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어두운 세수를 할 때 문학과지성 시인선 452
김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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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소년이 있었다


새가 되어 날아갈 것 같아요

소년이 내게 말했다 고요히

나는 소년의 솜털 부숭한

귓불을 쓰다듬었다 이따금 

소년의 귀에선 내가 쓰다 버린

문자들이 흘러나왔다

나는 그 문장들을 기워

새를 만들었다 그보다는

내 가슴을 오려

새를 만들었으면 좋았을걸

어두운 벤치 위에 소년은

내 무릎을 베고 누웠다

가쁜 숨 몰아쉬며

눈동자를 흐리며 그만

눅눅한 공기 속으로 소년은

깃을 치며 날아갔다

나는 그저 돌아갈밖에

얇고 여린 소년의 껍질이

어깨 위에 가볍게 걸쳐진 채

자꾸 나부끼던 밤이었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하기

화자 객관화하기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 하기

시를 잘 쓰려면 이런 걸 해야한다고 한다


김근 시인의 시를 처음 읽었을 때

익숙했었는지를 잊어버릴 정도로 낯설었다

너무 낯설어서 익숙해질 때까지 들여다본다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낯설다

익숙해지지 않은 낯설음

어두워서 빛나고

낯설어 익숙하고

알수 없어 알게 되는

낯설기란 이런 것이라는 걸 알게 된다


휘청거리는 바람이 불 때

달콤한 슬픈 종족이 되어

둥둥 떠나디는 섬

호리병 같은 시간안에서

가슴을 오려 만든

온몸에 새겨진 말들의 무늬

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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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징가 계보학 창비시선 254
권혁웅 지음 / 창비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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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징가 계보학


1. 마징가Z


  기운 센 천하장사가 우리 옆집에 살았다 밤만 되면 갈

지자로 거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고철을 수집하는

사람이었지만 고철보다는 진로를 더 많이 모았다 아내가

밤마다 우리 집에 도망을 왔는데, 새벽이 되면 계란 프라

이를 만들어 돌아가곤 했다 그는 무쇠로 만든 사람, 지칠

줄 모르고 그릇과 프라이팬과 화장춤을 창문으로 던졌다

계란 한 판이 금세 없어졌다 


2. 그레이트 마징가


  어느날 천하장사가 흠씬 얻어맞았다 아내오 가재를 번

갈아 두둘겨 패는 소란을 참다못해 옆집 남자가 나섰던

것이다 오방떡을 만들어 파는 사내였는데, 오방떡 만드

는 무쇠 틀로 천하장사의 얼굴에 타원형 무늬를 여럿 새

겨넣었다고 한다 오방떡 기계로 계란빵도 만든다 그가

옆집의 계란 사용법을 유감스러워했음에 틀림이 없다


후략




슬프다 재미있다

무겁다 통쾌하다

씁쓸하다 달짝지근하다

어떤 말이나 어울린다 아니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데 아프다 

마음 속 깊이 새겨진 상처를 건드린다

다 나았는 줄 알았는데 아직도 아프다니

나는 이렇게 아픈 시를 왜 읽나


마징가를 즐겨보던 때

티비가 우리 꿈을 대신하고

가난이 모두에게 공평하던

살아가고 살아냈던 시간

목련이 피어난 밤

골목을 돌 때마다 울던

누군가가 나타나 구원해주기를

지구가 멸망하지 않기를

지구가 멸망하기를

바라던 때가 있었다


그렇게 바라던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었다는 걸

이 시를 보고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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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나 회사원, 그밖에 여러분 애지시선 49
유현아 지음 / 애지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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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기


날마다 똑같은 허기가 찾아와


난 땜질하러 돌아다녔지

연장은 필요치 않았지, 연장만 필요했지

단기 근로계약서에 서명만 하면 일사천리였어

15년 경력은 필요치 않았지,

완벽한 일처리도 원하지 않았어

난 땜질만 하면 되었어

6개월에 한 번씩, 3개월에 한 번씩

운 좋으면 10개월을 할 수도 있지

휴직한 그들의 인사고과는 구껍고 우수해졌어

점심시간이 되면

난 땜질을 잠시 쉬고 밥 먹으러 가지

하늘이 듬성듬성 땜질 되어 있고

저 구름도 땜장이처럼 위대해 보였어


늘 똑같은 허기가 찾아와


저길봐

반 토막 난 해가 도로 위를 달리고 있는 거 보이지



유현아 시인의 시에는 생활이 담겨져 있다.

