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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집 ㅣ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71
최상희 지음 / 비룡소 / 2013년 10월
평점 :

"칸트의 집"
이 소설을 처음에 접했을 때, 왜 제목이 칸트의 집일까 생각했다. 책을 보면서 나의 집은 어떤가 생각하게 되었다.
그럴 때면 나는 그들과 상관없는 양, 멀찍이 물러서 있곤 했다. 하지만 별 소용없는 일이었다. 우리가 한 세트인 걸 이미 마트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다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겹도록 매일 똑같은 풍경이었다.
열무는 엄마와 형과 시골 바닷가로 이사를 오게 된다. 시골 바닷가에는 학원도 없었지만 햄버거 가게도, 피씨방도 없었고 친구들도 많지 안았다.
갯벌을 향해 다시 달려가니 갈매기 떼가 하얗게 날아올랐다. 형은 사라지고 없었다.
뒤돌아봐야 아무것도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내 되를 따라다니는 게 있다면, 그건 아마 형일 테니까.
형은 역시 틀별한 아이였다. 단지 엄마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특별할 뿐이었다. 그때부터 엄마의 소원은 하나였다. 형이 특별한 아이가 아니라 평범한 아이가 되는 것. 하지만 특별해 보이는 이웃는 알았지만 평범한 아이가 되는 방법은 알아내지 못했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이기적인 자식.
소열무의 형의 이름은 소나무인데, 그는 서번트 장애가 있었다. 자신만의 세계에서 자신만의 규칙으로 사는 그는 칸트 같았다. 철학자 칸트는 정해진 시간에 산책을 하고, 자신의 정해진 규칙대로 살았다.
그런 그들 앞에 새로운 인물이 나타나는데, 그는 매일 정해진 시각에 산책을 했다.

석금동이 자리를 뜨자 속으로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셋, 둘, 하나, 발사! 칸트가 나타났다.
칸트는 매일 산책을 하고, 또 다른 칸트는 늘 정해진 만큼 그림을 그린다. 도대체 왜냐고 물어보고 싶지만 물을 필요도 없다. 그건 칸트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으로 검색한 바에 의하면 유명한 철학자 칸트가 일생에서 딱 하루 산책을 빼먹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책을 읽다가 그랬단다. 당최 이해가 안 간다. 이해하려 하지 말고 받아들여라. 엄마가 늘 아빠에게 하던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았어 대신 아빠는 포기하지 않았던가. 생각해 보면 아빠가 포기한 건 형 하나뿐은 아닌 것 같다. 나와 엄마, 그리고 아빠와 남편임을 포기하려는 중이다. 아니, 나를 포함한 그것들은 이미 오래전에 포기당했는지도 모른다.
칸트는 바람에 몸을 맡긴 채 묵묵히 서 있었다. 칸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칸트의 집이 떠올랐다. 거의 아무것도 없이 휑한 칸트의 집처럼, 그의 등은 고독하고 쓸쓸했다.
내일부터 규칙은 취소다. 어차피 규칙은 어기라고 만든 것이니까. 형은 모르지만 나는 그걸 알고 있었다.
칸트라 별명지은 남자는 건축가였고, 한때 건축 사무소를 열였었고, 소장님이라 불렸었다. 그는 많은 상을 탔고, 멋진 집을 지었었다. 그는 왜 칸트가 된 것일까? 그는 왜 관같은 집에서 혼자 사는 걸까?
칸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형제가 달갑지 않았다. 그러나 처음에는 나무에게, 그리고 열무에게 마음을 연다.

개똥철학. T자를 멜론 위에 대며 사뭇 즐겁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칸트를 보며 지금 내가 듣고 있는 소리가 바로 그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T자는 말이다. 누구나 하나 가지고 있어야 하거든. 누가 뭐래도 흔들리지 않는 수직과 수평을 지녀야 하는 거지."
이건 또 무슨 소린가 해서 멍하니 쳐다봤다.

