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은 항상 나를 잔소리하게 만든다 - 여자들에게만 보이는 지긋지긋한 감정노동에 대하여
제마 하틀리 지음, 노지양 옮김 / 어크로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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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지치도록 반복되는 하루에 몸도 마음도 번아웃이었다. 해도해도 끝이 없고, 표시가 나지도 않는 집안일과 육아는 내 기운을 쪽쪽 뽑아가고 있었다.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나는 항상 조급했다. 아이를 늦지 않게 등원차에 태워야 했고, 하원하기 전에 빨래, 청소, 설거지를 마쳐야 했고, 아이가 돌아오면 간식과 저녁을 준비하면서도 틈틈이 아이들과 놀아줘야 했다. 그러면서도 시댁 가족의 단체카톡창에 적절한 답변을 해야 했고, 아이들의 준비물을 미리 주문해야 했고, 이사 후 석 달이 지나도록 자리잡지 못한 잡동사니를 정리할 곳을 마련해야 했다. 발을 동동거리며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머리 속은 해야 할 일로 가득 차 터질 것 같았다


남편은 며칠째 야근 중이었고 피곤에 절어 있었다. 남편은 수많은 집안일 중 분리수거와 고양이 화장실 청소 담당이지만, 현관 앞의 분리수거함은 넘쳐나고 있었고 고양이 화장실에서는 똥오줌 냄새가 진동했다. 고양이 화장실이야 베란다에 있으니 그렇다 치지만, 분리수거함은 무려 현관에 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분리수거함이 미어 터지다 못해 현관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데도 남편은 보지 못하는 듯 했다. 시간이 더 지나면 쓰레기를 밀치면서 집에 들어와야 할 판국이었다. 결국 견디다 못한 내가 버려야 했다. 8개월이 되어가는 막내를 들쳐업고 몇 번이나 집과 분리수거장을 왔다갔다 한 후에야 전부 버릴 수 있었다.   


분리수거함을 비우고 집에 들어와 막내를 내려놓고 산더미처럼 쌓인 다섯 식구 빨래를 갰다. 그리고 청소를 하려고 걸레를 들고 바닥에 쪼그려 앉았는데, 아기 식탁 밑에 남편이 벗어놓은 양말이 보였다. 나는 그만 눈물이 툭 터지고 말았다.


며칠 전에는 출장과 야근이 잦은 남편에게 도저히 못하겠어. 더 이상은 못하겠다고! 아이들 두고 집 나가고 싶으니까 당장 들어와, 제발 좀!!!” 하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겁에 질린 아이들의 얼굴을 외면했었다. 그 날도 남편은 열두시가 넘어서 집에 들어왔고 나는 집을 나갔다. 하지만 막내의 우는 소리가 계속 귓가에 맴돌았고 한 시간 정도를 겨우 버틴 뒤에 집에 들어왔다. 역시 막내는 숨이 넘어가라 울고 있었고 나는 아이에게 젖을 물렸다. 남편은 요즘 힘들지? 도와주지 못해 미안해.”라고 사과했고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나는 전날 설거지하지 못한 그릇들이 여전히 그대로 쌓여있는 것을 보았다. 식탁 위에 남편이 마시다가 남은 맥주캔과 과자 봉지가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는 것은 덤이었다.


일부러 나를 엿 먹이려고 그러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안다. 남편이 나의 수고를 고마워하고, 나를 도와주지못하는 것을 미안해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이 것들이 도와주는수준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육아와 살림은 공동의 책임이라는 것을, 아니 그것보다도 남편이 아무렇게나 벗어 던지는 양말 하나가 집에서의 나의 일을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지, 얼마나 힘빠지게 하는지 더 이상 어떻게 표현해야 한다는 것인가? 내가 하나 하나 부탁하고 확인해도 제대로- 내가 원하는 수준으로- 움직여주지 않고, 내가 더는 못 해먹겠다고 미쳐 날뛰어도 무엇이 문제인지, 어떻게 해야 이 사태가 해결되는지를 모르는 이 사람에게 내가 더 이상 어떻게 설명해줘야 한다는 것인가? 차라리 벽에게 말하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함께 있지만 혼자 있는 것보다 못했다. 부부이고, 부모이니 당연히 함께 당면과제들을 해결해야 한다는 믿음은 번번히 좌절되었고, 내가 먼저 말 꺼내기 전에 남편이 먼저 의견을 제시할 것이라는 생각은 뿌리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나는 미칠 듯이 힘들고 외로웠다. 육아와 살림이라는 늪에서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것이 전업주부가 견뎌야 하는 무게이고, ‘주 양육자인 엄마가 감당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이 것이 문화적/젠더적 관습에서 강화된 성역할때문이라고 말한다.


