펀치 - 2013 제37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이재찬 지음 / 민음사 / 201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펀치

 

펀치의 화자는 고3 수험생이다. 이제 수능이 눈 앞에 현실이 되어버린 시기이다.

소녀는 사회에, 부모에게, 학교에, 사람들에게, 심지어 자신에게도 냉소적이고 비판적이다.


모래 먼지가 안개처럼 흩날려 앞을 가린다. 모래 먼지는 미래를 꿈꾸라고 하면서 미래를 닫아 버린, 멍청한 어른들 같다. 

 

그녀는 마법에 걸리는 날이면 사막의 낙타의 꿈을 꾼다. 미래가 닫혀버린 끝없는 목마른 모래사막의 한가운데... 그녀는 앞으로 나가는지 제자리인지,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간다.

 

숨은 혈은도 찾아내는 기계로 우리 집을 들여다본다면 집안 구석구석 언어의 선혈이 낭자할 거다. 

 

말은 욕이고, 흉기이다. 부모의 말 한 마디에 소녀는 상처를 입고, 그 언어의 선혈은 집안 여기저기 낭자하다. 어쩌면 그 선혈은 분위기가 되어 그 존재를 드러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계급사회에서 왜 계급을 못 만들게 하는지 헌법을 이해할 수 없다. 지들이 만들어 놓고 지들이 금지하고, 모순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대는 것들. 난 겨우 그런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교육과정을 밟고 있는 중이다. 그 구렁텅이에서 탈출하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다. 

 

 

동물들한테도 선택받지 못한 실험녀가 직장 면접관에게 선택될 수 있을까.

 

 소녀는 자신의 등급이 5등급이라 말한다. 성적도 외모도... 그런데 성형 대국에 살면서 그녀도 충분히 예뻐질 수 있으나 그럴 마음이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수컷들의 발정을 견뎌내야 하기 때문이다. 소녀는 사회를, 부모를, 학교를, 자신을 냉정하게 평가한다. 소녀는 역설적인 부분이 많다. 그러나 그 모습이 객관적이고 냉소적으로 보이는 건 왜일까? 아마 그녀가 다른 이들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그런 냉정한 잣대를 대고 있으며, 가끔 비치는 냉소적 비웃음 때문일 수도 있다. 어쩌면 사람이 역설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1등급이 아니면 기회조차 잡지 못해."
방 변호사가 한 말이다.  1등급은 유전자와 부모의 재산이 결정하는 거다. 주인공이 될 수 없기에 난 궤도에서 이탈할 테다. 안 그러면 내 인생은 보나마나 평생 들러리일테니까. 

말은 욕이다. 

사회가 현정이한테서 피자를 도둑질했다.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자유롭지도 않다. 20대가 오기 전에 자유를 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10대가 가기 전에 억압을 잘라 내야 한다. 나는 수년간 그 방법을 물색하느라 공부할 시간이 없었다. 약유강식에게 납치된 '니모'를 찾아야 한다. 

과외 두 시간 중 반 시간은 자기 자랑이다. 자랑할 만하다고 할 수 있지만, 아무튼 별로다. 과외를 보면 학고 과학실 앞에 붙어 있는 사진이 떠오른다. 아이큐만큼이나 혀를 길게 내밀고 있는 얄미운 아인슈타인. 

엄마한테 서울 안에 있는 대학은 기독교요, 서울 밖에 있는 대학은 이슬람교다. 나한테 아웃 서울은 리얼리즘이요, 인 서울은 해리 포터다. 어떻게 갑자기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니란 말인가. 

익숙함은 스스로 사하는 면죄부다. 

한 학기 등록금만 낸 후에 학교는 다니지 말고 재수를 하라고 한다. 지금까지 19년이나 해도 안 되던 공부가 1년 더 한다고 좋아질까. 

전혀 부러울 것 없는 엄마 인생을 보며 가질 수 있는 진심은,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는 것밖에 더 있겠나. 

