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묵 - 침묵과 빈자리에서 만난 배움의 기록
고병권 지음 / 돌베개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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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책은 이렇게 나뉜다.

하나. 정보, 성찰, 문장이 필요하여 읽는 책

둘. 저자의 정보, 성찰, 문장이 궁금하여 읽는 책

셋. 새로운 정보, 성찰, 문장이 담겨있지 않아도 읽는 책


세번째 책을 읽는 이유는 새롭지 않은 정보, 성찰, 문장을 다시 곱씹기 위해서다.

곱씹어야 하는 정보와 곱씹어 성찰해야 하는 화두와 곱씹어 내것으로 만들고 싶은 문장이 있다.

"묵묵"을 계속 읽어나간 이유가 그것이었다. 


한때 나는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소수자들에게 인문학은 언어를 있다고, 그래서 그들이 정치적 존재가 되는 일조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듣지 못함' 상대방의  '말하지 못함'으로 교묘히 바꾸어 놓았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무능을 상대방의 무능으로 바꿔치기 것이다. 그러나 테일러가 힘주어 강조했듯이, 세상에 말할 없는 존재란 없으며 단지 듣지 못하는 존재, 듣지 않는 존재가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정치적 존재로서 우리가 던져야 질문을 '그들은 말할 있는가' 아니라 '우리는 들을 있는가'이다. 111-112


서발턴연구집단이 던진 질문, "그들은 말할 수 있는가"를 눈여겨보면 "그들을 말할 수 없게 하는 것"에 시선이 닿는다. "그들을 말할 수 없게 하는 것"을 곱씹다보면 그들은 늘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이 늘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말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떠올릴 수 있다. 그들이 침묵했다면 그들의 존재 자체를 알 수 없다. 나의 질문은 이것이었다. 우리가 말을 할 수 있어도 상대가 그 말을 이해할 수 있는가. 소통이란 과연 가능한가라는 질문. 그들이 나를/우리를 듣는다해도 이해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과연 듣는 행위라 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 그 질문에 대해 그렇지 않다는 잠정적 대답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그 질문과 그 대답을 다시 곱씹는다.

 

내가 아는 현실은 이처럼 통계의 현실이고 정보의 현실이며 논리의 현실이다. 이런 부당한 현실을 비난하면서도 나는 부들부들하지 않았는가. 내게 부당성은 통계적이고 지적이고 논리적인 부당성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평균적 남성이나 예외적인 남성이 저지르는 폭력이었다. 평균적 남성은 나를 포함하지만 피가 흐르지 않는 추상적 인간이고 예외적 남성은 피는 흐르지만 나와 관계가 없는 외계의 인간이었다. 그러니 나는 통증 없이 현실을 비난할 있었고 이런 현실에서 문제없이 지낼 있었다. 125

 

나는 부당한 현실에 부들거리지 않는 사람을 향해 부들거리지는 않는다. 그들에게는 부들거릴 틈이 없다. 그들은 부당한 현실의 일부이며 그 현실을 이용해 이득을 취하면서도 그 이득을 어떻게 얻었는지 모르는 무지하거나 이기적인 부류이므로 차갑고 나즈막한 말로 그 사실을 알려주면 되는 일이다. 내가 부들부들 하는 것은 바로 정확히 저런 "추상적 인간"을 향해서다. 추상성을 이용하여 부당한 현실로부터 발을 빼어 지적인 우월성을 확보하는 부류들. 이 부류들을 향해서는 여전히 어떤 부들거림에 사로잡혀 있다. 그 부들거림을 어디로 가져가야 할 지 다시 곱씹는다.


나도 알고, 저자도 알고 있다는 것을 아는 정보, 성찰, 문장을 곱씹게 만드는 것은 

그저 알고 있는 정보, 추상적으로 이르는 성찰, 지어내는 문장에 추를 달기 때문이다.

스스로 추를 발목에 달지 못하는 나로 하여금 그 추의 무게를 짐작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 추는 정말 "묵직"하다.

"소리나지 않는 텅 빈" 묵묵이라는 말처럼.  


이 책을 통해 나에게 그 추를 달아준 것은 장애인 투쟁이다.

그에 대한 단락 하나를 여기에 옮겨적지 않는 것은

그것이 정보나 성찰이나 문장으로 옮겨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너무나 묵직해서 그저 묵묵하다.

묵묵을 읽어나간 이유는 곱씹는 맛이 있어서였지만

끝까지 읽은 이유는 그 묵묵함을 어쩔 도리가 없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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