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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스크랩 - 1980년대를 추억하며 ㅣ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5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14년 2월
평점 :
"미리 말해두고 싶은데, 내가 스크랩한 글은 대부분이 어찌 되든 아무 상관없는 사소한 화제뿐입니다. 다 읽고 나면 시야가 넓어진다거나 인간성이 좋아진다거나 하는 그런 유가 아니라, 그러니까 이삿짐을 싸다 벽장에서 나온 오래된 졸업앨범을 무심코 넘겨보는...그런 기분으로 읽어주세요."
무라카미 하루키가 남긴 80년대의 글이라는 사실 자체만으로 무언가 큰 기대를 했던 사람이라면 실망할지도 모르는 말이다. 졸업앨범을 무심코 넘겨보는 기분으로 읽어달라니...오랜만에 졸업앨범을 뒤척거리며 대충 넘겨보는 사람은 없다.(하지만 이 의미가 책을 덮는 그 순간에는 다르게 다가왔다) 개인적으로도 「해변의 카프카」,「상실의 시대」이후로 하루키의 작품을 읽어보지 않았으므로 어느 정도 기대를 했던 것이 사실이다. 두 소설에서 느껴지는 심각하고도 예민한 그리고 또 세상의 일반적인 관계를 파괴시키는 듯한 인상은「더 스크랩」에서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그저 평범한 한 개인. 작가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하루키라는 사람이 묻어날 뿐이다.
책에 실려있는 약 80편의 글은 1982년부터 <스포츠 그래픽 넘버>에 하루키가 연재한 글이다. <스포츠 그래픽 넘버>가 어떤 매체인지 모르겠으나 아마도 잡지가 아니었을까 예상해 본다. 그러니까 이 잡지사(예상컨대)는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미국잡지며 신문을 마구 보내준 후(여전히 유명한 GQ, 에스콰이어, 뉴욕타임스 등)재미있는 이야기를 골라 한 편의 새로운 글을 써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이 연재는 1986년 2월까지 이어졌는데, 거의 4년이라는 시간동안 잡지와 신문을 읽고 또 다른 잡지에 글을 연재한 것이다. 지금과 같이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잡지들이 하나, 둘, 사라지고 있는 현실에서 어쩐지 아련하기도 하고 신선하게도 다가온다.
하루키 본인도 오랫동안 글을 쓸 수 있었던 이유는 <스포츠 그래픽 넘버>에 연재한 글을 쓰는 과정이 굉장히 재밌었다고 밝히고 있다. 지금과 같이 인터넷을 이용해 자유롭게 또는 신속하게 최신 정보를 접할 수 없던 시대다보니 잡지와 신문을 통해 미국사회의 뒷이야기들을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참 재미있었겠지 싶다. (지금같은 시대에는 이런 방식의 글 연재가 편집자에게 또는 작가에게 얼마나 매력있게 다가올지 알 수가 없다)
젊은 작가 하루키와 같은 시대를 보낸 독자라면 아마도 보물을 발견한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을지도 모르겠다. 특히나 문화에, 미국사회의 이슈에 관심이 있던 사람이라면 더욱! 문제는 내가 젊은 작가 하루키와 같은 세대가 아니라는데 있었다......가십처럼 짚고 넘어가는 유명인들의 사생활 이야기들, 그 시대에 잠시 유행했던 드라마 등의 이야기에 깊은 공감을 할수는 없었다.
'아 정말 가볍게 읽어야 할 책이구나'라는 생각으로 부담없이 책장을 넘기면서 한 편으로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어쩐지 인간적인 모습의 하루키라는 작가를 재발견하게 된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올림픽에도 큰 관심이 없고, 미역을 좋아하고, 어떤 사건의 뒷이야기를 매우 좋아하는 한 명의 소박한 인간을 발견했다. 이렇게 소소한 느낌을 전달하는 작가가 어떻게 그런 작품들을 쓸 수 있었는지 미스테리로 남는다. 뭐, 이 책을 통해 작가를 모두 알 수 없는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한 결 친근한 느낌이 생긴 것은 부인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