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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 1 ㅣ 사계절 1318 문고 104
이금이 지음 / 사계절 / 2016년 6월
평점 :
이금이 선생님 첫 역사장편이다. 1920년대부터 광복하기까지를 중점으로 두 소녀 인생이야기가 펼쳐진다.
윤형만은 일제강점기 일제와 영합하여 최고의 부와 권력을 누린다. 자신의 딸 채령의 생일 선물로 땅 서 마지기를 주고 동갑짜리 수남을 사온다. 수남은 원래 몸종으로 가기로 한 다른 여자아이 대신 자기가 가겠다고 나선 것이다. 수남은 잠시 배고픔을 면한 사실에 감사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처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수남은 채령과 달리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주인 도련님 강휘를 남몰래 사모하게 된다. 강휘는 일본 유학 중 행방불명이 되고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는 소문만 무성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채령은 부모님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일본유학을 선택하고 수남도 채령과 함께 일본으로 떠난다. 채령은 일본에서 만난 정규 때문에 시국사건에 휘말리고 감옥 대신 황군여자위문대 지원하게 된다. 뒷 이야기는 스포가 될까 더 이상 쓰지 않겠다.
이금이 선생님의 담담한 문체로 역사적 사실을 등장인물들의 삶에 적절하게 녹여냈다. 두 소녀의 대비되는 운명의 소용돌이가 잘 어우러져 정말 어디선가 살고 있던 두 할머니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이야기를 읽으며 수남이의 인생을 함께 달려온 듯 하다. 나도 모르게 수남의 행복을 빌게 된다. 사회에서 인정받는 멋진 여성이 되어 자신이 짊어진 끝없는 고난을 내려놓는 수남이의 성공스토리가 되기를 바랬다. 고난의 시대를 살아낸 모든 수남이를 위해서 말이다. 수남이가 고백한 인간의 이중성에 대해 나는 그저 모른 척 눈 감아주고 싶다.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
"너, 경성이 어딘지 알고나 가겠다고 나서는 거냐?"
"알아요, 고개 너머, 또 너머에 있잖아요." 63
아이들은 떼 지어 자경단원을 따라다녔다. 준페이는 부둣가에서 같은 학교에 다니던 아이의 시체를 보았다. 조센징이라고 따돌린 적이 더 많았지만 가끔은 어울려 놀기도 했다. 그 아이의 배에서 창자가 뭉글뭉글 쏟아지는 것을 보며 준페이는 헉구역질을 해 댔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모든 광경은 채색해서 갓 찍어 낸 우키요에처럼 너무나도 선명하게 준페이의 가슴에 찍혔다. 지진은 준페이의 삶은 물론 영혼까지 무너뜨렸다. 163
"이젠 몸을 베리비릿으니 고향으로 갈 수도 없고 우짭니꺼. 돈 벌고 기술 배워가 집안 일으키고, 동생들 공부시킬라 캤는데 이제 무슨 낯으로 간단 말입니꺼. 식구들을 우째 본단 말입니꺼. 먼저 온 여자들 중에는 성병 걸리가 독한 주사 맞다 반병신 되고, 왜놈 아를 밴 사람도 있다 캅니더. 우리도 그짝 나면 우짭니꺼? 우리한테 우째 이런 일이 일어난 긴지 언니가 말좀 해보이소. 언니는 공부 아이 한 사람 아닙니꺼." 2권 33
돌이켜 보면 수남은 태어나면서부터 차별받으며 살아왔다. 딸이라서, 가난해서, 신분이 낮아서, 못 배워서, 조선 사람이라서.....그동안 수남은 그게 부당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여자가 남자에게, 가난한 사람이 부자에게, 신분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한테, 무식한 사람이 많이 배운 사람한테, 조선사람이 일본 사람드에게 무시당하고 차별받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2권 158
결국은 망할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윤씨 가문은 곧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예전의 영화를 되찾을 것 같았다. 2권 250
같은 핏줄인 윤강휘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또 자작이라는 칭호가 오명이 되는 세상이 오지 않았다면 나는 영원히 자작의 딸로 살고 싶어 했을 것이오. 윤채령에게 호락호락 그 자리를 내주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아들을 위해서라고 핑계 댔지만 실은 가슴 깊은 곳에 숨겨진 또 하나의 진실이 윤채령의 왜곡을 입다물게 했던 것이오. 이 부끄러운 고백까지 해야 내 이야기는 끝나는 것입니다. 2권 2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