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스 코드: 더 비기닝
빌 게이츠 지음, 안진환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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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거기에 다니고 있는 나는 학기 말에 이르렀는데 아직도 강의실이 어디인지 파악을 못하고 있다. 필요한 교재도 찾지 못한 상태다. 그러면서 강의실이나 기말고사장을 찾아 헤매고 있다. 두려움이 밀려온다. -337p, 와일드카드

어머니의 기대는 내게 내면화되어 성공하고, 두각을 나타내고, 중요한 일을 이루고 싶다는 더 강한 야망으로 피어났다. 마치 어머니의 기준을 크게 뛰어넘어 그 문제에 대해 더 이상 거론 할 필요가 없게끔 만들어야만 할 것 같았다. -485p,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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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을 부르는 회고록이 나왔다. 감사의 말에 수록된 아주 많은 사람들, 전설의 편집자들이 완성한 책이지만 빌 게이츠 본인의 필력이 그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면 불가능한 작업이었다. 여느 성공담과 다른, 성공보다는 오히려 상실, 애도와 실패에 초점을 맞춘 성장기 <소스코드: 더 비기닝>은 빌 게이츠가 이어갈 회고록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이다.

빌 게이츠가 돌아본 어린 시절은 당돌했지만 크게 어긋나지 않았다. 부모와 외할머니의 한결같은 사랑이 그에게 계속 자신감을 제공했다. 우리 남매는 (나는 빌에게서 나와 동생을 동시에 본다.) 싸우느니 몰래 자기만의 성을 쌓았다. 부모님은 자신들을 넘어서길 원했지만 어떻게 넘어설 수 있는지는 몰랐고, 대리만족 실행자인 우리는 야망에 비해 자원이 부족했다. 도서비에는 한도가 없었으나(이건 정말 필수다!) 빌이 네이처를 스크랩할 나이에 나는 중고 과학앨범을 거쳐 과학동아를 구독했고 그 다음에 읽어야 할 책은 아무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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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기대됐던 부분은 대학에서 예상된 좌절이었다. 이미 동부 엘리트가 주인공인 소설, 드라마를 반복해서 봤기에 안다. 훌륭한 부모의 자식이 동부의 지식자본과 문화자본을 세습한 다른 아이들에게 치일 것은 자명했다. 그의 좌절에 위로받는 건 부차적인 목적이고, 그걸 넘어선 현재와 미래, 그러니까 우리가 넘어설 미래에 위로받고 싶은 것이다.

빌은 이걸 예상했을지도 모른다. 어디 나만 그러겠어, 어디 너만 그러겠어. 더구나 수학이라면, 이미 좌절을 거듭한 나는 언제부턴가 학문적인 학문을 기피했다. 물론 노오력이 필수였다는 걸 나도 뒤늦게 알았다. 대체로 몰래 공부하거나, 벼락치기를 했기 때문에 대학을 졸업하고도 10년이 지나서야 진짜 공부를 겨우 시작했다. 얼마 전까지도 악몽을 꿨다. 꿈에 나온 16동은 실제 16동과 다르게 생겼지만 나는 매번 4시 30분 수업을 놓치고 캠퍼스를 헤맨다. 벼락치기의 악몽은 무의식에 새겨지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그의 MBTI를 검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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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나이의 아이들은 부모와 선생님이 모든 답을 알고 있으리라 기대한다. 나는 점차 부모님과 선생님이 그렇지 않다고, 적어도 나를 만족시킬 만한 답을 주지는 못한다고 느꼈다.
-96p, 합리적인

다른 사람들보다 20퍼센트 더 뛰어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타고난 재능은 어느 정도 작용하고 헌신적인 노력은 또 얼마나 중요한가? 전날보다 오늘 더 나은 성과를 내기 위해 매일 끊임없이 집중하고 고심하며 얼마나 오랜 기간 노력을 기울여야 최고의 경지에 오를 수 있는 걸까?
-289p, 단막극 배우와 파이브 나인

