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비망록
조부경 지음 / 파란(파란미디어) / 201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웹소설에 대한 막연한 편견이 있어서 볼 생각을 거의 안 했던지라

<19세기 비망록>을 처음으로 읽게 되었습니다. 음산하고 괴기스러운 ‘푸른 수염’을 모티브로 했다는 것에 끌려서 읽게 된 이 책은 전개력이 대단했습니다. 몰입도가 상당히 높은 소설이어서 600쪽이라는 상당한 양을 금세 읽어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한 장 넘기면 또 다음 내용이 궁금해서 끊기가 어려운 책이었습니다. 인간은 금지된 것에 끌리는 존재이기에 비밀에 한걸음씩 다가가는 것처럼 은근한 쾌감이 들었습니다.

 

여주인공 릴리안의 자상한 양부가 돌아가시고 불편한 양모와 둘이 남아 어색해진 가운데, 갑자기 나타난 친오빠를 따라 양부모의 집을 떠나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마차를 타고 가는 길을 알 수 없도록, 밖을 보는 창구를 가려놓은 장치는 앞으로 그녀의 앞날이 어두컴컴할 것을 암시하는 듯해 마음이 조마조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친오빠라 주장하는 남자는 ‘푸른 수염’ 같은 살인마일까?

브루크사이드 저택에 도착해서 생활하는 동안 오빠 윌리엄은 치명적인 매력과 가까이 하기엔 두려운 공포감을 자아내며 긴장감을 더욱 팽팽하게 만들었습니다. 정신분석학자 라캉에 따르면 우리는 금지된 것을 욕망하는 존재라지요.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것. 타인의 욕망을 내 것인 양 욕망하는 것. 그것이 욕망의 실체라지요. 그래서 라캉은 ‘인간은 절대적으로 꼬인 존재들’이라고 말합니다.

 

 

릴리안은 처음에 윌리엄을 친오빠로 생각하면서도 이성으로 멋있다고 느낍니다. 본인의 감정에 놀라며 이성적으로 마음을 다스리려 하지요. 그런 릴리안의 감정을 느낀 윌리엄은 동요하며 죄악을 탐해보지 않겠냐고 이야기합니다. 윌리엄이 친오빠가 아니라는 것은 릴리안도 어느 정도 눈치 챘지만 왜 오빠 행세를 하는지, 왜 자신에게 호의를 베푸는지, 그런 동시에 왜 지옥불에 떨어지자고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럽기만 했습니다. 위험한 사람이라는 예감에 적신호가 켜지는데도 그의 미소에 눈길이 가는 자신이 싫기도 한 릴리안의 감정에 저도 빠져서 입술이 바싹 마르고 한숨이 나왔습니다. 살다보면 안 되는 걸 알면서 뛰어드는 경우가 가끔 있잖아요. 저도 모르게 그랬던 지난날이 떠올랐던 모양입니다. 뻔히 안 될 걸 알면서 시작했고 결국 이루지 못한 채 끝나더라도, 안 해본 것보다는 나은 경우가 많잖습니까? 고백도 못해보고 혼자 시작해 혼자 접은 짝사랑보다는 고백하고 안 됐던 경우가 제 기억엔 더 나은 기억으로 남았거든요. 아쉬움이 없으니까요.

 

설렘과 아쉬움을 잘 활용하는 게 소설인 것 같고요, 다시 소설로 들어가면 이야기의 도입부엔 친오빠라고 주장하는 윌리엄이 굉장히 위험한 인물로 느껴졌지만 전개 속에서 그 또한 상황의 피해자, 과거의 악몽에 사로잡혀 힘들어하는 안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윌리엄이 아니라 친형제처럼 의좋게 자란 동생 엘리엇임이 밝혀진 것이죠. 릴리안이 추리해 가는 도중 엘리엇 스스로 밝혔는데 정말 충격적인 반전이었습니다. 남자가 윌리엄이 아닌 것은 알고 있었지만 엘리엇일 줄이야. 윌리엄의 죽음에 엘리엇과의 사건이 계기가 된 것 또한 말하게 되면서 릴리안과의 사이가 극단적으로 멀어집니다. 윌리엄과 엘리엇의 사이에 엘리엇을 향한 동성애가 또 하나의 금기로 작용했다는 반전에 저를 포함한 독자들은 거듭 충격을 받았겠지요.

 

경악할 만한 사실에 힘들어 한 릴리안. 그나마 다행인 건 릴리안의 양모가 그녀 생각처럼 냉정한 사람이 아니어서 그녀를 따뜻하게 받아줬다는 것 정도이지만 이 정도로는 그녀의 텅 빈 마음을 메울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멀어진 두 사람은 똑같이 폐인이 되어 갔고 결국 서로를 찾을 수밖에 없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마지막에 극적으로 다시 만난 두 사람은 만화처럼 행복하게 살게 됩니다.

 

전개 부분에 반전은 정말 안타깝고 사람 애가 타게 했는데 마지막의 급반전은 참 상쾌하고 기분 좋네요. 둘이 잘 될 것 같은 미약한 가능성만 남겨 놓았으면 마음 조마조마할 뻔 했습니다. 한국 현대소설을 볼 땐 내내 분위기가 어둑어둑하다가 마지막에 즐겁게 급반전 되는 경우는 흔치 않잖아요. 요즘 저는 이런 해피엔딩이 좋습니다. 재미있고 행복해서 기쁘게 책을 덮었습니다. 저도 릴리안과 엘리엇처럼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살고 싶네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