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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의 심장 가까이 ㅣ 암실문고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지음, 민승남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11월
평점 :
쉽게 읽히고 편히 보는 것을 선호하는 세상에서 문장과 언어 고유의 가치를 탐닉하는 즐거움을 느끼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이런 작품들을 만날 때면 더 반가운 것 같다. ”이 작품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라는 말로 시작하는 편집자님의 레터를 받았을 때, 오히려 더 위안이 되고 용기를 얻었달까? 겁을 주는 말이 아니라 애초에 내용을 이해하려는 노력 없이 그저 종이 위에 인쇄된 말들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는 친절한 가이드로 들렸고, 그래서 자기 전 침대에 누워 그냥 마음 편히 후루룩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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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47 그녀는 자신이 살아 있음을 알았고, 그 모든 순간들이 어떤 고난, 혹은 고통스러운 경험의 정점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 순간들에 감사해야 했다: 마치 자신의 바깥으로 벗어난 것처럼, 초연한 태도로 시간를 느낄 수 있었으니까.
✍🏼 p.51 모래 알갱이들 밑에서 돋아난 가녀린 검은색 풀은 부드러운 흰색 지표면 위에서 혹독하게 뒤틀려 있었다.
이 책은 문장으로만 느낄 수 있는 생경함을 가득 담고 있다. 처음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읽을 때도 그런 느낌을 받았고,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을 볼 때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지 않는 단어들을 새롭게 조합하고 붙였을 때에만 느낄 수 있는 신선한 충격. 그저 그런 재미를 충분히 느끼면서 책장을 넘기다보면 금세 마지막까지 도달할 수 있고, 어쩌면 “야생의 심장 가까이“라는 제목이 어떤 의미인지 어렴풋하게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정말 날것의 생각과 감정, 내면 가까이에 다가갔다 온 기분이랄까.
거기서 거기인 것 같은 작품, 다 비슷해 보이는 영상에 둘러쌓여 콘텐츠 매너리즘에 빠지려 할 때쯤 내게 신선한 충격으로 나타난 이 작품이 그래서 반가웠다. 이런게 바로 책을 사랑하고 문학을 향유하는 즐거움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을유서포터즈2기 #을유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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