레이크사이드에서는 발판을 마련한 후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고 인정받는 것이 쉬웠다. 교사와 행정 직원, 학부모로 구성된 끈끈한 공동체의 지원도 큰 도움이 되었다. 하버드에서는 훨씬 더 큰 수영장에서 홀로 헤엄쳐야 했다. 모두가 고등학교에서 전교 1등을 했고, 모두가 남보다 앞서는 방법을 알았으며, 모두가 최고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319p, 조숙한 철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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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남을 입증하고 싶은 욕구, 허세마저도 때로는 동기부여가 된다. 먼저 떠난 친구의 소망은 말할 것도 없다. 빌 게이츠는 어쩌면 자기만의 매력으로 더 많은 인정과 사랑을 원했을 뿐일지도 모른다. 그 욕망이 귀인을 만나면 상상 이상의 먼 미래까지 내다볼 수 있다.



본 서평은 열린책들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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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면 녹는 Entanglement 얽힘 1
성혜령.이서수.전하영 지음 / 다람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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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얽힘에 얼마나 깊숙하게 얽혀 있는지는 각색-픽션화가 필요할 정도로 서술이 어렵다. 학원에서 만난 연하의 미소녀에게 큰 상처를 주기도 했고 이미 어느 정도는 망했지만 나를 휘저었던 남자들보다 덜 망가졌다는 묘한 자부심(?)도 있다. 자연스럽게 멀어지거나 연락이 끊기는 것까지는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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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면 녹는 Entanglement 얽힘 1
성혜령.이서수.전하영 지음 / 다람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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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욕이라는 것은 사실 갈망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종선이 미진을 갈망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종선이 미진을 갈망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종선은 미진이, 미진 아닌 모습의 미진이 되길 바라는 것 같았다. 그것은 실로 불가능한 일이었음에도 그랬다. -63p, 언 강 위의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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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시간성, 과거의 유령, 서로 다르게 편집된(혹은 나에게만 있는) 기억, 애증(!!), 인정욕구, 책을 향한 끝없는 갈증. 어쩌면 세계관이 처음부터 ‘픽션’에서 형성된 사람들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의 래빗홀, 나의 토토로홀이었던 이서수 작가의 ‘젊은 근희의 행진’을 다시 읽었다. 소설집 <젊은 근희의 행진>에 붙여둔 인덱스의 위치를 바꾸는 김에 다시 읽은 표제작은 18개월 전과 다르게 읽혔다. (처음 한 여행과 다르게 여행하는 것처럼.)

이 작품은 내 안의 관종과 유교걸이 서로 칼을 겨누게 하여 어떻게 하면 유교걸(엄마?)조차 무시할 수 없는 관종이 될 것인지를 고민하게 했다. 뿐만 아니라 그토록 자랑하는(관종이니까) 젊작 도장깨기를 시작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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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얽힘 얘기를 하라고. (이렇게 끌고 와야 한다.)

​마침내 (젊작 도장깨기를 어지간히 했을 무렵) 전하영 작가를 읽고 서평센터에 여러 번 갇히기까지 수많은 작가의 수많은 캐릭터와 울고 웃고 싸우며(손절?도 하며) 제대로 얽히고 있었는데, 얽힘 시리즈가 나왔다.

이서수 작가의 신간을 수집하고, 성혜령 작가의 근작이 실린 소설보다(축하해요!)까지 차곡차곡 쌓아봤다. 지나가다 소설보다 과월호가 있으면 전하영 작가의 작품을(이미 읽었음에도) 집어온다. (쇼츠시대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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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도 아랑곳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 계속 걸었다. 빗줄기에 온몸이 찔렸다. 피가 철철 흐르는 것 같았다. 피부는 식어가는데 속은 끓어올랐다. 자기가 뭘 안다고. 나에 대해서, 내가 어떤 시간을 겪었는지 뭘 안다고. 내가 그동안 어떤 마음으로 전화를 받아줬는데, 맨날 힘들다는 그 지겨운 얘기를 몇 년을 참고 들어줬는데. -36p, 나방파리

힘이 정말 세요. 고집도 말도 못 하게 세. 자기를 아무도 몰라주고, 아무도 생각 안 해주니까. 그냥 너는 탈락이라는 듯 그런 취급 하니까, 그쪽한테 자기를 알리려고 엄청 애썼네.
-44p, 나방파리

