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쉬어보고자 탐구한 끝에 휴식이 무언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내게 휴식은 비어 있는 시간 속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비어 있는 시간 속에 존재한다는 건, 시간 속에 나만 들어가 있는 걸 말한다. 시간 안으로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못한다. 사회적 시선, 압박, 재미없고 고리타분한 말들. 지치지 않고 찾아오는 불안, 걱정, 두려움도
너넨 나이 들어서 더 외로워질 거 걱정돼? 친구들도 나처럼 미래의 일은 미래에 두기로 했을 것 같아서. 과거의 일은 과거에 두기로 하는 것처럼.
잔다는 건 결핍과 욕망의 스위치를 잠깐 끄고 생명력을 충전하는 것. 잡념을 지우고 새로운 저장장치를 장착하는 것. 쓰라린 일을 겪고 진창에 빠져 비틀거려도 아주 망해버리지 않은 건 잘 수 있어서다. 잠이 고통을 흡수해준 덕분에 아침이면 ‘사는 게 별건가’ 하면서 그 위험하다는 이불 밖으로 나올 용기가 솟았다. 잠은 신이 인간을 가엾게 여겨서 준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이야기를 탐하는 사람은 상처를 재배열하고 싶은 욕망이 있는 자다. 당신의 피를 내 쪽에 묻혀 희석하려는 욕망. 만약 내게 저들이 앉은 테이블에 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먼저 내 인생의 찢어진 페이지 몇 장에 대해 들려줄 것이다. 그러고는 사람들을 지켜볼 테다. 사람들이 이야기에 상처받는 순간을. 기억과 기억이 만나 상처를 조율해나가는 동안 얼굴에 드리워지는 무늬들을 보고 싶다.
옥상 위를 걸었다. 이쪽에서 저쪽까지 여덟 걸음이면 완성되는 산책. 누군가 함께한 적도 있었지만 혼자일 때가 많았다. 작은 발이 작은 발의 임무를 다하는 시간 동안 별을 보았다.옥상에서 보면 골목이 흐르는 것처럼 보였다. 고작 이 층 높이였는데도 훤히 보였다. 비스듬히 쌓아놓은 연탄 더미들, 쓰레기를 담아 내놓은 봉지, 깨진 화분, 취한 남자의 휑한 머리통까지 다 보였다. 옥상에서 초연함을 배웠다. 가까이에서 멀어지는 연습을 했다. 널어놓은 빨래에 기대는 연습. 눈이 네 개가 되는 연습. 잠자리처럼 보는 연습. 슬픔을 층층으로 재조립하는 연습. 그런 걸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