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와 암실 ANGST
박민정 지음 / 북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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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스트 시리즈의 시작이 이보다 더 적절할 수 있을까? 내면의 경멸을 감추고, 들켰는데 들켰다는 걸 모른척하고, 스스로를 혐오하다 끝내 서술자를 넘어 작가도 믿지 말라고 하는 책. 일상 속에 넘실거리는 불안과 증오를 독자의 내면에 반사시키면서도 독특한 배경으로 충분한 거리감을 주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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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지키다
장바티스트 앙드레아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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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비올라가 옳았다. 이 세계는 이미 죽었다. 나의 복수는 20세기의 것, 나의 복수는 현대적이리라. 나는 나를 내몰았던 사람들의 식탁에 함께 앉으리라. 나는 그들과 동등한 자가 되리라. 가능하다면, 그들을 넘어서리라. 나의 복수는 그들을 살해하는 데 있지 않으리라. 그것은 그들에게 미소를 짓는 데, 오늘 그들이 내게 보여 줬던 내려다보는 듯한 너그러운 미소를 짓는 데 있으리라. -161p


잘 들어라. 조각한다는 건 아주 간단한 거야. 우리 모두, 너와 나 그리고 이 도시 그리고 나라 전체와 관련된 이야기, 훼손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축소할 수 없는 그 이야기에 가닿을 때까지 켜켜이 덮인 사소한 이야기나 일화들을, 불필요한 것들을 걷어 내는 거란다. 그 이야기에 가닿은 바로 그 순간 돌을 쪼는 일을 멈춰야만 해. 이해하겠니? -613p


그에 따르면 준비과정은 보상이 없고 험난하다. 필요없는 부분을 찾아서 제거하는 것이 어렵다. 인물과의 협상은 준비과정에서 끝내고 사건의 다음 단계를 이미 다 준비한다음 집필할 때는 갈등없이 정해진 대로 쓴다.

(소설은) 시간여행이다. 이미 죽은 (실존 혹은 가상의) 등장인물, 이미 죽은 이전시대 작가들의 언어를 만나는 여행이다. (이 여행은) 예술 없이 완전할 수 없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2025년 3월 24일 장바티스트 앙드레아 강연

*

정상성에 대한 도전을 섬세하고도 혁명적으로 ‘조각’한 장편소설 <그녀를 지키다>는 이방인으로의 미묘한 소외감에 더해 다만 외모가 조금 다를 뿐인 사람(미모를 포함하여 연골형성저하증을 보이는 일군의 남자사람)과 다만 마음이 조금 다를 뿐인 사람(엠마누엘라)을 전면에 등장시키며 소위 대의나 전쟁 같은 가시적인 긴장 속에서 각각의 인물이 어떤 부당함에 맞서는지 스미듯 펼쳐나간다. 임종을 앞둔 현재의 미모와 그의 곁으로 다가가는 사제, 그리고 미모의 과거 회상이 교차된다. 미모, 그의 이름은 원래 미켈란젤로였다.

​미모처럼 가난하고 작은 내 마음이 비올라의 마음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여러 겹의 장막을 통과해야 하는데, 그럼에도 마치 웅녀의 토토로 버전을 상상케하는 곰과 마리 퀴리라는 키워드 덕분에 미모의 서술을 거치지 않고도 나는 그녀에게 도달한다.

비올라의 지적욕구와 차마 미모에게조차 자세히 풀지 않는(혹은 미모가 알아듣지 못하는) 혁명의 욕구는 그렇게 평행우주에서 조우한다. 여전히 ‘여성’으로 패싱되는 바람에 ‘작은’이라는 굴욕을 ‘칭찬’따위로 포장하는 세계를 향해 백만스물한 번째 설명을 하고 있는 게 21세기라는 말을 들으면 마리아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것 같지만 굳이 이 시점에 무솔리니가 등장한 것을 보면(게다가 장바티스트 앙드레아가 내한했던 시점을 보라!) 이 책의 등장은 여러 방면으로 혁명적이다.

