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우리 부모님들의 학생 시절은 어땠을까?하는 궁금증으로 이 책을 폈다. 머저리 클럽이라는 다소 철학적이면서도 웃긴 클럽의 6명은 같은 학교의 동창들이다. 다섯은 원래 친했고, 나중에 핵심멤버가 된 영민이와 친해지면서 머저리 클럽이 되었다.
우리와는 다른, 비록 지저분하고 교복 팔꿈치가 때어 절어 반들거시고 있지만 분방한 자유가 충만해 있었다. 그는 우리와 다른 세계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과일껍질 속에 갇힌 물기 많은 우리는 그 과피를 벗겨버리면 사과처럼 변색해버리고 만다. 그러나 그 녀석은 방금 밀림에서 뛰어나온 것 같은 싱싱한 원시의 냄새를 피우면러 낄낄거리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세계. 유난히 손등에 사마귀를 많이 가지고 있는 영민이는 우리를 사로잡고 만 것이다. ㅡ46
박영민이 엄숙하게 대답했다. "우리는 머저리다. 그것은 변명할 수 없는 사실이다."ㅡ52
전학생인 영민이. 영민이는 화자인 동순이가 보기에 뭔가 자신들과는 달라 보이는 녀석이었고, 실제로도 그랬을 것 같다. 얻어맞기만 하면서도 계속해서 결투를 걸고, 비열한 것을 잘 보지 못하는 모습은 물론이고, 자신들을 머저리라고 명명하는 것에서 그가 비범함을 느꼈다.
솔직히 머저리들은 자신들이 머저리인 줄 모르는 법인데, 그는 자신이 머저리인 줄 알고 그것을 명명했으니 적어도 머저리보단 한 수 위가 아닐까. 뭐 말장난하는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얘, 사랑이라는 것은 털어놓는 것이 아니야. 감싸주고 서로 은밀한 것이 사랑이야."ㅡ111
"내게 얘기를 하고 나면 필시 기분이 공허해질 거야. 사랑 얘기는 그래서 남에게 하지 않는 법이야. 자기 체액으로 녹여야 되거든, 얘, 너 진주가 어떻게 생기는 줄 아니? 진주조개가 따로 있는 게 아냐. 그저 입을 벌려 호흡을 하다가 모래 같은 물건을 마시면 그것을 뱉지 않고 자기 부드러운 속살로 싸서 만든단다. 뱉어버리거나 피해버리면 진주를 잉태할 수 없지. 그리고 아주 오래 수십 년 동안 자기의 채액, 고통, 쓰라림, 아픔으로 그 진주를 녹여. 그러면 찬란한 진주가 생기지."-115-6
보고싶다거나 만나고 싶다는 그런 감정 때문이 아니었다. 무언가에 지고 말았다는 패배감 같은 것이었다. 영민이에게, 아니면 소림이에게 지고 말았다는 열등감 같은 것이 느껴질 때마다 나는 이를 악물고 공부를 했다. 빈 시간이면 책을 읽었다. 닥치는 대로 읽었다. -145
이 소설에는 평범한 '그 시대'의 고등학생들을 보여준다. 조금은 반항적이지만 뭔가 비범한 영민이, 평탄하게 범생이로 살아온 화자 동순이, 그리고 활발한 문수, 유도부로 힘 센 동혁이, 그리고 영구와 철수. 이 악동 여섯은 머저리클럽으로 움직이면서 먹튀하다가 걸려서 부모님을 학교에 오게도 하고, 사랑에 빠져서 평소 안 하던 짓을 감행하기도 한다.
