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마지막 여름
지안프랑코 칼리가리치 지음, 김현주 옮김 / 잔(도서출판)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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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하고 눈부신 도시의 일면에는 언제나 그림자가 있다. 레오는 말하자면 그 공허한 그림자를 누구보다도 예민하고 섬세하게 느끼는 사람이다. 북적이고 활기찬 향락의 도시 로마에서의 생활을 한껏 만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근본적으로 그림자 같은 관찰자이다.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보다는 한 발 뒤로 물러나 숨소리도 죽인 채 다른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는. 그런 그의 앞에 그녀-아리아나가 나타난다. 그녀를 두고 레오는 이렇게 묘사한다. 배 위에서 폭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철새 같다고. 몽환적이고, 이질적이고, 막연히 긴장한 듯 보였다고.

레오는 아리아나에게 자신이 그저 잠깐 눈물을 훔치기 위해 필요했던 손수건에 지나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지만 어찌되었든 둘은 (레오의 차를 가지러 가기 위해) 함께 로마의 밤거리를 나선다. 그들은 둘이서 함께 밤새 시간을 보내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많은 일이 일어난다. 독자는 평이한 문장들 속에서 그들이 서로에게 강한 끌림을 느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소설에 불꽃이 튀는 정열적인 사랑 이야기는 없다. 아리아나와 레오는 우연처럼 가끔 만나고, 자주 엇갈린다. 레오는 아리아나가 희곡 작가와 만난다는 사실을 질투하고, 자신이 한낱 타이피스트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한다. 레오는 자신이 아리아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고, 아리아나도 그것을 알지만 그들은 결코 서로에게 사랑의 언어를 속삭이지 않는다. 오히려 레오는 이렇게까지 말한다.

다른 사람의 여자가 된 지금, 바로 지금처럼 그녀가 정말 내 여자인 것처럼 느껴진 적이 없었다. 참 운도 없다. 나의 불운은 그녀가 다른 사람의 여자일 때만 내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도 남은 음식처럼 누군가의 잔재일 때만 내 여자가 되는 것이었다. - 240p

친구 그라지아노가 죽고나서야 레오는 비로소 자신이 이 도시, 화려하지만 사치스럽고, 걸치고 있는 옷으로 사람을 취급하는 이 경박한 도시에 염증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다시금 재회한 아리아나는 마치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사치스럽게 돈을 허비하며, 레오와 함께 영원히 선택할 수 없는 어떤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는 그런 걸 감당하지 못한다고 담담하게 사실을 이야기하는 레오의 모습을 보고있자면 오래된 영화 <졸업>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르기도 한다.

50년 전에 쓰여진 소설인데도 마치 어제 막 태어난 것처럼 생동감이 느껴졌다. 마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동시에 여전히 살아숨쉬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무수히 많은 현재와 과거가 교차하고 있을 도시 로마 그 자체인 것만 같다. 스펙타클한 사건사고도, 뜨거운 정열도 없지만 오직 날카로운 통찰력과 아름다운 문장만으로 이야기를 밀고나가는 힘이 돋보이는 소설이다. 마지막장을 덮은 후에도 레오의 마지막 표류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출판사로부터 서평용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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