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저우에서 만난 순간들: 여행자의 스케치북
이병수 지음 / 성안당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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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젓한 철길을 볼 수 있고,
걸어볼 수 있는 장소가 어딥니까?”

“아주 조용하고 자연이 그대로 보존되고
트레킹하기 좋은 곳은 어딘가요?”

“광동성의 고유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장소는 어디에 있나요?“

”광저우의 핫플레이스는 어딘가요?“

”광저우의 젊음이 살아 있는 곳은 어딘가요?“

”광저우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은 어딘가요?“

*

오랜 역사와 문화의 도시,
광동 요리가 유명한 도시,
현대적인 감각의 도시,
아름다운 자연과 공원이 갖춰진 도시.

광저우를 경험한 작가가 기행문이나 가이드북을 썼다면 지금으로부터 수십년 후에야 이 도시의 매력을 알았겠구나,

하는 생각에 아주 조금은 철렁한 마음이 느껴진다.

*

미국 11개 도시를 혼자 걸었던 산책덕후 한국언니라 해도 국내에서는 멀고 새로운 지역을 경험한 적이 드물다는 것도 새삼 깨달았다. 2주 전에 아티스트투어를 곁들인 장손투어를 하고 와서 어제는 난생처음 농어촌버스를 타보는 경험을 했는데…

나의 첫 해외도시인 상해에 거주중인 여행덕후 윤소희 작가님과 따로 또 같이 월드투어 중이다. 윤 작가님은 베를린에서, 나는 서울에서 다음 북토크의 최종단계를 마무리했다. (다행히 난 어디에 있던 거의 베를린의 시간대를 살고 있다.) 2주 간격으로 호남과 영남을 모두 밟아보는 경험도 20년만이다.

그런데 광저우는 어디에 있는 거지?

*

저자가 화가지망생이었던 건축전공 여행덕후라 책의 개요만 봐도 뭔가 통하는 느낌이었다. 이런 사람을 유혹한 도시라면 방구석 이미지 투어는 꼭 해봐야지!

무게가 꽤 나가는 이 책을 남해까지 데려와 이고지고 다닐 줄은 몰랐다. 하지만 덕분에 한국의 남해를 바라보며 중국의 남해를 읽을 수 있었다. 그뿐이랴, 라벤더 공원에서 감상하는 라벤더 공원이라니.

*

남해행 버스에 오르기 4시간 전까지, 김서윤 작가의 건축과 예술 프로젝트 <오래된 집의 탐미> 북토크에서 연장된 와인파티를 하느라 건축여행에 대한 욕망도 타오르고 있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이 여정이 한 세트의 리모델링 투어이기도 하다.

동서양 양식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광저우는 매력이 넘친다. 사진이 아닌 어반스케치로 읽어냈기 때문에 양식미를 콕콕 찝어서 마크해둘 수 있는데다, 실물에 대한 욕구도 훨씬 크게 온다. 나처럼 재료를 잔뜩 쟁여두고도 그림그리는 루틴이 흐지부지된 전직 화가/건축가지망생 또는 어반스케치에 막연한 두려움과 호기심이 있는 분이라면 가볍게 산책하듯 방구석 건축여행을 할 수 있는 책 <광저우에서 만난 순간들>이 딱이다.

*

석실성심대교당은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을 연상시키는, 아시아에서 가장 큰 고딕 양식의 화강암 건축물이다. 첨탑까지의 높이는 약 58m에 달한다. 프랑스 건축사가 설계하였고 중국의 석공 장인들이 축조하였다. 25년의 공사 기간을 거쳐 1888년에 건립된 석실성심대교당은 광저우 총교구 주교좌당이며 영어, 광동어, 중국어, 한국어로 미사를 집전한다. -44p

광저우시는 현대 건축 기술의 경연장 같다. 똑같은 모습의 빌딩은 볼 수가 없는데, 이는 그만큼 중국 정부의 노력이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건축물 외관심사위원회가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흔적을 곳곳에 있는 건축물을 통해 볼수 있다. -68p

