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의 곰
메리언 엥겔 지음, 최재원 옮김 / 한겨레출판 / 2024년 1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랑에 빠진 인간은 이런 질문을 상대에게, 혹은 내면의 자신에게 던지곤 한다. 만약 내가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면,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그래도 날 사랑했을까? 그에게 이런 점이 없었다면 그래도 내가 그를 사랑했을까? 질문들은 표면적으로는 개인의 외향이나 취향, 혹은 어떤 조건에 대한 고민이지만 이 질문들은 한편으로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
그가 나의 어떤 모습을(그게 외형이든 아니면 나의 이력이든 취향이든) 좋아한다면 그것이 배제된 나는 나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면 그의 사랑을 '받고'있는 그 부분을 나의 본질로 봐야할 것인가? 내가 그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나는 내 고집스러운 자아를 버리고 그가 원하는 어떤 모습을 수행할 수 있을까? 그 때의 나는 진짜 나인가?
주인공 루는 이런 고민을 내재화시킨 외로운 여성이다. 그녀는 토론토의 역사 협회에 소속된 사서로, 어떤 대령의 후손이 남긴 고택의 서재를 조사하라는 임무를 받고 토론토를 떠나 연고도 없는 온타리오 북부의 캐리 섬에 온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는 안내를 담당하는 이웃집 남자 호머로부터 이 섬에는 대령이 남긴 곰이 한 마리 있으며, 자신은 이제부터 그 곰과 함께 생활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곰은커녕 다른 동물에도 큰 관심이나 애정이 없었던 그녀는 이 예기치 못한 동거에 당황스러움과 호기심을 느낀다. 그런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곰은 예상과는 달리 마치 늘어진 덩어리 같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곰에게 먹이를 주고, 그렇게 그들은 동거를 시작하게 된다.
느리지만 꾸준히 서재를 탐독하는 업무를 지속해나가며 루와 곰의 거리는 가까워지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루 자신이 느끼는 거리다. 곰은 그저 자신이 굴고 싶은 대로 굴고 있을 뿐이며, 루는 곰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그러던 중, 루는 자신이 곰을 사랑하고 있음을 불현듯 깨닫는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욕망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사랑하고 또 욕망하는가. 자신의 마음을 긍정하게 된 루의 모습은 충격적이지만 한편으로는 몹시 자유롭다. 루는 곰에게 어떤 모습을 요구하지 않으며, 곰 역시 루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루는 곰에게 '내 머리를 뜯어내달라'고 대담하게 외치지만 곰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 한다. 그 외침은 곧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루 자신이 스스로에게 확인시켜주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는 곰과 함께 동화처럼 행복한 삶을 꾸리지 않는다. 곰과 함께 잠깐씩 즐거운 시간을, 고요하고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기는 하지만 그것은 단지 흘러가는 시간의 일부에 불과하다. 찰나의 시간이 지나간 끝에 그녀는 결국 자신이 곰과는 함께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물리적 상처를 동반한 그녀의 거절이 그간 보냈던 시간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인가 하면 그것은 아니다. 곰에게 사랑을 느꼈던 그 순간을 그저 그 형태 그대로 이름 붙이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 '인간'의 이유나 다른 핑계, 적당한 의미를 가져다 붙이지 않고 그 모호한 형태 그대로 남겨두는 것. 그것이 루가 사랑을 이해하고 또 삶을 회복하는 방식이다. 그런 루가 역사를 파헤치고 해독하는 일을 업으로 삼은 여성이라는 점 역시 생각해볼 만한 지점이다.
관능적이고 도발적인 문제작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있긴 하지만 각오를 하고 읽은 덕분인지 그렇게까지 충격적이진 않았다. 오히려 곰과 사랑하는 여성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받아들인 채로 읽으니 그들의 사랑이 어떤 형태인지, 왜 이렇게 흘러가게 되었는지에 집중하며 읽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내가 좋아하는 앨리스 먼로와 마거릿 애트우드에게 영향을 준 여성 작가라는 말에 호기심이 생겨 신청한 서평인데, 읽으면서 사고의 저변이 확장되는 느낌을 받았다. 이 책을 시작으로 더 많은 책이 국내에 소개되었으면 하는 맘이다.
(출판사로부터 서평용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