*

그 두 해를 담은 사진에서 비차로와 사라와 다른 친구들을 긁어냈다. 그들에 대한 기억을 잘라내면서 내가 상처 입히고 있는 건 나 자신임을 이해하지 못한 채 가벼운 자책감만 느꼈다. 나는 열여덟 살이었고, 열여덟 살에는 그 누구도 자신의 실제 모습과 닮기를 원하지 않는 법이다. -317p


하지만 엠마누엘레는 그저 엠마누엘레가 아니었다. 엠마누엘레는 하나의 관념이었다. 조금은 나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어긋남, 비정상이랄까. 혹은 아직 도래한 적 없는 정상성의 표현, 다른 세상을 알리는 선구자로서, 그 세상에서는 엠마누엘레와 같은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고 그들이 저지르는 나쁜 짓이라고는 지나치게 열렬하게 상대방을 끌어안는 것 뿐이다. 그리고 하나의 관념을 죽이지 못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따라서 그들은 엠마누엘레를 죽이지 못했다. -57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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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하듯 소설을 설계하고 집필해나간 <그녀를 지키다> 속 조각의 비밀은 무엇일까? 그야말로 온갖 시련을 겪고 위대한 조각가이자 역사에 남을만한 인물이 된 미모, 그리고 모든 것이 뒤집어지는 순간. 몰입이 쉽지 않은 날들이었음에도 ‘시간여행’이 가능한 과몰입템. 어쩌면 이 책은 언제 읽어도 책속으로 푹 빠질 수 밖에 없는 책태기용 치트키가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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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책들 도서제공
​미친북벤 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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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이고 싶은 엄마에게
한시영 지음 / 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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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 속에서 아홉 살은 유난히도 흑백 사진 같다. '수학 익힘책 32쪽까지 풀고 엄마 싸인을 받아오라’는 선생의 말에 할머니에게 대신 부탁할 생각은 하지 못한 채, 꼭 엄마의 서명을 받아야 하는 줄 알고 불안에 떨었던 아이. 엄마가 펜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술에 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 느꼈던 절망감. 어리석을 정도로 어렸던 아이. 어렸기에 어리석었던 아이. 나는 아직 그 느지막한 오후에 끼어 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43p

*

나에게도 문체나 문학적 지문 같은 것이 있다면 그것의 곳곳에 배어있는 어느 스승이 남긴 명언이 있다. 그는 (아마도) 아직 살아있을 것이고 죽어도 내 지문에 남아있을 테지만 나는 그를 내 지문 속에서 발견하는 게 더 좋다. 그는 ‘사랑의 반대는 무관심’이라고 했다.

종종 증오에 대해 미친듯이 생각한다. 굳이 분류하자면 감정에 대한 나의 생각은 곱씹음이자 분석이다. 법이나 책에서 본 그대로를 읊조리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 적어도 나는 증오의 근원을 아주 오랫동안 분석해왔고, 그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또 그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를 들여다봤다. 덜 노력하고 더 잘나가 보이는(보이는 것보다 잘 나가지 않을 수 있음) 사람을 보면 욱하는 성정이 엄마에게 온 것인지 할머니에게 온 것인지 적어도 32년 이상 되새겨왔다.

*

아홉살때는 엄마가 내 편이어서 다행이었다. 그러나 동갑내기에게 정신적으로 짓밟힌 이야기를 하는 건 수치스러웠다. 일기장에는 (엄마를 믿고) 그 아이가 나와 내 가정을 모욕한 기록을 그림과 함께 남겼다. 그 아이가 나에게 남긴 진짜 모욕은 오랫동안 내 안에만 존재했다. 그때는 그래도 배후가 든든했다. 이른 사춘기가 시작되면서 비밀이 많아졌다. 그리 오래가지도 못할 친구를 만들어서 비밀을 털어놓고야 마는 습성은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엄마가 내 비밀을 감당할 수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을 때?

