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세상의 모든 시간 - 느리게 사는 지혜에 관하여
토마스 기르스트 지음, 이덕임 옮김 / 을유문화사 / 2020년 3월
평점 :
토마스 기르스트, 『세상의 모든 시간(부제 : 느리게 사는 지혜에 관하여』
※ 본 포스팅은 을유문화사의 서평 이벤트의 일환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이 책은 '느리게 사는 지혜에 관하여'라는 부제가 말하고 있듯 시간을 들여 만든 것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목차를 보면 알 수 있듯 '타임캡슐'처럼 익숙한 것부터 'ASLSP' 같은 생소한 실험 음악에 대한 것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시간을 많이 들인다는 건 노력을 많이 쏟는다는 말과 비슷하면서도 다릅니다. 노력이라고 하면 어쩐지 없는 것까지 짜내는 것 같다, 라는 것은 저만의 인상일까요. 책의 후면에 "모든 가치 있는 일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밥 딜런의 말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이 책의 '주제'를 묻는다면 이것보다 적절한 것은 없을 듯 합니다.
그가 소개하고 있는 많은 것들이 '예술품'이라는 것으로 분류될 수 있거나, 그것에 상응하는 가치를 지닌 것입니다. 예술에 관해서는 여러 생각이 있습니다. 저는 예술이 인생보다 길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영원하다고는 더욱 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 개인적인 정의는 그렇습니다. (예술작품에 내재된) 예술성은 그것을 만든 사람의 정신을 상상할 수 있는 데에 있다. 예술은 인공적인 것입니다. 자연적인 것을 모방하더라도 완전한 모방은 불가능하고, 결국은 그것을 모방하고자 하는 인간의 정신과 기술 등에 초점이 있습니다.
저는 책을 이렇게 읽었습니다. 저자가 소개하고 있는 많은 시간을 들여 만들거나, 만들어지고 있거나, 만들어진 작품들은 그것을 만들어낸 자의 정신을 담아내고 있다고요. 모든 것이 빨리, 빨리, 를 외치고, 누군가의 말대로 같은 (짧은) 시간에 누가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느냐가 유능함의 조건이 된 시대에, 저자의 생각은 좀 구태의연해 보이기도 합니다. 앞서 예시를 들었던 조선시대 선비의 일화처럼, 요즘의 관점에서 보면 굉장히 시대착오적인 것, 도태된 자의 불평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는 시간을 초 단위로 정밀하게 분절해서 사용하는 시대에 너무 익숙해졌기 때문입니다.
시간에 대한 것도 그렇습니다. 저자가 말하고 있듯 정밀하게 분절된 시간을 사용하는 세계관을 갖게 된 것은 근대화가 시작되고, 산업혁명, 즉, 인간을 기계의 부품처럼 사용하면서, 그들의 작업량을 시간을 통해 측량하려는 시도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역사로만 따지면 그렇게 오래되지 않은, 낯선 생활방식이라는 것이죠.
저자는 자신의 생각을 군데군데 말하고는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목록들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1세기가 넘도록 풀리지 않은 수학 난제나 '블랙 스완' 같은 철학적이면서도 경제적, 사회적인 비유를 들기도 하고, 심지어는 별로 예술과 거리가 멀어보일 뿐만 아니라 큰 의미도 없어 보이는 역청 실험을 소개하고 있기도 합니다.(엄청나게 긴 시간을 들여서 한 방울의 물이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도록 설계된 - 피치 드롭 실험) 시간에 쫓기고, 또 적응하면서 살고 있는 '보통의' 사람들의 눈에는 기이하고 괴짜처럼 보이는 일들도 많습니다. 무의미해 보이기도 하구요. 아무리 우리가 오래 산다고 해도 1세기 이상을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많은 것들은 최소 1세기는 넘어야 이름을 실을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의 삶을 아득히 초월하는 시간을 상상하게 만듭니다. 괴짜 같다고 했지만 이들을 보고 있자면 이상한 경외심이 듭니다.
우체부 슈발은 33년간 돌멩이를 주워 집으로 오면서 '궁전'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관광 명소가 되기도 했죠. 이들과 이들의 작품에서 경외를 느끼게 되는 것은, 그것들이 아득한 시간을 상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제가 예술에서 느끼는 아름다움도 그런 것입니다. 고뇌 끝에 써내려간 한 문장이 감동적인 것처럼, 엄청난 양의 시간을 상상하게 만드는 작품들 역시 압도적인 감동을 줍니다. 시간에 맞춰 산다는 것은 시간의 체계 안에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시간은 보이지 않습니다. 누군가 말했습니다. 인생은 돌이켜 봤을 때 의미를 가지고 그 자리에 서 있다고. 시간은 우리와 함께 발 맞춰 걸어가기 때문에 인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간과 부대껴 살고 있지만 한 번도 시간을 만질 수 없죠. 그것은 오직 돌이켜 봤을 때만 가능합니다.
많은 예술가들이 그걸 알고 있었습니다. 예술가들의 작품은 시간이라는 무형의 것을 실체화시키는 한 수단이기도 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 자신을 정확히 바라보고 반성하게 됩니다. 아무래도 제 관심사가 문학이다보니 프루스트와 조이스 같은 작가들에 대한 일화가 눈에 띄었습니다. 프루스트의 책은 읽어볼 엄두도 못 내고 있지만 좋았던 저자의 말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프루스트의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을 우리가 함께 살아보는 것이다."
참 적절한 말입니다. 가령, 자가 지망생이, 등단을 하겠다고 언제까지 몇 권의 책을 읽고 몇 편의 글을 쓰겠다는 생각은 저자의 방식으로 말하자면, 짧은 시간에 많은 행위를 하겠다는 것과 동일합니다. 마치 수능을 앞두고 문제집 몇 권을 풀겠다, 라는 수험생처럼요. 알게 모르게 그런 사고방식은 우리 일상에 많이 녹아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문학이 진정 예술이라면 그런 것과 달라야 하지 않을까요?
저자는 요즘 예술가들의 세태를 비판하면서(뒤샹의 일화를 통해), 빨리, 빨리, 가 당연해진 시대에는 예술 작품조차 빨리, 빨리 생산되고 소모된다고 아쉬워 하고 있습니다. 팝 아트 같은 것도 있고, 예술의 장르는 다양하기 때문에, 지금 저자의 말도 예술을 규정 짓고 한계 짓는 한 가지일 수도 있지만 저는 이 말에 아주 공감을 했습니다. 그래서 설득력 있게 들렸구요. 저는 그래서 시간을 견디는 타임캡슐 같은 것도 예술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의 구성이 많은 경우 예술품으로 된 것도 그런 의도에서 읽혔습니다. 우리가 예술을 하고, 그것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이유, 그것은 일종의, 우리 존재의 본질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