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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을 알면 달라지는 것들 - 자녀 성교육부터 데이트까지, 어물쩍 넘어가지 않으려면
김경아 지음 / IVP / 2020년 11월
평점 :
『성을 알면 달라지는 것들』, 김경아, IVP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이었다. 2차 성징이 시작되면서 목젖이 툭 튀어나오고 목소리가 바뀌더니 몸 곳곳에 털이 자라기 시작했다. 몸만 바뀐 것이 아니다. 정서와 욕구에도 큰 변화가 일었다. 당연히 성에 대한 호기심도 커졌다. 시도 때도 없이 솟구치는 성적 욕망은 집중력과 몰입을 방해할 정도였다. 학교에서 수업을 듣다가도, 책을 보다가도, 자다가도, 자고 일어난 뒤에도 시간과 공간을 가리지 않고 성적 욕망은 불쑥 찾아왔다.
부모님께 고민을 털어놓기는 어려웠다. 당시 친구들은 대부분 크든 작든 성에 대한 고민이 있었지만, 부모님과 그런 이야기를 솔직하게 나누는 경우는 드물었다. 교회에서 종종 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교회를 통해 내 욕망을 규정하고 해석하기는 쉽지 않았다. 눈으로 지은 죄, 생각으로 지은 죄 등 주로 음란한 죄들을 회개해야 한다는 메시지와 청소년기의 연애를 통해 발생하는 부정적인 예화들은 설교의 단골 소재였다. 그 시절 내가 교회에서 배운 성교육을 한 문장으로 정리해본다면 ‘욕정이 잉태한즉 스킨십을 낳고, 스킨십이 장성한즉 애를 낳느니라’가 아닐까.
교회의 가르침을 흡수할수록 죄책감과 정죄 의식은 날로 깊어만 갔다. 거룩은 성적 영역에만 해당하는 이야기인 것 같았다. 어느 날은 음란한 생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내가 괴물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이성과의 관계도 불편하고 부자연스러웠다. 대학에 들어와 선교 단체를 하면서 성에 대해 더 진지하게 배울 기회가 있었다. 인간은 누구나 성적 존재이며, 성적 욕망 자체는 선한 것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조금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음란, 간음, 순결, 거룩이란 단어는 여전히 설교 시간과 기도회의 키워드였고, 20대가 되어서도 음란을 회개하는 자학적인 기도 수준을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나는 욕망하는 금욕주의자가 되었다.
졸업 후 선교 단체 간사가 되었다. 학생들에게 강의할 기회가 많았고, 당연히 청년들의 관심사인 연애와 성은 빼놓을 수 없는 주제였다. 하지만 강의를 준비할 때마다 부족함과 어려움을 겪었다. 간사 사역하면서 종종 누가 성을 주제로 좋은 책을 하나 써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성을 알면 달라지는 것들』은 막내를 입양하고 난 후 입양이 누군가에게는 가족이 되는 행복한 과정이나 누군가에게는 자기를 낳은 아이를 떠나보내는 슬픔이 동반된 것이라는 저자의 사려 깊은 성찰의 결과물로 나온 책이다. 좋은 출발이다.
성은 나와의 관계, 다른 사람과의 관계이니 성교육은 당연히 관계 교육이다. 자기 이해와 자존감을 통해 주체적이고 책임 있는 선택을 할 수 있으며, 타인과의 소통을 통한 신뢰와 배려로 상호 존중하는 대등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상식적이고 합리적으로 들렸다.
지피지기 백전불태. 나를 알고 성을 알라는 이야기는 저자가 일관되게 강조한 주제 같았다. 책의 부제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성기와 호르몬, 성별 등의 객관적 이해로부터 성관계와 결혼이라는 주관적 영역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사용된 자료는 전문적이고, 사례는 구체적이다.
성에 대해 물어볼 수 있는 한 명의 어른이 되고 싶다던 저자의 바람대로 답보다는 질문을 던지며 스스로 고민하게 만들려는 노력이 곳곳에서 엿보인다. 예를 들어 ‘혼전 성관계는 죄인가? 스킨십은 어디까지 허용되나? 결혼은 꼭 해야 하나? 과거를 꼭 말해야 하나’ 등의 역사와 전통이(?) 있는 질문들에 대해 ‘정말 결혼을 기준으로 성관계의 죄 여부가 결정될까? 결혼만 하면 성관계에 대한 모든 의문이 풀리고 해답이 주어질까? 결혼이 성관계의 기준이라면 결혼을 결혼답게 만드는 핵심 요소는 무엇인가? 결혼을 하고 싶은 이유, 하기 싫은 이유는 무엇인가? 어떤 상태를 순결이라 말할 수 있는가? 과거를 말함으로써 이루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고,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 이유와 동기는 무엇인가?’ 등의 더 많은 질문을 되물어 오는 식이다. 역시 고단수다.
책이 다루는 주제는 폭넓고, 염두에 둔 독자층도 다양하다. 성 담론을 두 사람의 연애 안에 제한하지 않고 이야기를 확장해 간다. 존재하는 성 소수자들에 대한 시각, 젠더 감수성, 성차별로 발생하는 혐오와 차별, 폭력 문제 등의 시의적절한 주제들을 꼼꼼하고 친절하게 다룬다. 나아가 자녀 양육과 관련한 내용들까지. 싱글과 연애 중인 커플, 결혼한 부부와 자녀를 둔 부모들까지 읽고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혹여나 주제가 넓고, 대상이 너무 다양해 깊이와 밀도가 떨어지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면 일단 읽어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다른 분야도 그렇겠지만 어디 성이라는 주제가 전체적인 조망 없이 단편적으로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인가.
나는 40대 중년 남성, 목회자, 아버지의 세 가지 시선으로 책을 살폈다. 부끄럽지만 그동안 성교육은 10대와 20대의 전유물이라 생각했다. 성에 있어서는 달려갈 길을 마친 사람인 것처럼 착각한 것이다. 배움을 멈춘 나와 같은 중년 남성들이 저지르는 실수와 문제가 얼마나 많은지 깨닫게 되었다. 성을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라면 성에 대해 가장 잘 배울 수 있는 곳이 교회이어야 하지 않을까. 교회와 목회자들의 성폭력 예방 교육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다. 청소년기 부모님께 성에 대한 고민을 나눌 수 없었던 나는 자녀가 성 고민을 물어올 수 있는 아버지인지, 금기와 금욕이 싫었던 내가 자녀에게 금기와 금욕을 대물림하고 있지 않은지, 왜 자녀에게는 정의와 공평의 원칙을 적용하지 못하는지 부끄러움이 밀려온다.
솔직하고 호방한 스타일의 저자가 성을 주제로 책을 낸다고 했을 때 과감하고 속 시원하게 이야기를 풀어낼 것이라 기대했다. 내 생각과 달리 신중하고 절제된 방식으로 주제를 풀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성 담론은 예민하고 첨예한 이슈이다. 또 한국 교회의 토양에서 성에 대한 건강한 소통과 토론은 아직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런 면에서 쓸 수 있는 환경이 뒷받침되지 않은 것이 주요한 이유이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부담스러운 주제를 공부하고 책까지 출간해 준 저자의 수고와 헌신에 감사를 표한다. 성에 대해 세대와 성별을 초월해 교회 안에서 함께 읽고 고민해 볼 수 있는 책이 많지 않다. 그래서 당분간 이 책은 한국 교회에 의미 있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