한때는 타인으로서의 여성을 대표한 적이 있는 엄마는 내가 내 얘기를 안 한다고 한 적이 있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밝은 쪽이든 어두운 쪽이든 엄마와 공유할 수 없다. 어지간해서는 이해시키고자 하는 승부욕도 발동할 법한데, 아주 오래전부터 체념한 것 같은 기분이다. 극적인 순간도 지나온지 오래되었다. 상처를 다시 벌리지 않을 것이고, 그와 별개로 완전히 아물지는 않을 상태로 계속되겠지. 나는 우리 관계에 완전히 무관심한 상태에 결코 도달할 수 없겠지. 엄마는 아직도 나를 ‘첫사랑’이라고 부르니까.

*

한시영 작가는 글을 통해 엄마의 존재를 복원해냈다. 끝내 애틋하지 못하더라도(그러나 그래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엄마 이영숙이 자신에게 남긴 흔적을 바라보며 증오 속에 묻힌 사랑을 발굴한다. 이건 아주 오랜 시간에 걸친 되새김이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읽고 쓰는 일에 타고난 재능은 그 소유자가 자신의 근원을 오래 들여다보고 그 아래에, 또 그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를 끝없이 생각해야만 제대로 발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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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를 위해 내 일상을 읽고 쓰는 것 위주로 정비하고, 후순위에 있는 것들을 가지치기하는 과정. 책을 몇 권 읽고 글을 몇 편 써냈다는 결과보다도 그 과정이 나는 좋았다. 내가 좋아하는 일에 마음과 몸을, 시간을 바치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나를 괜찮은 사람으로 느껴지게 했다. -141p

그 불행과 다정이 뒤섞인 시간들을 글로 쓴다는 것은, 그때는 묻어두기 바빠 알지 못했던 내 감정들을 꺼내어 그것에 이름을 붙여주고 색을 입히고 냄새를 씌우면서 그때의 내가 되는 일이었다. 나의 불행을 기억하고 쓰는 일. 쓴다고 치유되는 것이 아닐지라도, 불행을 껴안을 때 비로소 내 안에 숨죽이고 있던 시간들이 숨쉴 수 있음을 느낀다. 불행이 내뱉는 숨에 의지하여 써내려갈 수 있는 시간과 글이 있다면 여전히 아프고 괴로울지라도 좋을 것이다. 불행이 숨이 되고 글이 되어 내쉬어지는 날들이 더 많이 오길. -284p


*

그녀의 지문을 오래 보고 싶다. 마침내 엄마라는 위치에 도달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충분히 사유했기에 이 복잡한 사랑을 끝내 해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보이기에도 엄청나지만 그 속이 더 엄청난 작가가 등장했다.

​(출판사 도서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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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강밭 - 농사무지랭이의 록키호러밭일쇼
박윤 지음 / 재채기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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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고 알차고 뭉클한데 담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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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강밭 - 농사무지랭이의 록키호러밭일쇼
박윤 지음 / 재채기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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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를 심고 고구마가 자라고 고구마가 열린다. 그것이 어떤 모양새든 얼마만큼의 양이든 그 사실은 변함이 없다. 난 이러한 과정이 마음에 들었다. 심으면 자란다. 이 당연한 일이 기적처럼 느껴진 것은 내 나이가 적지 않은 탓일 수도 있다. 세상엔 노력해도, 아무리 심어도 열매를 맺지 않는 것들이 있다. 심은 것들이 자라는 동안 내내 폭풍우가 치고 두더지가 돌아다니며 파먹고, 이상 기후가 계속되는 일들이 태반이다. 노력은 언제나 결과를 담보로 하지 않는다. 그런 와중에 들깨를 심으면 들깨가 나고, 고구마를 심으면 고구마가 나고, 고추를 심으면 고추가 자라는 밭의 세상은 기이할 정도로 정직했고, 그 정직함은 아름다웠다. -17p

*

마늘도 생강도 즐겨먹지 않는다. 보다 정확하게는 파, 양파, 부추 등 매운 채소나 향신료 등을 날것으로 먹지 못한다. 지난 삼월의 주식이었던 삼겹살을 먹기 위해 마늘장아찌를 상주시켰다. 생강차를 가끔 마시기도 하지만 일단 구하기가 너무 어렵고, 그렇게까지 생강의 효능을 실감하지 못했다. 그런데 생강밭이라니.