가정 안에서 누가 언제 어떤 일을 하는가에 큰 격차를 보이는 이유는 여성이 감정노동을 수행해야 한다는 성 역할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나는 내가 행하는 수많은 생각과 고민들이 감정노동이라는 사실에 충격받았다. ‘남편과의 원만한 관계를 위해, 아이들이 짜증내고 떼쓰지 않게 하기 위해, 엄마와 말싸움을 하지 않기 위해우리의 욕구보다 주변 사람들의 욕구를 우리 앞에 두고, 그렇게 우리는 고갈되어 가지만, 그것을 알아주는 사람은 없다. 그저 왜 나만 이렇게 힘들어?’, ‘왜 여자만 이런 짐을 져야 해?’라며 분통을 터뜨리고, 사회가 원하는 기대치에 한참 미치지 못하면서 힘들다 징징대는 것 같은 자신의 모습에 자괴감을 느낄 뿐이다. 나의 이런 생각과 감정들이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젠더적으로 근거 있는 분노이고 답답함이고 괴로움이라는 사실이 꽤나 씁쓸하면서도 내가 나약하거나 정신적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심했다.


전업맘 뿐만 아니다. 워킹맘 역시 집에서나 직장에서나 높은 강도의 감정노동을 한다. 집에서는 다정하고 따뜻한 엄마이자 아내이면서, 직장에서는 일에만 집중하는 커리어 우먼이기를 기대한다. 남들 뿐만 아니라 본인 스스로도 그런 무자비하고 불가능한 잣대를 들이댄다. 그리고는 좌절하고 괴로움과 죄책감에 몸서리친다. 내가 그랬다. 회의를 하거나 미팅을 할 때는 강단 있고 열정적이어야 했고, 간담회나 회식 때는 따스하고 편안하게 해주는 역할을 해야 했다. 평소보다 무뚝뚝하거나 목소리가 높아지면 감정적이라는 평가가 붙었고, 회식 때 잘 웃지 않으면 분위기 맞추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뒷담화가 들렸다. 남자들이라면 기대받지 않을 역할 아래서 듣지 않아도 될 말을 들으면서 살아남으려 애쓰면 애 키우면서 대단해’, ‘독한 구석이 있다니까라는 소리를 들었다.


여성들이 이 지독하고 지긋지긋한 감정노동의 고리 안에서 얼마나 외롭고도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사례는 이 책 한 권에 차고 넘친다. 힐러리 클린턴부터 저자의 친구까지 거의 모든 위치의 여성을 아우른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으면서도 절대적으로 공감가는 사례들이 빼곡하다. 감정노동으로 인한 피곤함과 괴로움, 불평등함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도 제시되어 있다. 그 중에 특히 공감되는 방법을 꼽자면, ‘스스로가 감정노동의 가치를 인정하기 시작할 것’,세상의 기대가 아닌 나의 우선순위대로 행동할 것이다. 가정에서, 일터에서 중요한 사람임을 스스로 높게 평가해주어야 한다. 사회적 기대와 나의 내면 사이에 선을 확실하게 긋고 내가 과소평가되거나 이용당하거나 소모되지 않도록 나의 가치와 우선순위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결국 스스로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 일테다.


나는 나의 아들이 누군가의 딸에게 사회적/관습적/젠더적 감정노동의 프레임을 씌워 상처주는 사람이길 원치 않는다. 나는 나의 딸이 그런 감정노동을 수행하면서 스스로에게 생채기 내고 자기 자신보다 남의 기대에 부흥하려 노력하는 삶을 살길 바라지 않는다. 그러니 이제 내가 변해야 할 때다. 물론 남편도 변해야 한다. 나는 남편에게 지금의 우리와 미래의 우리 자식들을 위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니, 다 읽고 진지한 얘기를 하자고 말했다. 삐걱거릴 테지만, 문제를 직시했고 원인을 알았으니 나아질 일만 남았다. 남편이 이번만큼은 이 책 읽고 얘기좀 하자니까!’라고 잔소리하게 만들지 말아주길. 제발, 제발 좀, ?


"자기 애를 자기가 보는데 내가 왜 고마워해야 해?" 나는 말했다. "그래도 고맙다고 전해줘."
그녀의 남편, 아니 나의 남편이라 할지라도 남자들끼리 이런 대화를 나눌 일이 있을까. 아빠가 저녁에 밖에 나와 있으면 아무도 아이는 어디 있냐고 묻지 않는다. 남편이 개인 시간을 보낼동안 내가 집에서 세 아이를 본다고 해서 어느 누구도 놀라면서 내 넓은 마음 씀씀이를 칭찬하지 않는다. 엄마가 주 양육자가 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남편에게는 크게 점수 딸 일이다. - P90

어떤 방식으로든 선을 그을 수밖에 없다. 무거워하다가 무너져버리기, 시간을 내서 우선순위를 정하기, 둘 중 하나다. - P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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