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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증발 - 사라진 일본인들을 찾아서
레나 모제 지음, 스테판 르멜 사진, 이주영 옮김 / 책세상 / 2017년 8월
평점 :
절판
속담은 궁지에 몰리면 쥐가 고양이를 문다고 말하나, 사실은 궁지에 몰린 쥐가 하는 짓이 더 있는데 고양이한테 물려 죽거나, 고양이 앞에서 쥐가 혀를 깨물고 자살하거나, 공간이동하여 궁지를 빠져나가는 것이다.
레나 모제의 논픽션 <인간 증발 – 사라진 일본인들을 찾아서> 은 궁지에 몰려 공간이동으로 궁지를 통과하고 투명인간이 되어 버린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은 갚지 못한 빚, 실적에 따른 압박감, 입시실패와 취업실패에 따른 절망, 신분에 따른 차별을 견디다 못해 현재에서 증발한다. 아무한테도 알리지 않고 야반도주하여 다른 지역에서 이름을 바꾸고 산다.
이윤, 질서, 규율, 의무, 성분화, 계급, 갑을관계(갑을관계라고 쓰지만 주인과 노예의 주종관계라고 읽어야 할) 를 강조하여 인간을 사물화시키는 사회는 사람을 궁지로 몰아 넣는다.
증발된 이들은 가족, 특히 부모한테 미안함과 그리움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소 판 돈 들고 상경한 정주영 회장처럼 성공해서 가족도 만나고 금의환향하기를 꿈꿀지 모르겠으나 태반은 가족 앞에 나서지 못하고 평생 죄책감을 안고 살아간다. 현 사회시스템에선 절망을 결코 떨쳐낼 수 없다.
친구 S는 방송작가인데 동료 작가나 PD 들 중 잠수 타는 경우가 꽤 있다고 했다.
전날까지 미팅에 참석하고 밥도 먹고 평소와 다름없었는데 갑자기 연락이 안 되는 거야.
헐. 왜? 무슨 일 있었나?
몰라. 전화도 안 받고 카톡, 문자 다 안되고...
엥.
할 수 없이 남은 사람끼리 그 사람 몫까지 해야 했지. 일이 배로 늘었으니까. 매일 밤 새다시피 하고 힘들었어.
아이고.
요즘 젊은 애들은 왜 그러지. 아무리 힘들어도 한 달 전에는, 못해도 최소한 보름 전에는 그만둔다고 얘기를 해야 하는 게 맞잖아.
그렇지. 경우 없는 짓이지.
그런데 한편으로는 오죽하면 걔가 그랬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 방송계, 연극판, 영화판 너무 열악하거든. 겉보기에는 화려해 보이지만 빛 좋은 개살구지.
음.
옛날에 말야. 잠수탔던 PD한테서 장문의 카톡이 온 적 있었어.
응.
걔가 잠수타고 6개월 뒤에 카톡이 왔지. 걔가 우울증이 있었대. 근데 방송국에서 갑질하고, 쪼고.
아. 얼마 전 EBS...독립 PD 사망 사건처럼?
응. 카톡 읽고 울었어. 걔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는 같이 일하면서 그걸 몰랐으니 내가 너무 미안하고....
하며, 친구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끝맺지 못한 말이 창밖으로 멀어졌다...
*그는 엄격한 교육, 어디서나 늘 최고가 되어야 하는 사회적 압박을 언급한다. 결혼에 대한 부모님의 압박과 직장 스트레스가 대표적이다. 맷은 불만을 토로하기 위해 일본의 속담을 인용한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맷은 오타쿠들이 이런 압박 때문에 가상의 세계에 빠지고 현실과는 다른 삶을 상상하며 ‘사라져 간다’ 고 힘주어 말한다. 어디론가 떠나는 것만이 도피는 아니다. 사랑과 자유를 꿈꾸기도 하고 소소한 것, 코스프레, 노래, 춤이나 손동작에 만족하기도 한다. 일본에서는 이미 많이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일본 사회는 다른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캐릭터를 통해 개성을 뽐내고 일상을 우상에게 바칩니다." 맷이 말한다. 어린 시절에 머물면서 환상 속에 사는 것, 개성 표현이 거의 허락되지 않는 일본 문화에 나름 반항하는 방법이다. p118-119
*그에 따르면, 자살과 증발 모두 사회적인 절망의 표현으로 그 원인은 똑같다. 실적, 자기반성, 자기희생을 강요받으면서도 끝없는 경제 위기로 인해 빈곤해지다 보니 일본 사람들이 불행하다는 것이다. 그는 힘을 휘둘러 사람들의 절박함을 이용하는 모리배나 악덕 사채업자. 일부 고용주들을 비난한다. 또한 그냥 운명이려니 수동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도 비판한다. "증발이라든지 사무라이 할복 같은 일본 악습 뒤로 숨어드는 일이 이제는 없어져야 합니다. 사람들이 증발을 택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문제가 있을 때 아무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 p199
*아리무라는 증발한 사람들을 이렇게 생각한다. 외롭지만 자유로운 사람들, 외로움 대신 완전한 자유를 얻은 사람들. p243
*실직과 수치심 때문에 아내와 아들을 두고 집을 나왔다. 가족과 딱 한번 다시 만났으나 이미 거리감이 생긴 후였다. 그는 인생이 칠판과 같다고 생각한다. 검은색 칠판에 색분필로 내용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꿈을 그리지만 너무나 빨리 지우개로 지워진다. 남아 있는 것은 결국 검은색과 흐릿하게 지워진 기억뿐이다.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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