생각해 보면 그 때 칸트가 내게 하려던 이야기는 수평선과 수직선이 아니라 형과 나에 관한 이야기였던 것 같다. 수직과 수평. 전혀 다른 방향에서 시작한 두 선이 만나야 T자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아름다운 선이 그려지고 그 위에 집이 서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칸트의 이야기는 형이나 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집에 대한 이야기뿐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쨌든 괜찮았다. 집이 곧 칸트였으니까. 만날 때마다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낯설게 대하고, 까질하게 굴어도 그 속에서 조용한 환대를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해 피워 준 불처럼 따스하고 아늑했다.
카트를 만난 뒤부터 시간은 두 가지로 나뉘었다. 기다리는 시간과 미칠 듯이 기다리는 시간. 칸트의 집에 갈 시간을 기다렸고 칸트의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이번에는 미친 듯이 기다리기 시작했다. 규칙 따위는 무시하고 눈을 뜨자마자 칸트의 집으로 달려가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다.
열무도, 나무도, 칸트도 칸트의 집에서 만나면서 별로 말을 안하고 별 거 안 하는 것 같지만 그들은 서로의 상처를 어느새 만지고 치유하는 과정 가운데 있었다. 칸트를 만남으로 나무는 자신의 집을 상상하기 시작했고, 열무는 형이 아닌 자신을 보게 되었고, 칸트는 관의 집이 아닌 빛과 바람이 가득한 유리의 집이 되고,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다.
당분간 석금동을 만나기 힘들 거란 예감이 들었다. 늘 그랬잖아.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늘 그랬던 것처럼 넘기기가 이번엔 힘들었다. 늘 있는 일로 치기에 이 바다는 턱없이 지루하고 친구는 너무 적지 않는가.
나도 숨어들고 싶었다. 아니, 최소한 어떤 기분인지만이라도 알고 싶었다. 하지만 형은 구획을 정확하게 나눈 식판처럼 자기 기분을 남과 공유할 마음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형의 세상은 이쪽이 아닌, 초록색 담요 안에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칸트의 2층 방은 형이 발견한 또 다른 초록 담요였다.
형은 거짓말을 안 한다. 그러나 상상력도 없다. 다만 눈 앞에 있는 걸 외우고, 자신만의 규칙을 따라 살 뿐. 열무는 자기 멋대로 사는 형이 부럽기도 하고, 밉기도 하다.
"누군가와 맺어져 있다는 건 필연적으로 두려움을 수반하지. 그게 사람이든, 사물이든, 이 세상 모든 것은 말이다. 하지만 말이야, 그것 때문에 살아가는 건지도 몰라. 삶은 아이러니란다."
"사람들은 건축이란 눈에 보이는, 실체가 확실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하지만 건축가란 말이지, 실은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는 사람이란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막연한 상상으로 시작해서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형체를 완성해 내는 거야. 말하자면 건축가는 상상에 의해 현실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라고나 할 수 있지."
"그게 뭔 소리예요?"
"현실로 이루어지게 하려면 일단 상상해야 한다고."
집은 지어지지 않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형은 상상하지 않으니까.
삶은 아이러니라는 말, 정말 와 닿는 것 같다. 삶은 정말 아이러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건축가에 대해서, 건축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건축가와 소설가는 닮은 점이 많은 것 같다. 상상으로 무언가 형체를 만들어 간다는 것. 건축하는 그것이 집으로 완성되는 것이고, 소설가는 책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네가 어떤 사람인 줄 알고 나면, 네게 필요한 집도 뭔지 알 수 있게 될 거다."
또 시작됐다. 그놈의 개똥철학. 결국에는 아, 그래요, 내가 바보예요! 하고 항복하게 만드는 칸트의 개똥철학이 시작된 거다.
"네가 생각하고 끔꾸는 것, 이를 테면 이상향이라고 하는 것에 맞는 공간이 있다면 말이다, 우리는 그것을 집이라는 말로 부를 수 있지. 그건 한 칸짜리 서랍이 될 수도 있고 저 넓은 바닷가가 될 수도 있단가."
그래요, 난 바보고 소장님은 잘났어요!하고 외치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네 속에 굳게 자리 잡고 있는 집을 허물고 나면 너도 네 집을 갖게 될 거다. 그걸 나는 너무 늦게 알았지만."
이 역시 무슨 말인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칸트도 늦게 깨달은 걸 내가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리라 생각하고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형은 드디어 자신의 집을 그린다. 마치 새 둥지같이 생긴 집. 나무는 칸트의 집도 새 둥지 같은 느낌이라고 했다. 드디어 자가만의 집을 만들어낸 나무. 칸트도 세상밖으로 나온다. 이제 그의 집은 관에서 아름다운 유리의 집이 되었고, 새박물관도 짓기로 한다. 그러나 그는 사고로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모든 일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걸 잘 알면서도 나는 형의 표정을 흉내내며 말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난 상관없어요, 하는 형의 표정 말이다.
"혼자인 건 어떤 느낌이에요?"
벽에 닿아 되돌아오는 내 목소리가 이상하리만치 울렸다.
"가끔 궁금해지곤 했어요. 형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늘 아무도 필요 없고, 아무와도 상관없다는 표정 속에 무슨 생각이 들어 있는지 궁금했어요. 형의 세상은 형의 머릿속에만 존재하죠. 형은 자기가 만들어 놓은 완벽한 세상으로 들어가고, 또 끌어내면 더 싶숙이 들어갔죠. 형이 만든 세상 외에, 그 바깥쪽은 형에게 아무 의미도 없어요. 형이 내가 누군지나 알까요? 내가 동생이고, 동생이란 게 어떤 관계고, 어떤 의미인지 알까요? 내가 죽는다고 해도 형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거에요. 조금도 슬퍼하지 않을 거예요. 그게... 슬퍼요."
"늘 있는 일이란다. 인생에서 엎어지는 일은 흔하지. 살다 보면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를 돌부리가 사방에 널려 있지."
형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형의 손을 잡고 집을 향해 걸었다. 등 뒤에서 바람이 부드럽게 밀어 주었다. 나와 칸트의 집으로, 우리는 간다.
칸트의 집이 제목이지만, 내게 이 책의 부제를 정하라고 한다면 '자기만의 집을 짓자.'라고 하겠다. 시골바닷가를 풍경으로 펼쳐지는 잔잔하고, 때론 냉소적이며, 때론 한 없이 감성적인 소설이다. 주인공들은 다 상처입은 사람들이었다. 자신의 세계 속에서 사는 나무, 그런 형 밑에서 너무 빨리 철이 든 조금은 삐뚤어진 감성의 열무, 아들을 잃은 슬픔에 아픔에 잠겨 사는 칸트. 이 셋은 T자처럼 서로 만나 하나의 집이 되었다.
이 책을 보면서 나도 나만의 집을 지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스케치북과 연필 한 자루 구입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