집착과 오해와 증폭된 피해망상은. 그것에 대해선 왜 아무도 말하지 않을까. 우정이 아니라서? 혹은 우정의 보기 싫은 점이라서? -85p, 언 강 위의 우리

언제나 다급하게 나의 관심을 촉구하는 책들이 있었다. 그 책들을 손에 넣지 않으면, 그럴 수 있을 때까지 나는 안절부절못했다. 서가 앞에 서면 어떤 책에 우선권을 줘야할지 고민에 빠졌다. 너무나도 많은 관심사가 내 손을 타려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123p, 시간여행자

그러고 보니 조울증이니 뭐니 정말로 병이 있기는 했던 것일까. 나는 그의 병을 미화하고 그에 대해 열등감마저 품고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예술을 하고 싶으면 ‘미쳐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예술에 미쳐라!’ ‘예술가는 미쳐야 한다!’ 수업 시간에 그런 얘기가 나올 때마다 내가 너무 제정신이라는 게 콤플렉스처럼 느껴졌고 소위 광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동경하며 그들처럼 되고 싶었다. -137p, 시간여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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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얽힘에 얼마나 깊숙하게 얽혀 있는지는 각색-픽션화가 필요할 정도로 서술이 어렵다. 싸이월드와 달리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은 고인의 프로필이 남아있어 댓글이나 친구태그로 추모가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학원에서 만난 연하의 미소녀에게 큰 상처를 주기도 했고 이미 어느 정도는 망했지만 나를 휘저었던 남자들보다 덜 망가졌다는 묘한 자부심(?)도 있다. 자연스럽게 멀어지거나 연락이 끊기는 것까지는 뭐. 지금 잘 지내는 사람들하고 연락하는 걸 잊지 않고 있는지를 생각하기에도 바쁜데. 어쩌다 한번 만날 수 있는 관계 역시 충분하다. 그럼에도 그게 이미 끝난 사람들이 손톱 거스러미처럼 느껴지는 건 사실이다.


(얽힘 1기 서포터즈로서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우리 동생, 아니 얽힘시리즈 많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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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로 대학 가다 - 세계적 명문대에 진학한 남매와 제자들의 확실한 성공 비결
이미영 지음 / 학지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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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International Baccalaureate)는 1968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설립된 비영리 교육재단 IBO가 DP(Diploma Programme)를 개발하면서 시작되었다. IBDP는 대학입시와 연결되는 프로그램이라, 가장 많은 학교에서 도입하여 운영하고 있다. 어느 국가에서 디플로마 과정을 공부하더라도 성적은 동일하게 평가받는다. -268p, IB 교육 살펴보기

소논문을 통해서 학생은 대학 수준의 학문적 글쓰기를 경험하고, 글쓰기 기술을 향상할 수 있다.
-303p, IB 프로그램

​CAS(Creativity, Activity, Service)의 목적은 학생 스스로 활동을 통해서 자신의 흥미나 관심 분야를 발견하거나, 본인의 재능을 봉사활동으로 타인이나 지역사회에 나누며 전인적 성장을 돕는 것이다.
-304p, IB 프로그램

​대학교는 학생이 전공할 과목과 연계되는 과목을 어떻게 선택했는지, HL과 SL 과목을 어떻게 선택했는지 전공 적합성을 고려해서 학생을 선발한다.
-320p, IBDP에 관한 중요한 질문들

*

과학자를 꿈꾸던 학생이었다. 5학년때부터 방과후 수학반에서 영재수학을 했다. 교과과정에 없던 영어는 따로 배웠고 과학고 지망생이되어 중학교 과정을 혼자 예습했다. 초등 과학탐구대회 대상(학교대표), 중등 과학탐구대회 4등, 전국 수학올림피아드에 출전했고 발표수업 기회도 많이 가졌지만 결국 과학고에 떨어졌다. 이 모든 과정이 거의 다 독학으로 이루어졌기에 시험장의 환경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불합격의 쓰라린 아픔은 3년 후 대학교 면접에서 전화위복을 맞이했다. 내신(30%)보다 수능(2.5%)이 훨씬 잘 나오기도 했지만 합격을 결정한 건 면접(서울대)과 논술(연세대)이었다.