그 시대의 사랑은 뭔가 더 순수한 것만 같다. 현재와 별반다르지 않으면서도 흑백사진을 보는 듯한 순수함이 그 안에 있었다. 사랑이야기와 진주와의 상관관계도 무척 새로웠다. 사랑을, 짝사랑을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을 거야. 난 지금 이 순간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할 거야. 난 세월이 지나간다 해도 우리의 일들, 그리고 내가 지금 느끼는 이런 감정 모두를 소중하게 기억하고 있을 테야. 설사 어른들이야 늘, 너희 나이 땐 모른단다, 좀 더 나이를 먹어 봐야 한단다, 그런 말을 하지만 난 우리 때의 이것이 가장 소중한 것으로 믿고 싶어." -149
아아, 나는 어쩌면 시인이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바람이 솔잎 사이로 스쳐 지나가면서 부드러운 풀의 노래를 엮어나갈 때 퍼뜩퍼뜩 느껴지는 가슴 벅찬 희열이었다.-163
사랑을 하면 시인이 된다는 말이 있다. 이 소설에서 시인은 동순이다. 책을 읽다보면(조금 과장해서) 내가 소설을 읽는 건가 시집을 읽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동순이가 시를 쓸 뿐 아니라 국내외 시인들을 많이 알고 있어서, 나도 모르는 시들이 많이 나와서 놀랐다.
열여덟살 나이가 갑자기 무서워졌다. 나는 내가 지금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를 생각해보았다. -239
나는 내 자신이 보이지 않는 무위의 시간에서 움썩움썩 자라온 모습을 보았다. 나는 지난 겨울보다 성장했다. 하루하루의 달력을 찢어가며 나는 보이지 않는 눈금 위에서 상승하였다. -272
정말이지 우리는 한눈을 팔 시간조타 박탈당하고 말았던 것이다.-289
우리들의 시대는 가고 있다. 어수선한 발자국을 남기면서 좇기듯이 사라지고 있다.-383
우리는 마치 애어른 같은 모습으로 멍하니 창밖에 내리는, 아니 가슴으로 내리는 비를 쳐다보았다. 이제 조금 있으면 학력고사, 졸업식, 입시, 그러면 우리는 마음대로 다방에 다고, 담배도 피우고, 영화관에도 가는 어른의 시대를 맞이한다. 아아, 우리가 우리 자신의 지나간 과거를 다시 볼 수 있다면. 마치 tv에서 슬로우 비디오로 스쳐 지나가는 순간을 재현시키듯 우리 자신들의 빛나는 과거를 다시 보여줄 수 있다면. -384
열여덟살... 고1에 동순은 영민을 만나며 이야기가 시작되고, 고3 그들이 졸업하며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른이 된다는 기대감과 두려움에, 그리고 사라져가는 시간에 두려워하는 모습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특히 우리들의 시대가 가고 있다는 말에 안타까움 조금과 어이없음 조금이 생겼다. 정말 애어른인 것 같다. 겨우 고등학교 졸업하면서 그들의 기대가 가버렸다면, 앞으로 대학생, 직장인.. 퇴직자들은 어쩌란 말인가. 그런데 한 편으로 우리의 모두의 시대가 하루하루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시대가, 우리의 시간이... 오늘도 가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가는 길을 깨끗이 돌아보아야 한다. 이사를 가면서 살던 집을 청소해주어야 하듯 우리는 떠나갈 때 앉은 자리를 돌아보아야 한다. 혹 떨어뜨린 것이 없는지, 인사는 빼놓지 않고 드렸는지, 돌아보고 그리고 우리는 깨끗하게 떠나야 한다. -404
그래, 좋은 친구가 되고말고. 우리의 시대에 우리가 만났던 손꼽아 몇 명 안 되는 우리의 친구들. 그 모두에게 좋은 친구가 되고 말고. -435
읽으면서 내 추억 아닌 추억을 맛봤다. 1988을 보면서 태어나지도 않은 그때를 추억하곤 하는 것과 비슷한 맛이 있었다. 이 책은 응답하라 1970정도랄까? 정말 드라마가 나오면 이런 내용이 나올 것 같다. '나'의 시대가 아니었기에 그 시절이 선명하게 떠오르지는 않지만, 이런 매체들을 통해서 그 추억을 맛 보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것 같다. 적어도 그들을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통로가 또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 추억 아닌 추억을 들여다 보면서 어느새 나도 그들과 하나됨을 느꼈다. 40년 전에도 오늘에도 우리는 우리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고, 그 모습은 조금은 다르긴 해도 다 똑같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