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밤
안드레 애치먼 지음, 백지민 옮김 / 비채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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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답게 군다는 건 가면을 벗은 적이 한 번도 없었던 얼굴을 흉내내겠다고 가면을 청하는 것과 같았다. 배역을 연기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의 배역을 어떻게 연기할 것인가?
-361p, 세 번째 밤

​마치 우리가 여기서 함께하고 편안함을 느끼려면 그것은 마치 호퍼의 그림 속의 무언가만큼이나 평범하고 꾸미지 않고 쇠퇴해야 한다는 것을 이 장소가 이해한 듯했다. 꼭 립톤 티처럼, 꼭 그녀의 머리카락을 계속 문지르던 저 격자무늬의 모조 리넨 커튼과 우리가 차를 마시던 이가 나간 두꺼운 도기 머그잔들처럼. 나는 그녀와 내가 호퍼의 그림 속 영원히 요양 중인 환자들과 같지 않았나 의문이 들었다. -399p, 세 번째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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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인상 깊었던 밤>

세 번째 밤은 그들이 즉흥적인 데이트립이자 로드트립을 다녀오는 날에서 이어진다.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만나 기나긴 (모두와 함께하는) 밤을 보낸 남녀 주인공, ‘나’와 클라라는 새해 파티까지의 일주일 동안 썸을 타고 있다. 그들이 급격하게 가까워지는 이벤트라면 (비록 ‘나’는 빵집을 계속 외쳐댈지라도) 이 시골여행만한 것이 없다.

​독자의 입장에서 함께 데이트하는, 적어도 데이트를 관전하는 느낌의 낮과 밤이 셋째날이었다. 갑자기 떠나는 여행, 기나긴 강변도로의 풍경은 이른 아침의 버스 여행(아마도 보스턴에 가던 날?)과 맞물렸고(아마도 같은 길에서 출발한다.) 몽환적인 미국의 아무 소도시가 생각나는 작은 식당과 어촌의 시골집은 일부러 복고풍(호퍼풍?)을 취한 듯한 미국드라마의 도입부를 소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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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들이 부러웠다. 나는 그들을 사랑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부러워하고 사랑하는 나 자신이 싫었다. -127p, 첫 번째 밤

우리는 걷고 가게에 들르고 선물들을 사고 계속 가고, 계속 갈 수 있었다. 언제까지요, 클라라, 내일, 내년까지, 영원히?
-443p, 네 번째 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와 엿새를 보내고 나니 나는 정신병원에 향하는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584p, 여섯 번째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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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밤>은 기나긴 반성문일까, 상소문(?)일까?

​원하는 지도 몰랐던 사랑을 갑자기 만나서 정신없이 빠져드는 와중에 ‘나’는 너무 서투른데다 온갖 도망갈 핑계를 구구절절하게 늘어놓고 망상을 한다. ‘클라라’는 ‘나’에 의해 무참하게 재구성된다. ‘클라라’ 중 한명으로서 그 입장을 취하면 인류애가 무너진다. 그러나 ‘클라라’를 사랑했거나, ‘클라라’를 질투해 본 들러리에게는 이 치밀하고 구차한 변명이 너무도 익숙하다. 버전 1의 나자신이 버전 2의 나자신에게 엿먹고 있는 상황인 듯 하면서도 버전 2의 나자신은 그런 버전 1의 나자신이 엿같은 심리전.

​분명 대다수가 올라프나 레이철의 입장을 취할 것 같은데 그걸 예상한 듯한 분량이다. (이렇게 길게 욕해놓고 한 단어로 요약한다고?) 속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걸로 모자라 상대방을 모함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거라 믿었다. (믿을 수 없어서 모든 걸 상상으로 여기는 걸까?) 영리한 독자라면 초반에 눈치챘겠지만 ‘나’에게는 뿌리깊은 결핍이 있다.

그가 딛고 일어설지는 모르겠다. ‘클라라’의 속을 긁으면서 (어느 정도까지는) 시도해보겠지. 그녀는 내가 이러는 걸 안다는 식으로 끝없이 상상의 탑을 쌓지만, 너가 이러는 걸 알면 그녀는 어서 도망가야하지 않을까.

*

날조된 ‘나쁜 여자’가 날조되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표면적으로 클라라를 고발하는 것 같지만 클라라에 대한 오해를 고발하는 글로 읽힌다.