한국의 입시환경에서는 사교육이 절대적이다. 성적보다도 정보의 흐름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사교육이 병행되어도 주입식 교육에는 한계가 있다. 저 내신을 뛰어넘은 수능 점수는 자기주도적 학습계획과 초등학교때부터 읽었던 공부법(자기계발서), 수많은 문학작품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IB 교육을 경험한 학생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는 자기주도적 학습목표, 과제선택과 과정중심의 학습, 독서, 그리고 예체능 활동이다. 이런 경험이 대학교 진학 이후에 더욱 빛을 발한다. 사실 나는 사교육 거의 없이 독학으로 서울대에 갔기 때문에 처음 3년 동안 학업능력이 부진했다. 오히려 과학고나 약대에 가지 못한 게 다행일 정도였다. 하지만 바이오소재공학과에 진입하고 2년 정도 지났을 때 전공영어와 교양수업에서 크게 성장하기도 했다. 독서모임과 학생회 활동 역시 사회과학이나 리더십 수업에서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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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성적이 좋은 학생들은 자신의 꿈이 명확하다.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안다.
-71p, IB 교사 이야기

​책을 많이 읽어서 똑똑한 것이 아니라, 책을 많이 읽는 뇌 훈련을 했기에 똑똑한 것이다.
-106p, 유학생 엄마 이야기

​IB는 태생이 지구에서 가장 글로벌한 직업을 가진 외교관이나 국제기구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자녀들을 위해, 국제학교에서 만들어진 교육이기에 글로벌한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124p, 교육개혁과 IB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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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후 추가비용을 들여 직업교육을 받고도 원하는 포지션을 얻지 못하여 미대 재입학을 고려했다. 과외를 하고 영재교육 전문가로 트레이닝을 받았다. 이 시기는 일종의 흑역사였다. 10년째 베스트셀러인 공저서 <과학탐구대회특강>을 달리 홍보하지 않는데는 인세 말고도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 커리어는 최종목적지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개인적 컨설팅 의뢰는 환영)

​만 30세를 앞두고 어린 영재학생들과 두뇌게임을 하면서 노화예방 골든타임을 잡은 것 같다. 이때 유학 중인 친구들과 연락이 닿아 미국행을 결심하고, 모든 방향으로 흔들리는 와중에도 아이비리그 투어를 감행한다. 인스타/블로그 친구들은 알겠지만 그것이 내 30대를 완전히 바꾸었다. 결국 영어를 마스터하고 모든 책을 영어로 읽을 수 있게 됐는데….


*

미국 여러 대학에서 IBDP가 AP보다 높은 수준으로 인정받고 있어서 입시 때 유리합니다.
-147p, IB로 명문대에 입학한 학생

특히 대학은 놀러 가거나 스펙을 쌓기 위한 곳이 아니라, 진정한 지식 탐구를 위해 가는 곳이라 생각할 때 IB가 그 본질에 집중한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173p, IB를 경험한 학생의 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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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덕후 시절에 <가십걸>과 <길모어걸스>를 보면서 미친듯이 부러워하다 결국 깨달은 게 있다면, 과학고 불합격과 마찬가지로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은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아이비리그에 가려면 영어는 물론, 예체능과 토론대회, 인턴까지 섭렵해야하는데다 학비는 상상을 초월한다. 하지만 IB 프로그램이라면 유학도 조금은 순한맛으로 다가온다.

공부를 잘 하는 법의 핵심은 자발적인 독서와 토론(적어로 책수다를 함께할 수 있는 멘토 한 명)이다. 이과 영재가 아니라면 특히, 한국 교육과정은 여전히 딱딱하다. (내가 유연한 교육과정을 경험한건 일종의 특혜였을 것이다.) 이제는 IB가 도입되는 중이니 눈과 귀를 열어둘 필요가 있겠다.

