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플레
애슬리 페커 지음, 박산호 옮김 / 박하 / 2016년 5월
평점 :
절판


'수플레'는 달달한 디저트의 이름이다. 전에 '냉장고를 부탁해'라는 프로그램에 나온 것을 보고 해 먹어봐야겠다는 생각보다는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꽤나 고급 디저트였다.

 책의 표지엔 수플레가 그려져 있는데, 초보자들은 컵 위로 뽕뽕하게 만든 케이크 질감이 푹 꺼지곤 해서 예쁜 모양으로 만들기가 힘든, 즉 가정집에서 완성하기 어려운 디저트라고 한다. 이 책의 부제는 주저앉아버린 영혼을 다시 일으켜주는 인생 레시피이다. 작가는 수플레만들기 실패를 인생에 적용하고 있었다.

 이 책에는 세 명의 주인공이 있다.

 

 

뉴욕에 사는 릴라이는 위에 설명처럼 외면당한 여자다. 떠들석한 것을 싫어하고, 극도로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남편과 입양한 아이들은 자신들에게 들어간 돈은 생각도 못하고 양부모 부부가 돈을 챙겨먹었다고 생각한다.

현관문을 열고 구급대원들을 이 층으로 올려 보내고서 그녀는 젖은 눈으로 이웃집들을 둘러봤다. 집 밖으로 나온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심지어 커튼을 살짝 열어 보는 집조차 없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대신 릴리아는 동네 사람들이 다 일하러 나갔거나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 주러 갔을 거라고 믿기로 했다. 그녀는 어떻게 한때 격정적이었던 삶에서 떨어져 나와 이렇게 조용한 생활에 익숙해지게 됐을까? 그래도 여전히 화는 낼 수 없었다. 이웃사람들에게도, 남편에게도, 자신의 무관심에도. 젊었을 때는 결코 그치지 않을 것 같았던 분노가 언제 이렇게 사그라졌을까? ㅡ12


아이들은 집에 들어오는 횟수는 급격히 줄었고, 통화를 할 때면 대개 돈이 얼마나 필요한지에 대한 이야기만 하다 끝나버렸다. 인터넷이 그들의 삶에 들어왔을 때 전화는 이메일로 바뀌었다. 이런 식으로 릴리아의 삶에 익숙했던 소리마저도 그녀의 곁을 떠나버렸다. ㅡ25


릴리아는 진심으로 혼자가 되고 싶었다. 그녀가 자를 수 없는 이 인연의 끈을 신이 직접 끊어주길 원했다. 이 인연이 계속되는 한 그녀는 계속 고통받을 것이다. 그녀는 그동안 미뤄왔거나 두려워서 할 수 없었던 것들을, 삶이 은접시에 담아 선물해주길 바라며 이 소원이 이루어지면 뭘 할지 떠올렸다. 제일 먼저 휴가를 갈 것이다. ㅡ27​


 릴리아의​ 남편 아니는 머리에 혈관이 터지면서 몸을 잘 움직이게 되면서 모든 일에 릴리아의 도움없이는 살 수 없게 되지만, 릴리아가 고맙다기 보다는 전처럼 자신에게 굴복하지 않는 아내의 모습에 악에 받치고 저주하는 마음에 생긴다.


 ​파리에 사는 마크는 세상의 중심이자 모든 것인 아내를 갑작스럽게 떠나보내고... 방황한다. 살던 집의 모든 곳에 아내의 흔적이 있었고, 사는 거리의 모든 사람들이 아내를 좋아했다. 그녀의 많은 친구들도 단지 아내를 떠올리게 했다. 잠도 잘 수 없었다. 밥은 물론 식재료도 뭐가 뭔지 모르고, 스스로 사람을 사귀는 것조차 힘든 이 남자는 그저 주위에서 곧 죽지 않을까, 새여자를 만나지 않을까하는 궁금과 연민을 느끼게 하는 사람일 뿐이다.


 이스탄불에 사는 페르다의 엄마는 그녀가 어린 시절부터 동네에서 안 좋은 쪽으로 유명했다. 엄살이 심하기로 유명했으며, 어린 페르다가 그녀를 돌보며 살아야 할 정도로 엉망이었다. 페르다는 결혼하고 집을 나오게 되면서 어느 정도 자유를 얻게 되었으나 그런 엄마가 다치면서 함께 살게 되자 그녀의 소소한 행복은 절망이 되었고, 남편은 안 좋은 심장에 무리가 왔며, 치매에 이상한 소리를 하여 이웃들의 눈치 뿐 아니라, 자식들과 손녀들에게 미안하다.


