 했지만 속 깊은 효자이기도 했다. 부모님이 전쟁터에 나간 아들로 인해 노심초사할 것을 염려해 일절 편지를 드리지 않고 연을 끊다시피 하는 군인 생활을 했다.
"여기서 휴전 직전까지 연일 치열한 전투를 치러야 했던 나는 언제 전사할지 몰라 일부러 자식에 대한 부모님의 정을 끊어놓기 위해 소대장으로 부임한 이후 일절 편지를 드리지 않았다. 내가 자주 편지를 드리면 이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고 계실 부모님 앞에, 어느날 갑자기 아들의 전사통지서가 가면 어쩐단 말인가. 아들을 잃은 부모님의 충격은 곱절이 될 것이다." p.279
그 후 1979년 11월 16일 10.26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으로 인한 비상계엄 체제 시에 수도경비사령관 겸 수도계엄 사무소장의 중책을 맡게 된다. 하지만, 부임 24일 만에 박정희 대통령의 비호 아래 세력을 키워가던 전두환과 그의 사조직 '하나회' 및 세력 일당들이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키고, 장태완 사령관은 사력을 다해 저지하려고 하지만 치밀하게 계획된 쿠데타를 막지 못한다.
결국 13일 새벽에 장태완은 자신이 아끼던 직속 부하에게 체포되어 보안사 서빙고로 압송되고, 두 달 동안의 감금생활에서 끈질긴 수사를 받지만 충직하고 청렴한 군인이었던 그에게서 받아낼 수 있었던 죄목은 없었다. 결국 수사관이 불러주는 대로 강제 예편서를 작성하고 6.25부터 시작되어 천직으로 알고 살아온 30년간의 군생활을 떠나야 했다.
그 후 보안사 요원들이 한 집에 상주하며 장태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가택연금 생활이 이어지던 중 부친상을 당하고 의문사로 외동아들을 잃는 가혹한 비극을 겪게 된다.
장군의 부친은 아들이 쿠데타 군에 체포, 감금된 사실을 알게 되자 "예부터 역모자들의 손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게 우리의 역사다. 내가 자식보다 먼저 떠나야 한다"라고 말하며 문을 걸어 잠근 채 식사를 거절하고 막걸리만 마시면서 세상과 접촉을 끊고 지내다 세상을 떠났다.
서울대 자연대학에 다니던 아들도 1982년 1월 집을 나선 지 약 한 달 만에 낙동강 산기슭에서 의문의 주검으로 발견된다. 그는 아들의 시신을 싣고 서울 집으로 올라오는 차 안에서 강추위에 얼어붙은 아들의 온몸을 뜨거운 눈물과 입으로 녹여준다.
"나는 얼어붙은 아들의 얼굴에다 내 얼굴을 비비대면서 흐르는 눈물로 씻겨 주었고, 입으로는 아들의 눈부터 빨아 녹였다..... 아들의 눈 안에서 사탕만 한 모난 얼음조각들이 내 입안으로 들어왔다." p.304
아들의 죽음 이후로 가족들의 삶은 송두리째 바뀌고 아들의 묘지에서 눈물로 잠드는 세월을 보내면서도 하나뿐인 딸을 생각하며 고통스러운 삶을 참고 살아간다. 작은 용역회사의 사장 자리를 맡기도 하고 신앙생활을 하고 6·25 당시 생사고락을 함께 한 전우들의 유해들을 찾아 국립묘지에 안장하고 위령제를 올려주는 등 아들을 잃은 슬픔을 잊기 위한 삶을 살아간다.
동생을 잃은 슬픔에 우울증에 시달리며 자살을 시도하려던 딸이 다행히 결혼을 하고 두 명의 손녀도 얻는 기쁨을 얻기도 한다. 심근경색으로 수술을 하기 위해 미국에 사는 사촌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끈끈한 인척들의 따뜻한 보살핌과 위로 속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남은 생을 살아갈 것을 다짐하며 이 책을 마무리한다.
장태완 장군의 마지막 삶과 끝나지 않은 가족의 비극
1993년 '12.12 쿠데타 진상조사위'에서는 공개 증인으로 직접 나섰다. 2000년에는 새천년민주당에 입당하여 정계에 입문하고 국회의원과 민주당 고문직을 맡기도 했다. 2004년 정계를 떠난 뒤 2008년 폐암으로 폐를 절제하는 대수술을 받았다. 2010년 79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쿠데타에 대한 이 책을 집필했다.
장태완 장군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가족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2012년 부인 이병호씨가 남편을 잃고 우울증을 앓다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어린 시절에 12.12 쿠데타가 있었다.
불운했던 시대에 역사적 사실을 체감하지 못한 채 평범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비루한 감사를 느끼는 평범한 인간임을 실감했다.
국권을 장악했던 전두환과 그의 세력들은 역사적 심판을 받았고 진상규명과 단죄도 이루어졌지만, 12.12 쿠데타로 인해 평생 충직하고 청렴했던 한 군인과 그의 가족은 잔인하고 비통한 비극을 겪어야만 했다. 12·12 군사반란과 같은 비극적인 사태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