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릿마리 여기 있다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브릿마리의 첫인상은 깍쟁이 할머니였다. 핑크 배경에 언뜻 호기심이 많아 보이지만 어딘가 부족해(?) 보이는 할머니가 한 분 계셨다. 정말 재미있게 봤던 "오베라는 남자"의 작가 프레드릭 배크만의 신작이라서 진짜 궁금했다. 책을 보기 전부터 이 귀여운 할머니가 어떤 분일지 정말 궁금했다.


  브릿마리는 남을 평가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절대 아니다. 하지만 교양인이라면 커트러리 서랍을 커트러리 서랍에 맞지 않는 이상한 순서로 정리하는 건 상상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동물이 아니지 않은가. ㅡ11


  그런데 솔직히 책의 초반에 보인 그녀는 첫인상을 넘어서는 할머니였다. 청소와 삶에 살짝의 강박마저 보이는 이 할머니는 세상에 마치 첫발을 디딘 사람처럼 보였다.


  브릿마리는 그녀의 주소지와 정체를 확실히 밝히라고 요구하는 종이를 빤히 바라본다. 요즘은 지나치게 많은 서류를 작성해야 인간으로 살 수 있다. 어처구니없이 많은 행정절차를 밟아야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다.ㅡ15

  브릿마리는 그 단어를 자주 쓴다. "하" '하하'의 '하'가 아니라 아주 실망한 투로 '아하'라고 할 때의 '하'다. 욕실 바닥에 내동댕이쳐져 있는 젖은 수건이 보일 때 내뱉는 '아하'말이다. "하." 브릿마리는 이 말을 할 때마다 곧장 입을 굳게 다문다. 그 문제에 대해서 더 이상 할 말이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렇게 끝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ㅡ21

  하지만 젊은 남자는 이미 다음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녀는 별로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사람인 것처럼. ㅡ33

 

그녀에 대한 첫인상이 변했던 것은 그녀의 속마음이 하나둘 들리면서 였던 것 같다. 까칠하고, 강박관념에, 리스트에 집착하는 할머니가 고독사의 두려움에 빠진 '그냥' 할머니라는 것을 알자 측은함이 들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순간순간 많은 사건들을 통해 툭툭 흘러 나온다. 처음엔 세상 모르고 철없는데 상태까지 안 좋아보였던 할머니가 점점 좋아지는 나 자신을 보면서 이 책의 마무리가 어떻게 끝날까하는 기대로 책을 못놨다.

개인적으로 이 책의 가장 감동스러운 장면이 브릿마리가 공을 차는 이 부분인 것 같다. 뭔가로 비어서 핸드백을 세게 쥐거나 서랍정리에 집착하거나 청소에 집착했던 여기서부터 깨지기 시작한 것 같다. '이제는 공을 차지 않을 도리가 없다.'라니... 그녀의 자존감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내가 이 책에서 두 번째로 좋아하는 부분이 바로 아래에 나온다. 축구를 싫어하던 그녀가 축구를 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여기 있다고 말하는 브릿마리를 보면서 나도 내가 여기 있다고 외칠 뻔 했다.

 

 

이 책에는 많은 요소들이 나오지만, 난 이 책의 주제와 제목은 자존감이라고 생각한다. 제목에서부터 느껴지는 '여기 있다'는 그 말의 가장 큰 의미는 자존감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 소설에서 나온 가장 어려운 단어는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가 아닐까 싶다. 생리적욕구에서 안전의 욕구, 소속의 욕구, 존중의 욕구, 그리고 가장 위에 있는 자아실현의 욕구. 이 책은 이 욕구 5단계의 순서로 이어지는 내용인 것 같다. 

  브릿마리는 자존감이 매우 떨어지는 사람 같았다. 어려서는 죽은 언니와 매일 비교를 당했고, 커서는 남친이 바람둥이었고,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를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본처가 있는 남자였고, 심지어 그 본처의 아이까지 키웠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다 커서 이제 연락도, 만나러 오지도 않는다. 남편이란 사람은 사업가인데 브릿마리에게 사회성이 떨어진다며 집안에 있기를 원한다. 결국 브릿마리는 예순 나이먹도록 사회 생활이라고는 해보지 못한 채 청소와 삶에 약간의 강박이 있는 이제는 시들일만 남은 할머니가 되어버렸다.

  나는 처음에 브릿마리를 이해할 수 없었고, 뱅크를 이해할 수 없었고, 새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역시 사연이 없는 무덤이 없다는 걸 보면서 느꼈다. 나는 책을 덮으면서 뱅크를 이해했고, 새미를 이해했고, 스벤을 이해했고, 그리고 브릿마리를 이해했다. 그녀의 어린 시절부터 살아온 나날을 보면서 아, 이래서 그녀가 그런 말을 했구나. 아 그래서 이런 행동을 했구나. 아 그래서 이런 사람이 되었구나 이해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책을 보고 아직 못 본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라는 책이 정말 궁금해졌다. 맨 마지막에 옮긴이의 말에서 할.미.전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있었는데, 거기서 브릿마리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궁금해졌다. 그 책을 보고 이 책을 봤다면 브릿마리에 대한 느낌이 또 달라졌을까 싶다.

  아이도 없고, 남편도 없고, 직업도 없는... 그래서 죽어도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그 말이 너무나 슬프게 들렸다. 솔직히 우리나라에서도 고독사에 대한 말이 많아서 다른 나라 이야기 같지 않았다. 거기에 경찰과 사회복지사 등이 우리나라와 겹쳤다.

 

  어느 나이쯤 되면 인간의 자문은 하나로 귀결된다.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ㅡ381

  "이렇게 쓰레기 천지인데 내가 여기서 일하는 이유가 뭔지 아세요, 브릿마리씨?" "뭔데요?" "우리 어머니가 평생 사회복지 쪽에서 일을 하셨거든요. 그 쓰레기들 한복판에서, 그게 가장 두툼히 쌓인 곳에서 눈부신 이야기가 탄생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모든 게 보람을 갖게 된다고요." 그녀는 미소와 함께 그다음 문장을 전한다. "브릿마리 씨가 저의 눈부신 이야기에요."ㅡ404

 

 이 글을 읽으면서 흔히 꼰대라고 불리는 분들이나 이해할 수 없었던 머리가 꽉 막힌 말도 안 된다고 느꼈던 사람들에 대한 생각이 조금은 달라진 것 같다. 사연이 없는 사람이 없고,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드라마가 없는 사람이 없다는 진리를 이 책을 보면서 다시 느꼈다. 역시 다음 책이 정말 기대되는 작가다. 새 책이 나올 때까지 못 본 할.미.전을 보면서 또 다른 사연들을 들여다보며 내 인생은 어떻게 흘러가야 할지 주위를 둘러봐야 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