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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왕국 프로이센
크리스토퍼 클라크 지음, 박병화 옮김 / 마티 / 2020년 7월
평점 :
힘든 출판 시장에서 이런 책을 벽돌로 번역해준 것 자체가 고맙고, 학술적 성과라 여겨 별점 5점을 준다.
그럼에도, 가끔 읽다가 알고 있던 역사와 너무나도 상반되는 내용이 튀어나올 때가 있다. 너무 이상해서 원서 찾아보면, 여지 없이 오역이다. 그것도 역사 이해를 심각하게 방해하는 류의 오역이다.
(1)
예를 들어, 선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와는 달리 경건주의자들을 멀리하는 프리드리히 대왕에 관해 서술하는 다음 대목의 번역을 보자.
(번역서 203쪽 마지막 문단 중)
"프리드리히 대왕은 체질적으로, 선왕의 보호를 받은 그리고 베를린이 프로테스탄트 계몽주의의 유명한 중심지가 된 이후 끊임없이 교회 행정직에 계몽주의 후보를 심으려는 "개신교 예수회파"에 대한 반감이 있었다."
이 서술만 보면, 계몽주의와 경건주의자들이 한 편이고, 프리드리히 대왕이 이들에 대해서 반감을 가진 것으로 기술된다. 계몽주의 군주라 스스로를 칭했던 프리드리히 대왕의 평소 행실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이상하다. 그래서 원문을 찾아보았다.
Frederick the Great was personally
antipathetic to the ‘Protestant Jesuits’ who had enjoyed his father’s
protection, and consistently favoured enlightened candidates for posts in
church administration, with the consequence that Berlin became a renowned
centre of the Protestant enlightenment. (원문 136쪽)
일일히 번역하기 귀찮아서 ChatGPT로 돌려보고, 조금 손을 본 번역은 다음과 같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의 아버지의 보호를 받았던 '개신교의 예수회'(=경건주의)에 개인적으로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교회 행정직에 계몽주의자 후보자들을 지속적으로 선호했다. 그 결과
베를린은 개신교 계몽주의의 유명한 중심지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제 내용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이 된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경건주의에 대한 반감(antipahty)를 가지고 있었고, 그 결과 교회 행정직에 계몽주의자들을 선호했다. 프로이센의 수도인 베를린은 [선왕대의 경건주의자들이 아니라] 개신교 계몽주의자들의 중심지가 되었다.
(2) 사소하지만, 다음 대목도 있다.
7장의 각주 124번이다. (역서 952쪽)
역자는 이 각주에서 크리스티안 볼프에 대한 프리드리히 2세(프리드리히 대제)가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했다고 번역하고 있다.
"...볼프는 1721년 할레 대학교에서 경건주의자들과의 논쟁이 일어난 뒤 프로이센에서 추방되었다. 최초의 조치는 프리드리히 2세가 취했고, 이후 즉위 후 볼프를 다시 불러들였다."
번역문의 "최초의 조치를 프리드리히 2세가 취했"다는 표현은, 계몽주의에 우호적이었고 경건주의에 냉담했던 프리드리히 2세(프리드리히 대제)가 마치 독일 계몽주의 철학의 아버지인 볼프를 추방했다는 의미로 읽힌다.
원문을 보자.
"... Wolff had been banished from Prussia after a quarrel with the Pietists at the University of Halle in 1721. One of the first things Frederick II did after his accession was to recall him."
원문 어디에도 번역문에 쓰인 표현은 없다. 단지, 프리드리히 2세가 왕좌에 오르자 마자 추방된 볼프를 다시 프로이센 땅으로 불러왔다는 내용만 있다. 오역으로 보인다.
실제 역사에서도 볼프를 추방한 것은 프리드리히 2세가 아닌, 그의 아버지인 군인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이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집권기에 할레 대학의 경건주의자들은 볼프가 스피노자류 결정주의 철학을 퍼트려, 병사들의 전투 의지를 꺾고 있다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에게 밀고한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이 소식을 듣고 분개하여, 볼프에게 48시간 내로 프로이센 땅을 떠나지 않으면 교수형에 처할 것이라고 공표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볼프는 할레 대학에서, 더 나아가서 프로이센에서 추방된다. 이 볼프 추방 사건은 적어도 18세기 전반, 독일 지성계 안에서는 가장 큰 스캔들 중 하나였다. 볼프는 이 사건으로 오히려 국제적인 유명세를 얻게 된다. 프리드리히 2세는 당연히 볼프의 처신에 대해서는 아버지(프리드리히 1세)와 의견을 달리했고, 그가 왕에 오르자마자, 볼프의 추방을 철회한다.
원문 각주에 대한 이러한 오역은 프리드리히 2세의 성격에 대한 오해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볼프의 계몽주의, 그것도 통치이론을 감명깊게 수용했다고 본문에 서술하고 있는데, 그런 철학자가 경건주의자들과 논쟁을 벌였다고 추방하다니!
이거 말고도 내용이 이상한 곳이 군데 군데 있는데, 그냥 찾기 귀찮아서 넘겼다. 역사학 전공도 아니고... 힘든 한국 출판 풍토에 이렇게 번역판을 내준 것만해도 고맙긴 하다.
서사 자체가 재미있어서, 낮에 일을 하면서 읽어도 하루에 200~300쪽씩 나갈 수 있었다.
다만, 여러 어려운 사정들이 있겠지만, 오역을 손 본 개정판이 나오면 좋을 듯 하다.
이 책 자체가 독일, 무엇보다 프로이센의 역사에 접근하는데 좋은 통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