(출판사 도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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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제1회 림 문학상 수상작품집 림 문학상 수상작품집 1
성수진 외 지음 / 열림원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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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하고도 탄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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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제1회 림 문학상 수상작품집 림 문학상 수상작품집 1
성수진 외 지음 / 열림원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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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도시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지만 내심, 아니 너무나도 나는 그것을 서울이라는 장소로부터, 그곳을 공간적 배경으로 삼는 가상의 집단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었다. 모순이라고 여기면서, 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다시 우스워하면서 고민을 이어 갔다. -34p, ’눈사람들, 눈사람들‘ 수상 소감(성수진)

소설에는 소재와 주제를 선택하는 감각뿐 아니라 거리를 두거나 고쳐 쓰는 숙성의 기간, 엉덩이로 고독감을 견디며 문장을 매만진 작가의 시간과 노력이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눈사람들, 눈사람들‘에는 작가의 지문이 선명하게 보였다.
-170p, 심사평(안윤)

​장르나 형식, 제도적 등단 절차에 구애받지 않는 작가들을 위한 플랫폼 문학웹진 림의 정신을 조심스럽게 확장하는 자리에 림 문학상이 놓여 있다. “무성하고 이채로운” 림의 세계를 빛내 줄 신작을 기다린다. -159p, 심사 총평_이야기의 숲을 채울 소설을 기다린다(대표 집필 소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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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커상 도장깨기가 어느 시점부터인가 젊은작가상 도장깨기가 되어있었다. 작년부터 읽기 시작한 몇몇 (젊작 출신) 대표작가들에 대한 애정(애증?)이 깊어짐과 동시에 새로 알게된 작가들이 자극하는 호기심은 내 안의 무언가와 그들 각자의 무언가가 만나서 끝없는 시너지를 일으켰다. 어떤 대상 수상작가에 대해 친구와 수다를 떨다가 얼떨결에 맡아두게 된 소설보다 시리즈는 어느덧 열 권이 되었다.

​올해 개시한 공모전 중에서도 림 문학상의 경우 웹진 LIM과 림 젊은 작가 소설집의 존재가 반영된 기대감도 있었고, 공모전 자체에 대한 관심이 컸으나 발표가 언제 나오는지 몰라서 잊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빨리‘ 다가올 줄 몰랐던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이라는 빅 이벤트가 생겼고 또한 그에 못지 않은 사건들로 하루하루가 그야말로 드라마틱했다.

​어쨌든 수상작품집의 출간 소식과 서평단 이벤트마저 빠르게 입수한 결과 일반 독자로서는 가장 먼저 책을 받아볼 수 있었다. 읽기에 앞서 온라인 쇼핑을 통해 한정판 비하인드북도 확보했다. 출간 기념 전시는 지났지만 북토크는 이번주 토요일이다.
(알라딘에서 예약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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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자신이 떠올리는 자기 자신의 거울상이 있다. 그 거울 안에서는 블랑쉬가 학교에서 문학을 가르치다가 학생을 유혹한 게 들키는 바람에 쫓겨났다는 과거쯤은 괄호 안에 넘어 두고 폰트를 줄일 수도 있는 일이다. -49p, 포도알만큼의 거짓(이돌별)

김기태 작가님의 ’일렉트릭 픽션‘이라는 단편을 재미있게 읽었다. 이런 소설을 써 보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썼다. -비하인드북 16p, 작가 노트(이돌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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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새로운 작가들이라 기대를 품고 순서대로 읽었다. 고하나의 ‘우주 순례’와 대상 수상작인 성수진의 ‘눈사람들, 눈사람들’은 즐겨읽는 소재인 산책(또는 여행)에 철학(또는 과학)의 깊이가 더해져 만족스럽게 읽혔다. 김기태 작가의 ’보편 교양‘이 생각났던 이돌별의 ’포도알만큼의 거짓‘은 작가 노트에 언급된 ’일렉트릭 픽션‘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했다.

끝까지 긴장을 놓칠 수 없는 건 장진영 작가의 이름을 책표지에서 많이 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작품집 전체를 봤을 때도 이서현의 ’얼얼한 밤‘과 장진영의 ’날아갈 수 있습니다‘의 주파수가 오히려 높은 편으로 느껴졌다. 그야말로 얼얼하게 날아다니는 느낌으로 마지막 작품과 심사평까지 읽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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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꾸준히 다닌다고 유지가 되는 게 아니라는 거였다. 특별한 기술이 없었으니 경력은 경력이 되지 못했고, 잘 다니다가도 오디션이 있어나 출연 기회가 생길 때면 과감히 포기했다. 어쩌면 늘 끝을 생각해서 끝나 버린 건 아닐까.
-110p, 얼얼한 밤(이서현)

나는 전부터 테마파크를 좀 좋아하는 편이었다. 테마파크이면서 아닌 척하는 바깥보다 솔직하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로 병동도 좋아한다. -146p, 날아갈 수 있습니다(장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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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감각을 발굴하되 1회 수상작인만큼 심사위원들도 치열하고 까다롭게 선정한 작품들이다. 신인 작가 혹은 미래 스타작가의 초기작을 읽은 뿌듯함이 있다. 새로운 책속의 친구들이 생긴 것은 덤.

