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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ㅣ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평점 :

시댁의 큰집은 워낙 대가족인지라 다 모이니 30여 명이 넘었다.
당시 우리 시부모님은 인자한 표정으로 "우리처럼 온 가족이 전부 모이는 화목한 집도 없을 거다"라고 했다.
나는 속으로 '딸은 아직 오지도 못했는데 왜 온 가족이 모였다고 하지'라고 생각했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시집 간 딸들은 모두 당신들의 시댁 부엌에서 차롓상을 만들고 있음을 아니까.
그리고 딸이 없는 자리는 나를 비롯한 며느리들이 메꾸었다.
부엌은 오롯이 여자들 차지였고, 남자들은 안방에서 서로 안부를 주고받으며 우리가 내오는 음식이 오기만 기다렸다.
열 명도 넘는 남자어른이 내가 밥을 멱어줄 때까지 입 벌리고 기다리는 모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지
내 상식으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생각 역시 속으로만 했다.
어른들은 첫 명절을 맞는 나를 배려하느라 안방에 편히 앉아 있으라 했다.
그러나 그 자리는 가시방석이었다.
안방에 있는 며느리는 나 하나뿐이었고, 형님들은 부엌과 안방을 수도 없이 들락날락했다.
나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형님들 사이에도 끼지 못하고, 그렇다고 방에 들어가 편히 앉아 있지도 못했다.
엉덩이를 떼었다 붙였다만 반복하다 결국 자진해서 부엌에 들어갔다.
눈치껏 밥을 푸다가, 반찬을 옮겨 담다가, 간식거리를 안방에 내놓다가, 할 일을 찾지 못하면 한쪽 벽에 서 있다가 했다.
상은 차롓상, 아버지들 상, 어머니들 상, 남편들 상, 자식들 상까지 다 내놓은 뒤
그들이 먹은 그릇을 정리해 부엌에 갖다놓고, 후식까지 챙긴 뒤,
거실에 있던 자식들 상을 정리한 다음에야 아침을 먹을 수 있었다.
그 다섯 번째 식탁 끝에서 그날 처음 본 다섯 형님과 함께 밥을 먹었다.
남편은 두 번째 식탁에서 이미 밥을 다 먹고 후식을 먹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얄밉고 싫었지만 이 또한 말할 수 없었다. 모든 며느리의 남편들이 안방에서 그렇고 있었으니까.
아무리 정갈하게 밥과 반찬을 담아도, 반찬은 꼭 남는다.
자녀들의 밥상도 그랬다. 며느리들은 그 밥상의 반찬이 아까웠다.
그래서 남은 반찬에 모자란 반찬만 몇 가지 추가해 자녀들이 남긴 반찬과 함께 밥을 먹었다.
'나 손님인 줄 알았는데 머슴인 건가'라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남편이 중간에 몰래 나를 데리고 나와 이층에서 쉬게 해주었고,
형님들이 내가 오기 전에 모든 일을 다 해놓아 내 일의 절대량이 한없이 작았고,
어머님이 우리 며느리 먹여야 한다며 밥상에 조기를 가져다가 식탁 앞에 놓아준 것 등은
나를 귀하게 대해준다고 고백했던 남편 말이 자꾸 떠오르고
'우리 엄마는 지금껏 이런 생활을 견딘 건가'라는 생각까지 이어져
머릿속이 복잡해질 즈음 설거지를 하다가 접시를 두어 개 깨트렸다
가장 암울한 건 어디에 화를 내야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는 것이다.
나만 빼고 큰댁의 모든 상황이 너무도 평화로워서 그야말로 큰 족쇄에 갇힌 느낌이었다.
딸이 결혼하면 엄마를 이해하게 된다는 게 이런 의미였나.
이 세상 모든 딸들은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명절을 넘기고, 이미 첫 명절을 지낸 경험이 있는 지인들에게 이 이야기를 했는데,
모두들 정도의 차이일 뿐 비슷한 명절을 보냈음을 알았다.
지금 내 안의 나를 위로하는 책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만 들었다.
이에 <82년생 김지영>을 손에 집었다.
주인공 김지영은 우리나라 30대 여성의 보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인물이다.
여기 나오는 모든 경험은 통계상 대한민국 여성이 가장 많이 겪은 내용을 토대로 하고 있다.
저자는 82년생에게 가장 많은 이름인 '김지영'을 주인공으로 상정하고,
여자들이 가장 많이 겪는 일상을 어릴 때부터 차례대로 살핀다.
그러므로 이 인물과 상황이 분명 허구임에도 나와 내 주변 여성들의 경험과 하나도 다르지 않아
어딘가에 책 속의 김지영 씨가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끔 한다.
누군가의 딸에서, 성적 대상으로, 육아독박자로, 마지막으로 맘충으로 계속 시선이 옮겨가는 그녀의 일생은
나의 인생 패턴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울 때마다 같이 울었고, 그녀가 억울할 때마다 함께 억울해졌다.
그리고 그녀처럼 살기 싫어 자꾸만 탈주하는 법을 고민하게 되었다.
내 욕망을 말하면 이기적인 여자가 되고, 아이를 위하는 삶을 말하면 맘충이 되는 이 아이러니에서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많지 않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기 전에는 그것이 최선의 선택인지 알 수 없으니, 내 선택이 두렵기도 하다.
그러나 나와 같은 경험과 삶, 모멸감을 물려줄 수밖에 없다면 거부밖에 답이 없다.
그리고 세상 모든 김지영에게 위로를 건네고 연대를 할 것이다.
세상 모든 김지영과 함께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모일수록 강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