 외면당한 여자와 사랑을 잃은 여자와 삶에 지친 여자... 이 세 주인공의 공통점은 그리 많지 않다. 여자 둘에 남자 하나로 성별도 다르고, 뉴욕/파리/이스탄불로 나라와 지역도 다르다. 인종도 다르다. 처한 상황도, 성격들도 같지 않다. (내가 볼 때) 이 셋의 유일한 공통분모는, 수플레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어느 날 우연히 '수플레'라는 요리책을 사게 되고, 그들은 '수플레'를 만들기를 시도한다.


페르다는 지구 반대편에서 어떤 여자가 가게 유리차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하고, 파리에 있는 한 남자가 필사적으로 깊은 슬픔에서 헤어 나오려고 애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천천히 거리를 걸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도 고통을 받고 있다는 걸 알지 못할 정도로 이기적인 사람은 아니었지만, 자심에 대한 연민을 느끼는 데 지금보다 더 좋을 때는 없었다. ㅡ151~152

 

 

 이 전혀 다른 세 사람이 현실은 인지하고, 좌절하게 되고, 또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은 흥미를 넘어서서 무척 현실 같았다. 나에겐 조용한 것을 집착하는 남편도, 사랑하는 배우자를 잃은 경험도, 미친 엄마가 있는 것도 아닌데 심지어 주변에도 없는데.. 현실 같았다. 어딘가에 옆동네에 있을 법한 이야기라고나 할까... 나라도 인종도 성별도 성격도 상황도 다 다른 이들이라서 더 그렇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이 책에서 아주 흥미로웠던 것은 '정령'에 대한 필리핀의 믿음과 터키의 결혼 풍습과 세 사람에게서 공통으로 느껴지는 부엌에 대한 이미지였다.


물론 모든 사람이 마법을 부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재능을 타고난 사람만이 마법을 쓸 수 있다. 그리고 '음식'은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요소다. 지구의 중심은 거대한 쇠공이 아니라 모든 집의 부엌이다. ㅡ 132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그는 자신의 새로운 뮤즈인 부엌이 누군가의 삶을 지배할 수 있다는 걸 조금 더 많이 이해하게 됐다. 이 뮤즈는 그의한 주를 하루하루의 단위로 나눌 수 있도록 도와줬다. 그리고 그 뒤에 서서 아주 오래된 좋은 친구처럼 다시 살이가도록 등을 밀어주었다. 게다가 마크가 자기 연민에 빠지게 놔두지도 않았다. 부엌에서는 멈춰서 생각하고 울 시간이 없었다. 때가 되몀 사람들은 항상 그 뮤즈의 품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들은 그녀에게 도움을 청하고, 그녀의 가슴에 기대고, 그녀가 주는 물로 세수를 한다. 그렇게 그녀는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그녀는 강인하게 기다리면서 아이들이 집에 왔을 때 빵을 줘야 한다. 부엌은 엄마의 가슴이고, 사랑하는 사람의 손길이며, 우주의 중심이다. ㅡ145


 떠들석하게 같이 밥 먹는 것을 좋아하는 릴라이도, 아내를 위해 넓은 부엌이 있는 집을 얻었지만 아내가 죽고는 방황하던 마크도, 통제불능인 엄마 대신 아빠가 안 도망가기를 바라며 어렸을 때부터 부엌에 섰지만 어느새 자신이 한 요리를 맛있게 먹어주는 것을 좋아하게 된 페르다에게도... 부엌은 가족의 중심이고, 지구의 중심이며, 우주의 중심이었다.

 이 책을 보면서 가족과 부엌, 그리고 음식에 대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배우자, 부모, 자식... 하숙생이나 친구들, 이웃사촌까지 인간관계나 인생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는 것 같다.


이건 그녀에게 요리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수플레는 하나의 인생 경험이고, 다른 경험들처럼 처음에는 넘어지기도 했다가 서서히 실력이 늘면서 좋아질 것이다. 이런 경험에 운명이 아니도 포할시키기로 결심한 듯 보였다. 릴리아는 한 번도 자신의 운명에 저항한 적은 없었다. 아마 이들은 그동안 서로의 장점을 많이 잊어버렸으니 이번 계기로 뭔가 배울지도 모른다. ㅡ160


앞으로 얼마나 더 오랫동안 이럴지 알 수 없었지난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건 분명했다. 그는 직접 경험할 필요 없이 모든 감정을 이미 다 알고 있는 상태에서 이 세상에 태어난 성숙한 영혼을 지닌 사람이 아니었다.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일에 그때그때 대처하는 법을 배울 뿐이었다. ㅡ 164


그는 자신이 미소 짓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지만 지금 달달한 디저트가 먹고 싶은 건 분명했다. ㅡ171

