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꽤 있었다. "너 HOT 중에 누가 제일 좋아?" 였고 내 대답은 항상 좋아하는 사람 없는데였다. 그러면 되돌아 오는 것은 "어떻게 다섯 명 중에 한 명도 안 좋아할 수가 있어?"라며 질색하는 말이었다. 그정도로 내가 어렸을 때 HOT는 대단했다. 가끔은 억지로라도 좋아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되돌아 오는 말이 조금 바뀌었다. "그럼 젝키 좋아해?" ... 나는 댄스가수를 좋아하는 일이 전생애를 통틀어 별로 없었다. 다행히 캔디 열풍이 한김 식고 자우림이 데뷔를 해줘서 좋아하는 가수가 처음으로 생겼다. 하지만 내 또래아이들이 썩 그렇게 좋아하는 대답은 아니었다. 케이팝 아이돌에 속하지도 않고.그럼에도 이 책은 내가 봐도 재밌다. 마치 근현대사 문화파트 케이팝 챕터 같달까. 근현대사는 내 기준에서 참 재미가 없는데 이 책에 나와 있는 케이팝 연대기는 재밌다. 아마 이 책에 적혀 있는 모든 시간을 내가 온전히 살아냈고 그 시간을 모두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 언급되는 케이팝 가수를 좋아한다면 더욱 즐겁게 읽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HOT 이전에도 댄스가수들은 있었지만 이들은 주먹구구식 활동으로 수명이 짧았고 이에 시스템을 갖춘 기획사가 나타났고 그 시작은 HOT였다. 이들을 1세대 아이돌이라 부르며 책에서는 동방신기가 1세대 아이돌의 마지막이라고 말한다.그렇다면 2세대 아이돌의 시작은 누구일까? 바로 빅뱅이다. 이때부터 가수는 소속사의 기획의도에 맞게 자신의 역할을 연주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목적한 대로 의도를 갖고 자신만의 색을 가수활동에 입히기 시작한다. 뮤지션의 탄생이다. 빅뱅은 이름처럼 대단했다. 그런데 지금은 모든 멤버가 반짝반짝하지는 않은 거 같다. 연예인들을 보며 가끔 드는 생각은 대중들의 사랑을 적잖게 받는다면 좋아했던 것에 대해 말도 안 되는 수치심을 느끼게 하지는 말아줬으면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건 일반인을 좋아해도 마찬가지 같다. 이런 사람을 좋아했다니, 내가 이렇게 안목이 없나. 내가 좋아했던 시간들은 뭔가 하며 현타가 올지도 모르겠다.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다.그리고 3세대 아이돌은 바로 방탄소년단이다. 사실 방탄소년단이 빌보드 차트에 오른다는 말이 들려왔을 때 싸이처럼 잠시 이슈만 되고 흐지부지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그들은 여전히 건재하다. 책에서는 그 이유를 커뮤니티에서 찾는다. 방탄소년단의 팬덤인 아미(ARMY)는 강력한 조직력과 열정을 갖고 있고 그것이 가능한 데에는 커뮤니티를 묶어줄 '사상'이 있어 가능했다는 것이다. 사상이라, 자칫하면 위험할 수도 있겠다만 강력한 결속력을 만든 것만은 틀림없다. 이 책 표지 색깔은 혹시 아미를 의식한 걸까3세대 이후도 있다. 바로 아이콘주의라는 것이 저자의 견해이다. 그리고 그 주역에는 에스파가 있다. 내가 좋아하는 에스파. 나 남자가수 포함해서 남자연예인 잘 안 좋아한다. 살면서 몇 번 안 좋아해본 거 같다. 에스파는 8인조를 표방하는데 이 중 4명은 가상의 존재이다. 그런데 연예인을 좋아하는 것도 연예인 아닌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도 어찌보면 보여지는, 보고싶은, 내가 만든 환상을 보는 것은 아닐지. 나는 윈터를 좋아하지만 실제의 김민정이 어떤 사람인지 내가 알 수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아이돌은 춤과 노래 무대매너를 넘어 뮤지션에 인성에 세계관에 사상까지 다 갖고 있어야 한다. 이쯤 되면 거의 초인이다. 아이돌 해먹기 힘든 거 같다그럼에도 아이돌의 역사는, 케이팝의 역사는 현재행형이다. 이 책을 읽고 누군가는 추억에 잠기기도 하고 누군가는 시대에 따른 기획의 변천과정에 초점을 맞추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아이돌에 관한 내용 말고도 기획자들의 내부사정이나 여러 에피소드를 보자니 흡사 연예계 뒷 이야기를 훔쳐 보는 거 같기도 하다. 예상 외로 재밌게 읽었던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