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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통신 - 유쾌한 지식여행자가 본 러시아의 겉과 속 ㅣ 지식여행자 13
요네하라 마리 지음, 박연정 옮김 / 마음산책 / 2011년 5월
평점 :
품절

내가 기억하는 러시아는 2000년대 중반의 혼란한 상황이다. "되는 게 없는 나라, 안 되는 게 없는 나라"라는 표현이 러시아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장이었다. 내가 러시아에 있을 당시에는 사회주의의 과거와 자본주의의 현재가 공존하는 약간은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한쪽에서는 높다란
건물들이 마구 지어지고 다른 한쪽에서는 "생존을 위해 빵을 달라"며 시위를 했다.빈부의 격차가 점차 심해져 고급 승용차와 우리나라에서 수입해온
폐차 직전의 버스들이 동시에 돌아다녔다.
요네하라 마리의 책에서 묘사하는 러시아는 "되는 게 없는 나라, 안 되는 게 없는 나라"인 점은 똑같지만 조금은 더 인간적인 느낌이
강하다.
나로서는 2000년대 중반의 정황과 1990년대의 정황을 비교하는 재미가 있어 더 깊이 빠져들어 읽었던 것 같다. 요네하라 마리가 묘사하는
고르바 초프와 옐친의 모습은 우리가 생각하는 고고하고 범접할 수 없는 지도자와 동떨어진 모습을 보여준다. 외교관계를 생각하지 않고 마음대로
방한을 취소해버리는 행위라든지, "연하장을 누구는 보내고 누구는 보내지 않았다. 카드를 보내준 사람에게만 답장 카드를 보냈다"라고 말하는
옐친의 모습이라든지, "바람이 많이 불어 먼지가 눈에 들어가 힘들었습니다"라고 하는 일본 시장의 러시아 방문에 대한 무심한 소감을 듣고는
"그래요. 도쿄에는 먼지 같은 게 한 톨도 없으니까요"라며 진심으로 화를 내는 모습들은 "수수께끼 러시아"라는 표현과 딱 맞아떨어진다.
그들이 보여주는 수수께끼는 사실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표방한 러시아였음을 생각한다면 금세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천성적으로
자본주의처럼 뒤에선 칼을 갈고 있어도 앞에서는 상냥하게 웃는다든지, 돈이 되는 사람은 가까이 두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내치는 행위를 할 줄
모른다. 러시아는 '돈과 돈'으로 얽힌 관계가 아닌 '정서와 정서'로 얽힌 관계를 더 중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과 러시아 회사가 계약을
이야기할 때, 마리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 러시아 회사 대표를 가난한 일본의 집으로 초대하라고 했던 것은 이러한 그들의 인간중심주의를 그녀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책 속에는 '자본'이 우선시되고 '물건'을 한껏 고급스럽게 치장하는 오늘날 사회와 반대되는 모습도 엿볼 수 있다. 모든 물건이 "나를
사주세요"라고 강하게 외치는 자본주의 속 상품들과 다르게, 소련의 물건들은 무심할 정도로 대충 포장되어 있다. "네가 필요하면 나를 사라"라는
식의 시크함은 오늘날 과대광고에 눈이 피곤한 현대인들에게 그 어떤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우월감에 마음이 움직여 그 볼품없는 상자에 감동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은세공 그릇을 그런 골판지 상자에
넣어 판매하는 것을 지극히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가 존재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한없이 움직였던 것이다.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되고 평가되며,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모든 사람들이 혈안이 되는 사회. 물건을 팔기 위해 온갖 지혜와
정열을 바치는 행위가 당연시되며 이제는 그런 현상이 멈출 수 없는 자동운동 모드에 돌입한 것 같은 느낌. 결국 무르익은 자본주의가 낳은
소비문명에 지치기 시작한 우리에게는 그 무뚝뚝한 상자가 신선했던 것이다."
비록 실패했지만 "모든 사람이 평등한 나라"를 표방하던 사회주의는 그 어떤 이념보다 인간적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책을 읽으면서 오늘날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인간중심주의가 그리워졌다. 그녀의 러시아 통신이 반가우면서도 뒷맛이 씁쓸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