다양한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체험할 수 있는 서한남월왕박물관은 서한 시기 남월국 제2대 왕인 조말의 묘지터에 세워졌다고 한다. 중요한 유물인 ‘사루옥의‘가 보관되어 있다.
’사루옥의‘는 남월왕 조말의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로서 ’옥을 실로 엮어 만든 옷‘이라는 뜻이다. 옥편을 비단실로 엮어서 만든 이 수의는 매우 정교하게 제작되었으며, 당시의 장례 문화와 기술을 가늠해 볼 수 있게 한다. -124p

*

남아시아, 심지어 동아시아나 국내에서조차 남부지방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음을 새삼 확인한다. 미래의 고향인 마이애미는 미국이라서가 아니라 미국에서 보는 카리브해가 있어서 좋았다.

이제 4년 만에 보는 한국의 남해를 좀 더 즐겨야겠다.


(출판사 도서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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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 개정증보판
홍세화 지음 / 창비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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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4시 반. 거리는 조금씩 쓸쓸해진다. 이 시간에도 남아 있는 빠리의 연인을 찾으려면 디스코장으로 가야 한다. 다시 또 그들이 쉴 곳으로 그들을 데려다준다. -370p, 마지막 눈물

*

적어도 삼 년 이상 본가의 책장에 그대로 머물렀을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초판을 꺼내 읽은 것이 약 23년 전, 인스타는 없었지만 인터넷은 있었고 페이스북은 없었지만 다모임이 있었던 막 스물이 되던 겨울이었다.

그새 빠리는 수없이 닿을 듯 멀어지고 여전히 상상속의 여행지나 배경으로만 존재하는데 책의 존재만큼은 강렬했다. 말수가 적은 선생님의 댁에 (단체로) 놀러가서 선생님이 담배를 말아 피우시는 것을 지켜본 기억이 난다.

그 시절 그나마 이름이 있었던 활동가, 문화인사들은 문화제나 집회에서 멀리서나마 볼 일이 있었지만 홍세화 선생님은 그저 칼럼이나 기사로만 뵐 수 있었다. 책에 실린 말년의 글을 보니 선생님을 원망(?)한 독자들도 있었나보다. 나에게는 오히려 끝까지 실망하지 않을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 소수의 사람들이 지금은 거의 다 고인이 되었다.

*

다시 읽은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는 생소했다. 아무리 23년만에 처음 다시 읽은 거라고는 하지만 전혀 기시감이 없었다. 오히려 연력을 배경으로 파리 가이드북을 촬영했던 (그러나 결국 가지 못했던) 2020년 초의 어느 날이 겹쳐질 뿐이었다. 자리를 뺏긴 파리 지도가 그 가이드북의 부록이었다.

빠리병에 걸려서 온 것이 아니라 얼떨결에 빠리에 발이 묶인 한국인, 게다가 한인 사회에서 ‘오히려 위험한’ 존재로 낙인 찍혀 좋아하는 사람일수록 멀리해야 하는 망명자. 그 사람의 아직 젊었던 날의 진솔함으로 타임슬립 해본다.

*

"꼬레, 꼬레 뚜 꾸르(꼬레, 그냥 꼬레요)."
이 대답은 나의 아집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 대답에 대한 상대방의 계속되는 질문을 피하기 위하여, 바로 화제를 바꾸는 것도 나의 습관처럼 되어 있었다.
-63p, 당신은 어느 나라에서 왔소?


여기서 끝이 아니다. 남쪽 사람들은 북쪽을 '북한'이라 부른다. 마찬가지로 북쪽은 자국을 '북조선', 남쪽을 '남조선'이라 부른다. 어쩌다 양국이 공식 만남을 가졌을 때는 남측과 북측이라는 단순한 말을 쓴다. 이는 양쪽 모두 아직도 서로를 같은 나라의 일부라고 생각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행자의 어원사전(덩컨 매든, 고정아 옮김, 2024, 윌북)


‘남민전', 즉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을 영어로 옮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남조선‘을 영어로 옮겨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싸우스 코리아‘였다. '남조선’이라는 말 한마디가 한국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한국인은 알 수 있다. 그 말은 '민족해방전선‘이란 말보다 더 혁명적인 의미를 품고 있었는데 영어로 옮기면 단지 '싸우스 코리아'일 뿐이었다.
-186p, 망명 신청, 갈 수 없는 나라