잊지마라. 모든 재료에는 대용품이란 게 있단다. 가장 중요한 점은 당황하지 않는 거야. ㅡ287

엄마의 말은 틀렸다. 릴리아는 요리 하나도 구할 수 없는 것처럼 자신의 인생도 구할 수 없었다. 인생에서 빠진 재료에 대한 대용품은 없었다. 아무리 전분을 많이 써도 그녀가 원하는 만족을 맛볼 수 없었다. 현실에서는 달걀 흰자를 써서 뭉치게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인생의 맛들은 섞여들지 않았다. 릴리아의 인생은 궁극적인 하나의 진미를 만들어낼 수 없었다. 인생의 양념은 항상 너무 많거나 적었다. 우주는 한 자밤이 얼마나 되는 양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ㅡ290


 이 책에는 인생이 있었고, 그 인생에 대한 수많은 레시피들이 있었다. 그 레시피는 성공한 레시피도 있고, 성공하고 싶었지만 실패해서 불을 내기도 하고, 오븐에 기름이 다 튀어 닦아내느라 주방 세제와 친해지는 경우도 있지만..... 수플레가 어제보다 30초 더 부풀어 있었음에 기뻐하고, '맛있다'는 그 한 마디에 웃음 짓고, 요리 해달라는 말에 부담을 느끼면서도 누구를 초대할까 설레는... 이런 것이 인생이 아닐까 싶다.

 인생에는 많은 좌절이 있다. 누가 들어도 '좌절'스러운 좌절이 있는가하면, 오늘 저녁 스튜를 태워먹거나 수플레가 푹 꺼지는 그런 좌절도 있다. 나도 매일의 수풀레가 꺼지는 좌절이 있었고, 그리 오래 살진 않았지만, 죽고 싶을 때도 여러번 있었다. 큰 고비가 왔을 때 왜 작은 상처에도 그러게 눈물이 나고 다 끝인 것만 같을까? 이상하게 큰 파도를 넘기는 것이 냄비를 태워 먹는 것을 닦는 것보다 나을 때가 있다. 어쩌면 그 고비에서 그 까맣게 타버린 냄비와 푹 꺼져버린 수플레가 자신과 같아서 무너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도저히 잊어버릴 수 없는 맛이 있다. 그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그 맛을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것은 클라라가 만든 음식이었다. 하지만 결코 그 맛을 내는 음식을 만들 수 없고, 다른 곳에서도 그 맛을 찾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ㅡ300

 책을 읽기 전 나는 좌절 상태였다. 오래 준비한 시험이 있었다. 마킹 실수를 했고, 시간이 부족했고, 몇 문제를 제대로 풀지 못했고, 심지어 그 문제들이 다 틀렸다. 또 기약없는 1년을 공부해야 하는가 하는 좌절 가운데... 나와 같은 좌절을 겪은 20만이 넘는 청춘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이 소설이 좋은 인생 레시피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이 소설은 좌절에 빠진 인생들에게 좋은 인생 레시피가 되는 것 같다.  레시피들은 많지만 누구나 첫 시도에는 실패하기 마련이다. 누구나 살면서 좌절이란 걸 겪는다. 그 끝은 극복일수도 있고, 해방일수도 있고, 행복일수도, 또는 죽음일수도 있다.

 이 책에서 세 사람은 시작이 다르고 과정이 달랐듯이 다른 결말을 맺는다. 그 여운이 남는 결말에 정말 인생이 이런 게 아닌가 싶었다. 해피엔딩도 배드엔딩도 없는...

 

 답이 없는, 그런 삶 가운데 나도 푹 꺼져버린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달달한 디저트를 기대하며... 인생이란 수풀레를 만들어봐야 겠다. 30초 더 버팀에 기뻐하다보면, 언젠가는.... 맛있어지겠지. 적어도 언제가는 맛있는 달달하게 부풀어오른 수플레를 만들 수 있을 거라 기대하며 계속 계속 만들어보는 수밖에... 오늘도 많은 인생들이 수풀레를 만든다. 성공하기도 하고, 나처럼 실패하기도 하고... 한 번 성공했지만 그 다음 번에 다시 실패하기도 하고.... 비결은 많은 실패와 많은 도전인 것 같다.

 얼마 전 1박 2일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윤시윤이 내비게이션에 없는 길에 대해서 한 말에 많은 생각이 들었다. 고속도로의 장점이 있고, 옆길의 장점이 있는 거겠지 싶다. 넘어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다시 일어서는 것이라는 누군가의 명언이 떠오르는 날이다.


마크는 인생에 대한 사랑을 새롭게 발견했다. 그는 아내가 죽기 전에도 항상 아주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야 생전 처음으로 인생과 정면으로 대결하면서 마침내 그동안 자신이 놓치고 살아온 게 얼마나 많았는지 그리고 얼마나 더 행복해졌는지 깨달았다. 요리가 그의 열정이 됐다. ㅡ291


-이 글은 박하에서 책을 제공받았지만, 읽고 느낀 그대로를 적은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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