엄마도 방 변호사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에 의해 48평 아파트에 갇히게 됐다. 방 변호사도 '마을 사람들'에 의해 엄마보다 먼저 48평 방에 갇히게 됐을 거다. 이제 두 사람은 나를 48평에 가두려 한다.
나는 '어쩐지' 도망칠 수 있을 것 같다. 

난 누군의 희망도 되고 싶지 않고 누구에게 희망을 걸고 싶지도 않다. 
각자 알아서 살자. 

내 구토는 내가 만드는 거다. 세상 누구도 가지지 못한 나만의 능력이다. 나는 내가 원할 때 역겨움을 토해 낼 수 있다. 

난 사람들의 말을 들으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구별해 보곤 한다. 여기서 훈련이 잘된 덕분에 학교에서 아이들의 거짓말은 첫 문장에서 대번에 알 수 있다. 오랫동안 훈련된 교사들의 거짓말은 한참 시간이 지나서 겨우 알게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아는 게 병이다. 

 

이 소설은 냉소로 시작해서 냉소로 끝난다. 그녀는 어린 소녀같지 않은 냉소... 그러나 어쩌면 고삼다운 냉소로 일관한다.

가슴에 쏙쏙 박히는 그녀의 말은 나의 고삼시절을 생각하게 했다.

"그래, 나도 이랬었지..."

 

 

사랑같지만 알고 보면 증오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지만 모두가 모른 척 한다. 

"네 시작은 미약했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웃기시네. 내 시작은 미약했고 이대로 둔다면 내 나중은 오물로 뒤덮이리라. 

나를 위한 게 남을 위한 건 될 수 없지만, 남을 위한 건 결국 나를 위한 걸 포장한 거다. 모래의 남자는 아직 얼마나 많은 걸 모르 있는 걸까. 
복잡한 건 간단하지 못한 것일 뿐이다. 

교실 밖처럼, 교실 안에 자비는 없다. 

 

상처 많은 그녀는 사실 그저 평범한 소녀였다. 그녀의 잘못은 방변호사는 아들을 원했다는 것. 엄마는 착하고 공부 잘하고 날씬하고 예쁜 딸을 원했다는 것. 사회는 1등급을 원한다는 것. 그리고 그녀는 그것들을 원하지 않았다는 것 뿐이다.

 

 

내가 5등급이면서도 1등급 대우를 받는 건 어디까지나 방 변호사의 경제력 때문이다. 담탱이의 미소를 받아먹는다면 일곱 난쟁이가 와도 왕자가 와도 깨어나지 못할 거다. 

너무 예쁜 게 죄가 된다는 건, 기꺼이 동의한다. 미필적 고의, 아니면 과실치상, 그것도 아니라면 원죄 정도가 되겠다. 

너무 못생긴 게 죄가 되는 건, 내가 동의하건 말건 원숭이들이 우글거리는 대한민국에서 '레알'이다. 

 

이 책에서 주로 다루는 비판거리는 경제력, 등급, 그리고 여자의 외모이다.

이것들은 하나로 통할 수 있으면서도 각기 다른 상처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책의 어딘가에서 원숭이의 이야기가 나온다. 티비 프로그램에서 원숭이들에게 예쁜 여자와 안 예쁜 여자 중 누구에게 바나나를 먹는지에 대한 실험을 했다. 실험결과는 예쁜 여자의 완승.

원숭이 마저 사람의 외모를 보는데, 면접관은, 손님들은, 남자는 외모를 안 볼리 있겠는가....

씁쓸했다. 이 씁쓸함은 어쩌면 내 등급이 1등급이 아니여서 일지도 모르겠지만.

 

 

말라깽이들한테는 얼씬도 못하면서 지방질은 내가 편한지 떠날 생각을 안 한다. 음흉한 시선으로부터 날 지켜 주는 지방질이 편하긴 하다. 살을 뺀다면 누구를 위해서 빼야 하는 걸까?