한국인들이 우리들에게 어떻게 했는지 아세요? 우리가 입양되어 올 때 우리가 형제인데도 그들은 우리를 따로따로 다른 양부모에게 입양시켰던 거예요. 나는 그때 여섯 살이었는데 그 사실을 빠리 공항에 내려서야 알 수 있었어요. 내가 울고불고 내 동생을 붙들고 놓지 않자, 동생을 입양하려던 양부모가 양보를 해서 우리는 같이 살 수 있었어요. 어떻게 한국에선 우리 둘을 떼어놓을 생각을 할 수 있지요?
-229p, 택시 손님으로 만난 한국인들

‘화이부동'에서 '부동'은 '같지 않다'를 뜻하는 게 아니라 '동화하지 않는다'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서로 화평하면서 획일화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다양성과 '다름'을 존중하라는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똘레랑스란 나와 다른 사상, 신앙, 출생지, 성적 정체성, 피부색을 '다른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다름을 차별, 억압, 배제의 근거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401p, 프랑스 사회의 똘레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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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학, 프랑스에서 중시하는 철학 기초 과정에 대한 정보가 없어도 재미있게 읽었지만 그 모든 기억은 무의식에만 남아있었다. 다만 기억나는 한 단어 똘레랑스. 그 의미를 다시 돌아본다.

선생님이 분열된 자아에게도 똘레랑스를 부여했길 뒤늦게나마 바랄 뿐이다.


(출판사 도서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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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와 암실 ANGST
박민정 지음 / 북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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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저 멀리 축축하고 더러운 어두움까지 나를 특급 수송하려고 할 때, 재이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재이를 만나는 기쁨이 아니었다면 과연 내가 수영장에 계속 다녔을까. -25p, 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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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등장순서와 별개로 작년 이맘때 읽기 시작한 <바비의 분위기>로 거슬러올라간다. 그 책을 거의 다 읽을 무렵 <백년해로외전>이 나왔고, 가을에는 소설 잇다의 <천사가 날 대신해>를 포함한 북토크(를 포함한 문학주간)에 다녀와서 한참 뒤인 연말에 책을 구입했다. 로사를 보는 순간 걷잡을 수가 없었다. 로사라는 인물은 <천사가 날 대신해>의 박민정 파트를 순삭하게 했다. 이 콜라보의 씨앗이기도 한 김명순 파트를 반 년 동안 야금야금 읽었다. 리뷰를 3월에 하려다, 4월에 하려다, 5월이 되도록 물고 있었다. 그런데 <호수와 암실>이 나왔다. 로사가 나온다. 그런데 다른 로사다.

다르지만 같은 로사다. 로사의 존재는 악역이지만 퇴치해야 할 마녀는 아니라는 데 의미가 있다. 보다 정확하게는 <호수와 암실> 기준으로 화자인 연화가 직접 고백하듯이, 바로 연화 자신이 로사와 알리고 싶지 않은 과거를 공유하는 만큼 닮아있다. (이 유사성은 이번 책과 세계관을 공유하는 <천사가 날 대신해>와는 조금 다르다.) 한편 로사 같은 인물이 분열시키는 자매애는 연꽃을 피우는 심정으로 회개하는 연화에 의해 간신히 지탱하는 중이다. 이 세계관에서는 유일한 돌파구이자 엄청난 희망인데, 그것이 재이 같은 여성의 각성 혹은 양심과 연화의 선을 넘지 않는 진심에 달려있다는 것이 쓰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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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철저하게 나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내게 도가 지나친 나르시시즘이 상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나 같은 사람이 지독하게 자기중심적이라는 걸 눈치챈 사람들은 깜짝 놀라서 괴물이라도 본 듯 후다닥 도망가고 만다. 차라리 로사 같은 인간처럼 눈에 띄게 이기적이고 별스러운 미친년이라면 새삼 놀라지도 않을 텐데. 나는 재이에게도 이런 걸 숨겨왔다. -99p, 사진작가