우리 동네 횡단보도 앞 오묘한 질서에 대해

생고기집 풍경에 대해

중계동 사거리 신호등과

수줍은 사람들

명랑한 아버지와 거친 손을 가진 어머니가

아무나 회사원 그밖에 우리 이웃의 이야기가

시가 삶이 되고 삶이 시가 된다.


여름과 가을

아름다운 인연으로 만나

다시 시를 만나게 해준 고마운 나의 선생님

글을 쓰도록 마음 속 돌 하나 얹어 준 고마운 조언들

감사한 마음으로 시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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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 젤리 삶창시선 36
김은경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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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안녕


목욕탕에서 때를 밀다가 속옷을 갈아입다가

상처에 눈 머무는 순간이 있지

훔쳐봄을 의식하지 않은 맨몸일 때 가령 상처는

가시라기보다는 도드라진 꽃눈,

돋을세김한 순간의 미소래도 무방한데


어디에 박혔건 내력이야 한결같을 테지만

죽지 않았으니 상처도 남은 것 그리 믿으면

더 억울할 일이 없을까 


나는 상처를 받았고 또 몇 구러미의 상처를 보냈나

403호로 배달된 사과 상자를 대신 받은 기억 있고

쓰레기 더미 속 헌 옷을 기쁘게 주워 입기도 했네


하지만 얇은 유리 파편으로 만든 그 옷

내게는 꽉 끼었지 그래 나는 아팠었지

천진한 햇살마저 나는 조금 아팠겠지


지나갔으니 묻지 말아야 할까

왜 하필 내게 그걸 보냈는지

난 다 자랐으니까

폴리백처럼 가벼웠졌으니까


(하략)



김은경 시인의 시는 불량하다는 걸 알지만 계속 먹게되는 불량 젤리처럼 자꾸자꾸 읽게 된다.

강렬한 첫 단맛, 그리고 씁쓸한 뒷맛에 중독되어 간다.


얇은 유리 파편으로 만든 그 옷이 나를 아프게 했다는 걸

몇꾸러미의 상처를 주었는지 세어보지 않았다는 걸

상처가 꽃으로 보일 수 있다는 걸 나는 보지 못했다.

이런 걸 볼 수 있으니 시인이다.


외로워서 살이 찌는 이 밤에 

결핍이 밀어가는 오늘을 위해

구름을 시로 바꾸는 법을 배우며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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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28 01: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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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지성 시인선 294
김기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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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가죽 구두


비에 젖은 구두

뻑뻑하다 발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신으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구두는 더 힘껏 가죽을 움츠린다

구두가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린 적은 없었다

구두 주걱으로 구두의 아가리를 억지로 벌려

끝내 구두 안에 발을 집어넣고야 만다

발이 주둥이를 틀어막자

구두는 벌어진 구두 주걱 자국을 천천히 오므린다

제 안에 무엇이 들어왔는지도 모르고

소가죽은 축축하고 차가운 발을 힘주어 감싼다



얼마나 오래 들여다보아야 시를 쓸 수 있는걸까 생각한다

많이 보고 많이 쓰는 사람

많이 보고 적게 쓰는 사람

적게 보고 많이 쓰는 사람

적게 보고 적게 쓰는 사람

중 누가 시인이겠느냐 묻는다

많이 보고 적게 써야 진짜 시인이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끊임없이 몸을  물고 늘어지며 뒤척이는 마음이 있기 때문

지루하고 답답한 삶의 압력이 강제로 상상력을 분출시키기 떄문

에 시를 쓴다고 시인은 말한다


무엇 하나 가만히 들여다본 적 없기 때문

누군가에게 정열적으로 빠져본 적도 없기 때문

에 나는 시를 쓰지 못하는 줄 알았다

그저 나는 뒤척이는 마음

분출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

이라는 걸 시를 읽으며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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