 

내가 평소에 자주 갖는 질문이다. 살을 뺀다면 누구를 위해서 빼야하는 걸까? 많은 사람들이 결혼을 위해서, 취업을 위해서, 건강을 위해서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나를 위해서였던 그 대답이 과연 몇 번째로 밀려났는지 매번 생각해 본다. 또 나를 위해선데.. 왜 자신들이 난리란 말인가.....? 내가 편하면 된 거 아닌가? 모든 질문은 뫼비우스의 띠가 되어버린다.

 

 

"이유란 원래 있는 게 아니고 새로 만드는 거니까."

"원래 진리는 말이 안 돼. 말이 되는 건 말을 만들기 위해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해."

슬퍼서 운 게 아닌데 울다 보니 슬퍼질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종백숙부라는 사람은 대학로에서 연극을 하는 배우라고 한다. 그는 시종일관 표정이 없다. 장례식장에 있는 사람들 중 연극을 하지 않는 사람은 종백숙부가 유일해 보인다. 

높은 위치에 오를 때까지 계속해서 발악하고 올라가서도 그 위치를 지키는 건 할머니 말대로 "지랄 염병"해야 할 일이다. 

남을 걱정하는 척하는 건 사실 자기 위안을 하고 있는 거다. '어떡하니'는 '다행이다'와 동의어다. 고모는 내가 살이 찌는 걸 보고 언젠가 "어쩌면 좋니."라고 했는데 난 그때 고모의 얼굴에서 걱정은 커녕 안도감을 읽었다. 고모 딸은 날씬하다. 

지금껏 한 번도 결석이나 지각을 한 적이 없다. 엄마 덕분에 나는 태어나서 여태까지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지옥에 갔던 거다. 그거면 충분하지 않은가. 학교는 성실한 내게 교육도 친구도 주지 않았다. 

"실행될 때까지 계획은 모두 사실이 아니라고 볼 수 있지."

행복은 외계에나 있는 거다. 행복을 찾아 떠난 사람 중 돌아온 사람은 모두 행복을 찾지 못했고 행복을 찾은 사람은 모두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그녀의 시야가 어떻든 살인자이다. 부모를 청부살해했고, 그 청부살해를 실행한 자도 죽였고, 그녀의 말대로라면 그녀 자신도 죽일 예정이다. 남이 보면 그녀는 부자 부모를 만났고, 기독교에 외모를 뜯어 고치면, 상위층에 속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읽으면서 동감되고 동의하면서도 안타까웠던 건 그녀가 더 큰 불행과 아픔을 몰랐다는 것이다. 자신의 힘듦과 고통과 우울에 빠져, 그런 시각으로 세상을 봤던 그녀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 책을 보면서 얼마 전에 본 '달고 차가운'이라는 소설이 떠올랐다.

부모를 죽이고 싶어하는 아이들. 달고 차가운의 주인공은 공부스트레스 뿐 아니라 사랑도 조금은 들어가 있었지만, 이 소설엔 우정과 형제다툼까지 있으니 쌤쌤이리라. 왜 아이들은 부모를 죽이고 싶어할까...? 그러고 보니 나도 고삼때 썼던 '가출일기'라는 소설에서 결국 부모를 죽이고 말았더란다.

 

솔직히 이 소설을 보면서 주인공의 시야가, 생각이 나와 비슷해서 많이 놀랐다. 난 아직도 세상에 조금은 냉소적이다. 그녀와 나의 차이점은 나는 소설로 그 시절이 지나갔고, 그녀는 실행에 옮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울한건... 그녀에게 행복은 여전히 외계에 있다는 것이다. 연금술사의 결말처럼 늘 행복은 그녀 곁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사회에 대해서, 교육현실에 대해서, 고삼들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제 막 수능이 끝난 시점, 얼마나 많은 고삼들이 자살을 하는지 뉴스에선 이야기도 나오지 않는다...

우리는 왜 우리의 자식을 죽이며, 우리를 죽이게 만들며 공부를 시키는지....

미래를 행복을 추구하기 보다 지금의 행복을 누리게 해주는 건 어떻지 생각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