연화는 과격해지고 때로는 저열해지며 자신이 마주 보는 심연에 맞닿아 있다. 그렇기에 연화는 암실과 같은 남성적인 세계를 자멸하도록 하는 것 이외에도 자신의 여성적 세계에 내밀하게 자리 잡은 내부의 모순, 어쩌면 자신의 호수에도 가라 앉아 있을지 모르는 이름 모를 시체의 진실과도 대결해야 한다. 경멸하는 로사의 세계를 탐색하면서도, 가까스로 자신을 바로잡으며 재이에게 다가서야 하는 이유다.
-274p, 해설_씐 것과 쓰는 것(박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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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못된 생각을 하며 세윤의 말을 들어줬다. 세윤을 대하는 나의 태도도 어느 정도는 거짓이었다. 세윤이 말하는 '아주 나쁜 사람들'에 내가 해당 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지만 나는 마치 투항하러 온 사람들을 죽여놓고 십자훈장을 받은 미군이라도된 양 입을 굳게 다물었다. 나라는 인간은 세윤보다 로사에 더 가깝다는 사실을 때로 상기하면서.
-박민정, <천사가 날 대신해>

소설 「천사가 날 대신해」를 쓸 적에는 다분히 김명순 작가의 「의심의 소녀」를 의식하고 있었다. '불쌍한 아이'가 어여쁘기까지 해서 관심의 대상 이 되고, 그 의심의 아이'의 정체가 '불쌍한 아이' 로 귀결되기까지에 이르는 이야기. 내가 여태껏 쓴 단편과 장편 들에 등장하는 아이 역시 바로 의 심의 소녀가 아닐까 생각하면서.
-박민정, ‘때가 이르면 굳은 바위도 가슴을 열어’, 소설 잇다 <천사가 날 대신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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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와 암실>을 읽고 와서 <천사가 날 대신해>의 박민정 파트를 다시 읽었다. 그런 후에야 마침내 김명순 파트를 다 읽었다. (김명순 콜렉션은 다음편에 계속)

반복해서 내 심장을 파고드는 키워드는 ‘내부의 적’이었는데, 이 또한 시기별로 점점 ‘조직 내부’에서 ‘나의 내부’로 이동해 온 역사가 있다. 적이 이동했다기 보단 적이 원래 있던 곳을 추적해서 거슬러올라온 것이다. 내 안의 여성혐오자. 나 자신을 혐오하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용서할 수 없는 여성만의 행위를 혐오 없이 해석할 수 없는 나 자신의 기만에 대해 오래 생각해왔다. 그런 마음에 위로를 주는 책이다.

로사라는 이름(의 유래)에서 예상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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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와 암실 ANGST
박민정 지음 / 북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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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스트 시리즈의 시작이 이보다 더 적절할 수 있을까? 내면의 경멸을 감추고, 들켰는데 들켰다는 걸 모른척하고, 스스로를 혐오하다 끝내 서술자를 넘어 작가도 믿지 말라고 하는 책. 일상 속에 넘실거리는 불안과 증오를 독자의 내면에 반사시키면서도 독특한 배경으로 충분한 거리감을 주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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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지키다
장바티스트 앙드레아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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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비올라가 옳았다. 이 세계는 이미 죽었다. 나의 복수는 20세기의 것, 나의 복수는 현대적이리라. 나는 나를 내몰았던 사람들의 식탁에 함께 앉으리라. 나는 그들과 동등한 자가 되리라. 가능하다면, 그들을 넘어서리라. 나의 복수는 그들을 살해하는 데 있지 않으리라. 그것은 그들에게 미소를 짓는 데, 오늘 그들이 내게 보여 줬던 내려다보는 듯한 너그러운 미소를 짓는 데 있으리라. -161p


잘 들어라. 조각한다는 건 아주 간단한 거야. 우리 모두, 너와 나 그리고 이 도시 그리고 나라 전체와 관련된 이야기, 훼손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축소할 수 없는 그 이야기에 가닿을 때까지 켜켜이 덮인 사소한 이야기나 일화들을, 불필요한 것들을 걷어 내는 거란다. 그 이야기에 가닿은 바로 그 순간 돌을 쪼는 일을 멈춰야만 해. 이해하겠니? -613p


그에 따르면 준비과정은 보상이 없고 험난하다. 필요없는 부분을 찾아서 제거하는 것이 어렵다. 인물과의 협상은 준비과정에서 끝내고 사건의 다음 단계를 이미 다 준비한다음 집필할 때는 갈등없이 정해진 대로 쓴다.

