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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고양이 (그리고) 나의 이야기
다지리 히사코 지음, 한정윤 옮김 / 니라이카나이 / 2025년 7월
평점 :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행 에세이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의 마지막 장은 일본 규슈 중부에 위치한 구마모토 편이다. 하루키는 도시의 인상을 전하며 ‘도쿄에서 온 나는 같은 도시인데도 가는 곳마다 나무들이 우거진 광경에 감탄하고 말았다’고 썼다. 낭독회를 하러 방문한 다이다이 서점에 관한 이야기도 이어지는데, 내가 여행자로 두 차례 방문한 적 있는 구마모토를 생각하면 얼른 떠오르는 게 바로 ‘나무’와 ‘서점’이다.
공원을 끼고 있는 구마모토 성이 도시의 중심부에 우뚝 서 있고, 유명한 일본식 정원보다도 더욱 매력적인 수변공원이 옹기종기 집들을 지난 자리에 펼쳐진다. 관광 상품으로 개발되지 않아 더 멋스러운 녹나무 군락지가 미술관 뒤편에 숨은 듯 자리하고 있다. 이 도시의 나무들은 유독 크고 울창하고 잎이 몽글몽글해서 종종 생각한다. 나무 보러 가고 싶다, 하고. 그리고 서점, 구마모토에는 괜찮은 서점이 많다. 추천해주고 싶은 서점은 4곳인데 그중 가장 작은 서점이 바로 다이다이 서점이다. 즉 구마모토에 갔는데 서점을 한 군데만 가야 한다면 바로 여기다. 왜냐하면, ‘이렇게 작고, 이렇게 좁기 때문이다. 책과 사람, 그것밖에 없으니까.’(p184)
‘나라이카나이’에서 <다이다이 서점에서>에 이어 두 번째로 출간하는 서점주 다지리 히사코의 에세이 <책과 고양이 (그리고) 나의 이야기>는 생각보다 크지만 생각보다 조용한 도시 구마모토의 어느 골목에 위치한 서점에서 겪은 일과 만난 사람과 읽은 책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정겨운 책이다. 등장하는 인물과 에피소드가 구체적이고 생생해서 심야식당 같은 드라마 못지않다. 태도는 담담하지만 시선은 따뜻한 점주의 캐릭터도 매력적이다. 심야식당이 그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맛있는 음식으로 위로를 전하고 슬프거나 기쁜 이야기꽃을 피우는 장소라면 다이다이 서점은 책과 함께 그 역할을 한다. 하지만 더 조용히, 서점 안 각자의 자리에서, 책을 읽거나 작업을 하거나 졸기도 하면서.
지난주, 좋아하는 동네 카페가 폐업한 것을 안 터라 더욱 와닿는 문장들이 있었다. ‘가게라는 건, 어느 날 갑자기 없어질 수 있다. 하고 있는 쪽에서는 갑작스러운 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p134) 이 책에서 저자는 어려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주변에 있었으나 사라진 가게를 꾸준히 언급한다. 지금은 없는 그곳들. 가게가 사라지는 데에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저자가 때때로 떠올린다는 말처럼, ‘지진이 일어난 뒤에는 거리가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전통 있는 가게가 드물지 않은 일본이라도 가게를 오래 유지하는 일이 쉬울리는 없을 것이다. 보고 싶은 영화들을 상영해 주는 100년이 넘는 영화관이 근처에 있는 건 행운이라는 저자의 담담한 말에도 풍파를 이겨낸 세월이 깃들어 있다.
가게를 오간 손님들의 이야기는 자연히 다양한 주제로 연결되지만 어느 것 하나 가볍지 않다. 결국 가게를 한다는 건 시간을 견디는 일, 사람을 만나는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점주가 끊임없이 기억의 셔터를 올리고, 손님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일(p18 문장 활용). 내가 언젠가 다이다이 서점의 손님이었다는 게, 서점의 문을 열고 들어가고 그 문을 닫고 나온 적이 있다는 게 삶의 한 순간으로 기억에 다시 새겨졌다.
-(…) 다들 일상으로 돌아왔다고 느낀 건, 하지 않아도 생활에는 지장이 없는 일을 할 수 있었을 때였다고 말했다. 늘 다니던 가게에 간다. 책을 읽는다. 영화를 본다. 술을 마신다. 인스턴트가 아닌 정성 들여 내린 커피를 마신다. 하지 않아도 된다고 여겼던 일이 사람을 살게 한다. 손님들도 저마다 그런 것을 말했다. (p35~36)
-(…) 얼마 전, 멀리서 온 듯한 손님이 문을 열고 나서려던 순간, 몸을 돌려 안을 둘러보았다. 책에 미련이 남은 듯 뒤돌아보더니, 미련을 떨치듯 문을 열고 나갔다. (p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