(학지사 도서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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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밤
안드레 애치먼 지음, 백지민 옮김 / 비채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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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답게 군다는 건 가면을 벗은 적이 한 번도 없었던 얼굴을 흉내내겠다고 가면을 청하는 것과 같았다. 배역을 연기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의 배역을 어떻게 연기할 것인가?
-361p, 세 번째 밤

​마치 우리가 여기서 함께하고 편안함을 느끼려면 그것은 마치 호퍼의 그림 속의 무언가만큼이나 평범하고 꾸미지 않고 쇠퇴해야 한다는 것을 이 장소가 이해한 듯했다. 꼭 립톤 티처럼, 꼭 그녀의 머리카락을 계속 문지르던 저 격자무늬의 모조 리넨 커튼과 우리가 차를 마시던 이가 나간 두꺼운 도기 머그잔들처럼. 나는 그녀와 내가 호퍼의 그림 속 영원히 요양 중인 환자들과 같지 않았나 의문이 들었다. -399p, 세 번째 밤

*

<가장 인상 깊었던 밤>

세 번째 밤은 그들이 즉흥적인 데이트립이자 로드트립을 다녀오는 날에서 이어진다.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만나 기나긴 (모두와 함께하는) 밤을 보낸 남녀 주인공, ‘나’와 클라라는 새해 파티까지의 일주일 동안 썸을 타고 있다. 그들이 급격하게 가까워지는 이벤트라면 (비록 ‘나’는 빵집을 계속 외쳐댈지라도) 이 시골여행만한 것이 없다.

​독자의 입장에서 함께 데이트하는, 적어도 데이트를 관전하는 느낌의 낮과 밤이 셋째날이었다. 갑자기 떠나는 여행, 기나긴 강변도로의 풍경은 이른 아침의 버스 여행(아마도 보스턴에 가던 날?)과 맞물렸고(아마도 같은 길에서 출발한다.) 몽환적인 미국의 아무 소도시가 생각나는 작은 식당과 어촌의 시골집은 일부러 복고풍(호퍼풍?)을 취한 듯한 미국드라마의 도입부를 소환한다.

*

나는 그들이 부러웠다. 나는 그들을 사랑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부러워하고 사랑하는 나 자신이 싫었다. -127p, 첫 번째 밤

우리는 걷고 가게에 들르고 선물들을 사고 계속 가고, 계속 갈 수 있었다. 언제까지요, 클라라, 내일, 내년까지, 영원히?
-443p, 네 번째 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와 엿새를 보내고 나니 나는 정신병원에 향하는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584p, 여섯 번째 밤

*

<여덟 밤>은 기나긴 반성문일까, 상소문(?)일까?

​원하는 지도 몰랐던 사랑을 갑자기 만나서 정신없이 빠져드는 와중에 ‘나’는 너무 서투른데다 온갖 도망갈 핑계를 구구절절하게 늘어놓고 망상을 한다. ‘클라라’는 ‘나’에 의해 무참하게 재구성된다. ‘클라라’ 중 한명으로서 그 입장을 취하면 인류애가 무너진다. 그러나 ‘클라라’를 사랑했거나, ‘클라라’를 질투해 본 들러리에게는 이 치밀하고 구차한 변명이 너무도 익숙하다. 버전 1의 나자신이 버전 2의 나자신에게 엿먹고 있는 상황인 듯 하면서도 버전 2의 나자신은 그런 버전 1의 나자신이 엿같은 심리전.

​분명 대다수가 올라프나 레이철의 입장을 취할 것 같은데 그걸 예상한 듯한 분량이다. (이렇게 길게 욕해놓고 한 단어로 요약한다고?) 속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걸로 모자라 상대방을 모함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거라 믿었다. (믿을 수 없어서 모든 걸 상상으로 여기는 걸까?) 영리한 독자라면 초반에 눈치챘겠지만 ‘나’에게는 뿌리깊은 결핍이 있다.

그가 딛고 일어설지는 모르겠다. ‘클라라’의 속을 긁으면서 (어느 정도까지는) 시도해보겠지. 그녀는 내가 이러는 걸 안다는 식으로 끝없이 상상의 탑을 쌓지만, 너가 이러는 걸 알면 그녀는 어서 도망가야하지 않을까.

*

날조된 ‘나쁜 여자’가 날조되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표면적으로 클라라를 고발하는 것 같지만 클라라에 대한 오해를 고발하는 글로 읽힌다.


(출판사 도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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