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용품 패키지 디자이너로 커리어를 시작한 저자가, 논리의 세계에 있는 마케터와 어떤 갈등을 겪고, 또 어떤 눈으로 디자인을 구현해나가는지 알 수 있다가, 이제 새로운 것에 도전하기 위해 브랜드 마케터로 변신하는 과정 또한 흥미진진했다.
패키지 디자이너로서 소비자의 상식을 거스르지 않고 상품의 본질을 보고 표현하는 것이 또한 포인트라는 생각도 인상깊다. 예술이 아니기 때문에 세제를 치약으로 착각하게 해선 안 된다든가 하는 예시가 나오니 바로 와닿았다. 단순히 패키지를 예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브랜드 정체성'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또 회사의 목표(이윤창출)가 무엇인지 이해하면서 브랜드를 일관적으로 담아내고, 예산 절감으로 비용을 '잘' 들인 패키지를 만들어가면서 더 장기적인 가치를 창출하는 방법을 알아가는 저자의 성장 과정을 간접적으로 보았다.
이미 겪어내신 일이지만, 글을 읽으면서도 브랜드 마케터가 된 디자이너의 도전을 응원하지 않을 수가 없다. 동료분들은 이미 디자이너 경력이 꽤 된 분께 함부로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었을 것 같고, 서로 맞춰가는 과정이 쉽지도 않았을 듯하다. 시장 조사를 나가서 입점률과 매대 진열률을 살펴봐야하는 것이 마케터의 일인데, 아직 머리로는 패키지 디자인을 본다던 저자의 말에도 경우는 다르지만 새삼 공감되었다.
누구에게나 처음인 시간은 적응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게 새삼 위로가 되었다. 나는 4년 반 동안 한 종합단행본 출판사에서 홍보일을 했기 때문에 sns에서나 서점에서나 베스트셀러, 신간, 이걸 어떤 카피로 포장했는지, 혹은 소개하는지, 표지는 어떤 느낌을 냈는지, 누굴 타겟팅했는지, 누가 sns에서 협찬이나 콜라보를 통해 리뷰를 남기고 인스타툰을 제작했는지 등등이 삽시간에 머리속으로 들어오는 게 버릇이 되어서, 새로운 일을 하게 된 지금, 아직도 그 머리가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로 새로운 일을 하고 있는 나는 콘텐츠 마케터라는 말에 맞게 잘 진화되고 있나? 적응하고 있나? 좋은 퍼포먼스가 여기에서는 무엇인지 알아가고 있나? 물을 수 있었다.
브랜드 마케터란 핵심적으로 파는 물건/재화/서비스를 소비자에게 잘 팔고, 또 그걸 유지하는 사람이라고 봐도 될까? 내가 관심있었던 브랜드 마케터가 그런 거라면 더 관심이 간다. 브랜드 마케터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노저어 갈 때 소비자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또 회사 내부 의견을 줄타기하며 회사를 굴러가게 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사실 잘 몰랐는데 영업과 마케팅의 차이를 알게 됐다. 영업은 유통망에서 움직이는 사람, 마케터는 분석하고 예산을 집행하는 사람. 이게 무자르듯 역할이 나뉘지 않은 회사인 경우와 경쟁을 통해 광고주를 따와야 하는 에이전시의 구조만 봐서 새삼스레 신기했다. 영업에 필요한 스킬과 마케팅에 필요한 스킬이 마치 작가와 편집자의 역할이 다르듯 다르고, 또 깊이 들어가면 그 하나의 일 안에서 얼마나 많은 노하우가 쌓일 수 있을 것인가, 막연하게나마 상상해본다. 콘텐츠 제작을 넘어서 내가 배운 홍보 담당자의 역량과, 커뮤니케이션 스킬 또한 그럴 것이고, 지금 세일즈/기획/집행/매니징 등의 다양한 성격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도 무언가 쌓여가고 있을 것이다.
여러모로 현장 강의를 듣듯 생생한 사진과 이야기가 한 선배를 만난 것 처럼 다가와서 좋았다. 강의도 좋지만 이렇게 책으로도 실무 이야기를 생생히 접할 수 있다는 건 장점이다. 디자이너가 마케터가 된다는 건 나뿐 아니라 다른 누군가도 경험을 토대로 나름대로 상상할 수 있는 지점이 있지만, 직접 살아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니 그 긴장감과 열정이 전달되는 것 같다. 그래서 오랜만에 긴 리뷰가 완성되었다.
딴 얘기지만 이 책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 우여곡절도 궁금하고, 다른 마케팅과 경영 관련 도서로도 내 호기심을 차곡차곡 채워가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