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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5월
평점 :
피가 낭자하다. 피비린내 진동하는 책이다. 정유정의 책이 아니었다면 몇 페이지 읽고 덮어버렸을 것이다. 영 비위에 맞지 않는다. 그런데 이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피비린내 속에 뭔가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찾으려고 서두른다. 정유정 작가 인터뷰 중에서 이제까지 자신의 책 속에 등장했던 악인은 너무 약했다고 그래서 정말 악인을 그리고 싶다고 했다. 악은 어떻게 존재하고 점화하는가라는 카피가 이 책의 전부다.
유진은 피가 낭자한 자신의 방에서 깨어난다. 거실에는 어머니가 살해당한 채 이 웅덩이에 빠져있는 것을 발견한다. 누가 죽였을까? 유진은 모든 증거가 자신에게 향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려 애쓰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 어머니의 시체를 두고 상황을 예측하는 장면이 반복적으로 그려진다. 왜 어머니를 죽였는가? 소설은 현재와 과거를 오간다. 유진의 시선에 따라 상황은 다르게 재해석된다. 유진은 정말 악인으로 태어난 걸까? 아니면 악인으로 키워져왔는가? 유진이 기억이 진실인지 아니면, 각색된 것인지 조차 알 수 없다. 유진은 슬프고, 기쁜 감정에 대해 이해할 수 있으나 공감할 수 없다. 자신의 몸과 마음조차 제어할 수 없는 인간이 되어버린다. 유진이 그저 피해자이기를 바랬다. 두 여자의 실수로 유진이 악인이 되었기를 바랬다. 그래서 그를 동정할 수 있기를.....
성악설을 믿는 사람이다. 사람은 모두 원죄가 있다. 그 원죄는 신에 대한 배신이고, 다른 사람 탓을 하는 것이고, 질투로 첫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인간은 영원한 원죄의 족쇄에 묶여 있고 그것을 끊을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다. 그런데 내면의 깊은 곳에서 인간의 선함을 믿고 싶어진다. 처음 태어난 생명은 순수한 영혼을 가졌다고. 우리가 죄라고 명하는 모든 것은 어쩔 수 없이 저지르는 것이라고 말이다. 죄인으로 태어난 한 사람의 변명이라고 해도 좋다. 죄로 얼룩진 어떤 영혼이라도 다시 돌아갈 곳이 있기를 바란다.
해진이 얼마나 슬퍼하는지 충분히 느껴지는데, 그로 인해 귀가 다 먹먹한데, 가슴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해진의 울음에 어머니도 울고, '어른 보호자'를 만나러 온 간호사도 눈을 붉히는데, 나 홀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로 인해 해진에게 위로 한마디 건네지 못 했다. 105
나를 변호하는 변호사로 로스 운명이라는 검사에게 한마디쯤 묻고 싶은 마음이 든다. 너라면 골이 흔들리고, 귓속에서 마이크가 삑삑거리고, 몸이 병든 닭처럼 무기력해지는 고통을 16년씩 견뎌낸 포상으로, 면치란의 화창한 휴가 정도는 받고 싶지 않겠냐고. 그때마다 이런 식으로 인생을 초토화시킨다면 누군들 미치지 않겠느냐고. 나는 책상에 던져뒀던 약봉지를 들어 쓰레기 봉지에 처박아버렸다. 지금부터는 내 인생이 초토화된 진짜 이유를 찾아야 했다. 145
16년 전, 열 살짜리 사이코패스의 치료를 맡았고, 그간 간질 환자라 속여 정체불명의 약을 먹여왔고, 제 엄마를 앞세워 일거수일투족을 조종하면서 죽도록 하고 싶어 하는 일을 죽자고 막아놨더니, 어느 날 갑자기, 정말로 회까닥 돌아서 제 엄마를 죽이고, 이제 나까지 죽일 참이라고...... 2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