(출판사 도서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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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위로, 아이슬란드
권호영 지음, 제이 사진 / 푸른향기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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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슬란드 여행 정보 또는 정보를 구하는 방법도 상세하게 들어있다. 그러나 이 책의 묘미는 여행지가 여행하는 사람에게 새겨지는 방식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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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위로, 아이슬란드
권호영 지음, 제이 사진 / 푸른향기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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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라는 기다림이다. 밤 9시, 10시, 11시, 12시까지 가만히 서서 기다리는 일. 일상의 단조로움을 벗어나 여행을 떠나왔는데, 이보다 더 단조로운 일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견디는 일.
-183p, 그로타 등대에서 만난 오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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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조지아에 뭐가 있는데요?>라는 살짝 귀엽게 발칙한 제목과 이제 겨우 이름이나 들어본 나라 조지아에 급관심이 생겨서 영어 책스타를 한/영 책스타로 확장했던 그 책 <조지아>의 저자, 에린 권호영 작가의 신간이 나왔다. 마침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사인회까지 한다니 금상첨화! 이미 5일 중 둘째 날과 마지막 날을 얼리버드로 예약했지만 에린 작가의 행사가 있는 금, 토 중에서 토요일을 추가했다. (결국 일요일은 취소했다.)

여행에세이(혹은 그냥 에세이)라는 장르를 재구성한 것은 물론, 세상의 끝까지 호기심을 확장한 것에 더해 계획으로만 머뭇거릴 뻔한 블로그(혹은 여타 플랫폼)도 작지 않게 키워둘 수 있었던 건 모두 작가 에린과 사람 에린을 만난 덕분이다. 에린 작가는 내 능력이라고 말하는 편이지만 그 역시 인연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테다. 앞서 출간한 네 권의 책에도 곳곳에 그 마음이 녹아있고, 신간 <낯선 위로, 아이슬란드>에는 극지방을 견디면서 발견한 성찰과 삶의 새로운 단계가 펼쳐진다.

아이슬란드 여행 정보 또는 정보를 구하는 방법도 상세하게 들어있다. 그러나 이 책의 묘미는 여행지가 여행하는 사람에게 새겨지는 방식에 있다. 여행을 실행에 옮길 사람들을 위한 여행 정보는 이 책과 함께 출간된 <아이슬란드 트래블 스팟 45>에 있으니 참고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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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생각을 했다. 아마 샤워를 하면서? 에린 작가의 여행지는 대륙들이 만나는 곳이었다. 유럽과 아시아가 만나는 조지아, 유럽과 아프리카가 만나는 (혹은 그냥 세상-구세계-의 끝) 포르투갈, 유럽과 북미가 만나는 아이슬란드. 책스타와 블로그로 인연이 두터워졌으나 북유럽 스릴러, 에드워드 호퍼와 같은 강렬한 키워드가 없었다면 조금 달랐겠지.

다 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가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는 생각을 한다. 나도 그리고 (아마도) 에린 작가도. 여행지는 아쉬움을 남기고, 그 아쉬움을 모아 책으로 엮어도 더 큰 아쉬움이 남을 테지만 할 수 있는 건 다음 여행과 다음 책을 준비하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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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시선도 겁내지 않고 어린아이처럼 마냥 기뻐하던 때가 언제였을까. 이해를 받기 위해 애쓰는 일보다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 우선이라는 걸, 이렇게 문득 나무를 찾다가, 꽃에 감탄하다가 깨닫곤 했다.
-51p, 꽃으로 뒤덮인 아이슬란드의 여름

가는 길 내내 창밖의 풍경에, 그러니까 보라색 여름 꽃밭과 털 뭉치 양 떼와 하얀 구름과 구름에 정신을 못 차렸을 뿐. 멀리 빛나는 바다와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바람에서 나는 내음은 여행이었다. 여행중이라는 사실을 이보다 더 온몸으로 느낄 수 있을까. -92p, 웨스트피요르드의 작은 오두막 숙소

​혹시 나에게 허용된 시간이 부족해서 짧은 기간 내에 링로드를 도느라 하루종일 운전만 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해도, 아이슬란드 일부를 느낄 수 있다. 자동차를 운전하며 보이는 풍경 자체가 아이슬란드일 테니. 세상 모든 아름다움이 빠른 속도로 내게로 다가와 안길 것이다! (동시에 두 번째 아이슬란드를 계획하는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143p, 골든 서클

무작위 집단에게 인정받을 수도 있겠지만, '누구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하느냐'는 내 자유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문제였다.
-192p, 언제까지 나를 증명해야 할까?

아름다운 걸 보다가, 그에 대해 나중에 생각하다가, 나중에 나중에 눈물이 날 만큼 벅찬 감동을 다시 느끼기도 하는 걸 보면, 여행하다 만나는 장면 장면을 통해 나를 만나는 것 같다.
-210p, 죽기 전에 얼음동굴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자신에게 한계를 그었던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것저것 좋아하는 것을 향유하는 데 굳이 선을 그을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후회. -228p, 필름카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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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의 오래오래 계속될 삶이라는 여행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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