(소설은) 시간여행이다. 이미 죽은 (실존 혹은 가상의) 등장인물, 이미 죽은 이전시대 작가들의 언어를 만나는 여행이다. (이 여행은) 예술 없이 완전할 수 없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2025년 3월 24일 장바티스트 앙드레아 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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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성에 대한 도전을 섬세하고도 혁명적으로 ‘조각’한 장편소설 <그녀를 지키다>는 이방인으로의 미묘한 소외감에 더해 다만 외모가 조금 다를 뿐인 사람(미모를 포함하여 연골형성저하증을 보이는 일군의 남자사람)과 다만 마음이 조금 다를 뿐인 사람(엠마누엘라)을 전면에 등장시키며 소위 대의나 전쟁 같은 가시적인 긴장 속에서 각각의 인물이 어떤 부당함에 맞서는지 스미듯 펼쳐나간다. 임종을 앞둔 현재의 미모와 그의 곁으로 다가가는 사제, 그리고 미모의 과거 회상이 교차된다. 미모, 그의 이름은 원래 미켈란젤로였다.

​미모처럼 가난하고 작은 내 마음이 비올라의 마음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여러 겹의 장막을 통과해야 하는데, 그럼에도 마치 웅녀의 토토로 버전을 상상케하는 곰과 마리 퀴리라는 키워드 덕분에 미모의 서술을 거치지 않고도 나는 그녀에게 도달한다.

비올라의 지적욕구와 차마 미모에게조차 자세히 풀지 않는(혹은 미모가 알아듣지 못하는) 혁명의 욕구는 그렇게 평행우주에서 조우한다. 여전히 ‘여성’으로 패싱되는 바람에 ‘작은’이라는 굴욕을 ‘칭찬’따위로 포장하는 세계를 향해 백만스물한 번째 설명을 하고 있는 게 21세기라는 말을 들으면 마리아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것 같지만 굳이 이 시점에 무솔리니가 등장한 것을 보면(게다가 장바티스트 앙드레아가 내한했던 시점을 보라!) 이 책의 등장은 여러 방면으로 혁명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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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두 해를 담은 사진에서 비차로와 사라와 다른 친구들을 긁어냈다. 그들에 대한 기억을 잘라내면서 내가 상처 입히고 있는 건 나 자신임을 이해하지 못한 채 가벼운 자책감만 느꼈다. 나는 열여덟 살이었고, 열여덟 살에는 그 누구도 자신의 실제 모습과 닮기를 원하지 않는 법이다. -317p


하지만 엠마누엘레는 그저 엠마누엘레가 아니었다. 엠마누엘레는 하나의 관념이었다. 조금은 나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어긋남, 비정상이랄까. 혹은 아직 도래한 적 없는 정상성의 표현, 다른 세상을 알리는 선구자로서, 그 세상에서는 엠마누엘레와 같은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고 그들이 저지르는 나쁜 짓이라고는 지나치게 열렬하게 상대방을 끌어안는 것 뿐이다. 그리고 하나의 관념을 죽이지 못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따라서 그들은 엠마누엘레를 죽이지 못했다. -571p

*

조각하듯 소설을 설계하고 집필해나간 <그녀를 지키다> 속 조각의 비밀은 무엇일까? 그야말로 온갖 시련을 겪고 위대한 조각가이자 역사에 남을만한 인물이 된 미모, 그리고 모든 것이 뒤집어지는 순간. 몰입이 쉽지 않은 날들이었음에도 ‘시간여행’이 가능한 과몰입템. 어쩌면 이 책은 언제 읽어도 책속으로 푹 빠질 수 밖에 없는 책태기용 치트키가 될지도 모르겠다.

___

열린책들 도서제공
​미친북벤 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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