부제인 농사무지랭이의 록키호러밭일쇼를 보니, 생강밭에서 생강을 키우는 이야기인 것 같다. 생강보다 농사가 주제라면 얘기가 달라지지. 물론 전공이 농사에 실제로 도움이 되진 않는다. 내 시골이 어떤 역사를 거쳐왔는지 아직도 잘 모른다. 다만 이 시골이 그 시골과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은 알게 됐다. 왜, <타짜>가 인생영화인데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지 않나. 극중 타짜님의 시골도 그 시골과 그리 멀지 않다. 궁금하면 <생강밭>을 읽어보자.

한달살기가 1년이 되고 4년이 되어버린 귀농. 자식농사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한국인에게 농업은 곧 세상의 법칙과 같다. 우리는 멘델이 콩을 심기 전부터 콩 심은 데 콩 나는 걸 알고 있었다. 시나리오 작가인 저자는 자연의 법칙에 위로를 얻으면서도 끝없는 풀뽑기에 지쳐가다 마침내 수확의 기쁨에 도달한다. 농사와 뗄수없는 계절요리가 각 챕터의 부록으로 나오길래 이거 혹시 일본 힐링에세이 같은 건가? 하고 흠칫했는데 읽다보니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서 흡족했다. 재작년 가을 시골에서 밤을 주워오면서 밤조림 이야기를 했던 기억도 소환했다. (근데 그 밤은 어디에 뒀더라.)


*

"우와 그걸 혼자 다 하세요? 저는 이것만으로도 벅찬데요.”
"아이고 나 따라 올 생각 말어. 난 30년을 농사를 지었어. 밭을 몇천 평씩 했어. 지금이야 밭이랑 논이랑 다 넘겼지만 내가 농사로 6남매를 키운 사람이여.“
"세상에 그걸 어떻게 하셨어요? 농사를 짓고 싶은 데 전 엄두가 안 나요.”
"풀베기 힘들지?"
"네.”
"천천히 혀. 조금씩 하다 보면 점점 일꾼이 돼.”
"그럴 수 있을까요?"
"그럼. 지치지 않게 천천히 혀." -83p


나도 내 생강이들을 들고 그런 박람회에 참가하러 가고 싶다. 다른 생강은 어떻게 컸나 궁금하기도 하고 어떻게 키웠나 물어도 보고 싶고, 풀은 어떤 풀이 났었는지, 파밤나방과 조명나방은 어떻게 잡았는지 같이 이야기하며 맞장구치고 웃고 그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강을 캐고 팔면서 비록 주인공도 아니고 조연이라고 볼 수 없을 만큼 등장하는 장면도 거의 없지만 메릴 스트립의 '남편'을 떠올렸다. 그는 그 박람회에서 걱정 없이 즐거웠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런 사람인 것이다. 물론 '내'가 그런 사람이라 는 주장은 아니다. 결코. 물론 '내'가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는 주장도 아니다. 아, 꼭 '나'를 정의하려는 것은 아니다, 라는 것으로 마무리해야겠다. -122p

*

​자급자족을 해서 지구를 덜 아프게 하려면 뼈빠지게 풀을 뽑아야 한다. 작물을 키우는 건 뿌듯하지만 그 뿌듯함에 이르기 위한 과정을 알기에 육아와 마찬가지로 게임 속에서 대리체험을 하고 만다. 농사를 지어서 자식을 키우고 다른 사람들까지 말그대로 먹여살리는 그 피땀을 체감한다는 건 생각보다 험난한 과정이다.

​하지만 우리에겐 <생강밭>이 있다. 여행과 글쓰기로 단련된 저자의 관찰력을 통해 좀더 생생한 간접경험이 가능하다. 인생 비유는 덤. 뭉클하지만 담백하다. 왜 이 책이 재채기가 되어 나왔는지 알 것 같다.

(출판사 도서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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