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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 류시화 시선집
류시화 지음 / 열림원 / 2015년 9월
평점 :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벌써 계절은 뜨거운 여름을 지나 찬바람이 솔솔 부는 가을에 이르렀다. 이제는 서서히 지구가 잠들어갈 겨울이 오겠지. 이 즈음이면 꼭 하게 되는 것들이 있다. 감/밤 먹기, 산책, 낙엽 수집, 그리고 시집 읽기. 올해 내 손에 들어온 시집은 류시화 시인님의 시선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이다.
어떤 시이기에 시인은 자신의 대표시 모음집의 제목으로 이 시의 제목을 쓴 걸까.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곁에 있어도 그리운 이가 지금 없어서 그런 것일까. 나는 막연히 슬펐다.
이 책을 읽으면서, 좋았던 시를 전부 소개할 수는 없지만 몇 편이라도 소개해 보려고 한다.
새와 나무
여기 바람 한 점 없는 산속에 서면
나무들은 움직이 없이 고요한데
어떤 나뭇가지 하나만 흔들린다
그것은 새가
그 위에 날아와 앉았기 때문이다
별일 없이 살아가는 뭇사람들 속에서
오직 나만 홀로 흔들리는 것은
당신이
내 안에 날아와 앉았기 때문이다
새는 그 나뭇가지에 집을 짓고
나무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지만
나만 홀로 끝없이 흔들리는 것은
당신이 내 안에 집을 짓지 않은 까닭이다 -23
당신이 내 안에 날아와 앉았다, 집을 짓지 않은 까닭에 나만 홀로 끝없이 흔들린다... 정말 시적인 표현인 것 같다. 사람은, 사랑은 그렇게 새처럼 날아와 앉았다가 새처럼 날아가 버린다. 홀로 나만 끝없이 흔들리고 있을 뿐... 상대방도 나처럼 흔들렸을까? 서로의 가지에 집을 지을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비
달이 지구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지구에 달맞이꽃이 피었기 때문이다.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이제 막 동그라미를 그려 낸
어린 해바라기 때문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세상은
나비 한 마리로 내게 날아온다
내가 삶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너에 대한 그리움 때문
지구가 나비 한 마리를 감추고 있듯이
세상이 내게서
너를 감추고 있기 때문
파도가 바다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그 속에서 장난치는 어린 물고기 때문이다.
바다가 육지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모래에 고개를 묻고 한 치 앞의 생을 꿈꾸는
늙은 해오라기 때문이다
아침에 너는 나비 한 마리로
내게 날아온다
달이 지구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나비의 그 날갯짓 때문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너에 대한 내 그리움 때문 - 62-3
패랭이꽃
살아갈 날들보다
살아온 날이 더 힘들어
어떤 때는 자꾸만
패랭이꽃을 쳐다본다
한때는 많은 결심을 했었다
타인에 대해
또 나 자신에 대해
나를 힘들게 한 것은
바로 그런 결심들이었다
이상하지 않은가 삶이란 것은
자꾸만 눈에 밟히는
패랭이꽃
누군가에게 무엇으로 남길 바라지만
한편으론 잊혀지지 않는 게 두려워
자꾸만 쳐다보게 되는
패랭이꽃 -68
개인적으로 이 시집에서 가장 좋았던 시 두편이다. 별다른 말을 붙이지 않아도 시어를 음미하게 되는 두 시였다. <나비>라는 시는 워낙 유명해서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패랭이꽃이라는 시는 이번에 처음 보았는데 두 시 다 보고 또 봐도 참 좋다.
<나비>라는 시는
아침에 너는 나비 한 마리로
내게 날아온다
달이 지구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나비의 그 날갯짓 때문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너에 대한 내 그리움 때문
이라는 부분이 정말 좋다. 계속 입안에서 음미하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이 책은 시도 참 좋았지만 서문과 시평도 참 좋았다.
서문에서 시인은
삶은 경이롭고, 외롭고, 절망적일 만큼 희망적이다. 그러는 사이 꽃은 적멸로 지고, 비는 우리를 잠재운다.
여행이 끝난 후에야 지나온 길들의 의미를 깨닫듯. 고통은 지나가고 한 편의 시가 남는다. 그때까지 단어들을 찾는 것이 시인으로 산다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마지막 시평에서 독자는
'사람이 만든 책보다 책이 만든 사람이 더 많다.' ......
시인을 만드는시를 쓰는 시인을 우리는 '시인들의시인'이라고 명명한다. 시인들의 시인이 시인만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다. 시인보다 훨씬 많은 독자를 만들어 낸다. 그러니까 이렇게 말해도 된다. 시인이 만든 시, 시가 만든 시인보다 시가 만든 독자가 훨씬 많다.-191
시인은 평생 '한 편의 시'를 쓴다. ...시 전집, 혹은 선집이 한 편의 시일 수 있다. 시인이 생애 전체에 걸쳐 추구하는 가치나 의미, 또는 어떤 세계를 한 편의 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 한 편의 시는 시인 자신이 주장할 수는 있지만, 독자들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한 시인의 생애와 정신을 압축하는 한 편의 시는 독자에 의해 정해진다. 그리고 그 시는 독자마다 다를 것이고, 그 시 또한 독자가 읽을 때마다 매번 새로운 의미를 뿜어낼 것이다. 그런 시가 좋은 시다. 독자에 의해 매번 새로워지는 그런 시, 독자와 시 사이에서 이뤄지는 내밀한 대화를 통해 매번 새로 완성되는 그런 시가 좋은 시다. -201 (이문재)
라고 말한다.
시인은 고통이 지나간 자리게 시가 남는다고 말하고 독자는 그 시가 새로운 시인을 만든다고 말한다. 시인이 쓴 시보다, 시로 인해 시인이 된 사람이 더 많을까?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적어도 이 책을 읽으며 최소한 한 명 이상의 시인들이 탄생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