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장된 표현형 - 출간 40주년 기념 리커버판
리처드 도킨스 지음, 홍영남.장대익.권오현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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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도서제공

『확장된 표현형The Expended Phenotype』는 리처드 도킨스 자신이 자신의 많은 저작 중에서 “부디 이것만은 꼭 읽어주길 바”란다고 자신한 작품이다. 자신의 이론을 본격화했다는 자부심과 이론적인 면에서도 부족함이 없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리라. 35세의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 『이기적 유전자』 이후 여러 저작들이 출간됐지만, 그는 특히 이것을 손꼽아 말하고 있다. 이곳에서 그는 자신에게 가해진 공격에 대해서 변호할 뿐만 아니라 한 단계 나아가 더 과감한 주장을 펴고 있다. 예컨대 개체 중심주의적 진화론을 확장시켜 한 개체가 자신의 주변에 ‘표현’하는 모든 것들, 가령, 비버의 댐 건설이나 흰개미들의 제국과 같은 것들이 유전자 차원의 ‘포괄 적합도’를 증폭시키기 위한 수단임을 드러내고 있다. 이를 일컬어 책의 제목이기도 한 ‘확장된 표현형’이라고 부른다. 학장된 표현형은 그 자체가 다소 난해하지만 그 개념을 받아들임으로써 앎의 지평에 파문을 일으킨다. 나는 그의 이런 점이 좋았다. 과학에 대해 막연히 갖고 있는 편견을 흔들게 해주는 것. 『이기적 유전자』에서부터 이미 그는 여러 사람에게 영감을 주었다. 내가 알기로는 생물학자 최재천도 그 책을 읽고 동물행동학에 입문한 것으로 안다. 나는 그 정도는 아니지만, 확실히 세상을 보는 시야는 달라진 것을 느꼈다. 이것은 놀라운 경험이다. 독서 전후로 완전히 다른 경험을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을 선사한다는 것은 모든 작가의 꿈이 아닐지. 이번 책에서 그는 그때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때, ‘근본적’이라는 것은 우리가 세상을 보는 시야를 바꿔준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도킨스 자신도 이것을 의식한 듯 조심스러운 어조를 유지하고 있다. ‘개체’란 무엇일까? 왜 그것에 집착하고 있을까?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여럿이 있지만, 왜 바꾸려고 하지 않는가. 나는 도킨스가 제시한 ‘세계관’이 흥미로웠지만, 무엇보다 그가 질문을 던지는 방식에 매료됐다. 내 생각에 이 질문은 문학적이고 예술적이다. 상상력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많지만 무엇보다 질문할 수 있는 힘이 주요하다. ‘사고 실험’처럼 비과학적인 도구를 활용하지만 그 결과물은 훨씬 너머의 것에 다다른다. 다윈이 자신의 이론에서 개체 중심주의에서 철수한 이후, 몇 가지 가설들이 그 자리를 들어섰지만, 묘하게도 그 ‘개체’라는 것이 유전자 전달의 수단이 된다는 사실 자체는 의심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과학적 사실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갱신되고 변화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이 분야의 명저로 남을 수 있는 까닭은, 이미 고정된 것을 흔들 수 있는 질문 자체의 힘에 있다. 그런 대단한 상상력과 질문을 소유하는 것은 지난한 일이지만, 적어도 그런 것을 해낸 사람을 보며 우리는 영감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 피셔가 말한 세 개의 성처럼, 가능 세계 어딘가에 존재할지도 모르지만 단순히 이를 마음속에 그려 볼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미처 깨닫지 못한 생명에 관한 중요한 사실이 있을까? 답은 ‘그렇다’이다.”(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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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2022 제5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 - 루나 + 블랙박스와의 인터뷰 + 옛날 옛적 판교에서 + 책이 된 남자 + 신께서는 아이들 + 후루룩 쩝접 맛있는
서윤빈 외 지음 / 허블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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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액자의 형식을 지니고 있고, 액자 바깥의 주인공 ‘레오’는 시계탑지기이면서 책 사냥꾼이다. 그는 인문학자이기도 한데, 새 교황의 핍박으로 스승이 죽자 그를 피해 떠다니게 되고 그러던 중 한 수도원에 있는 책을 필사하게 된다. 책의 이름은 『죽음과 지혜의 책Ⅰ』이다. 그는 일주일이라는 빡빡한 시간 동안 육체의 한계에 몰려가며 책 내용을 옮겼다. 그는 원래 거처로 돌아와 이 책의 탄생과 관련한 의미심장하고 으스스한 배경을 알게 된다.

그 이야기를 해주는 것은 다름 아닌 책 자신이며, 이는 자신이 무의식으로 알던 것을 떠올리게 된다는 의미에서 독서 행위를 비유하는 게 아니다. 책과의 대화는 다음과 같이 실제적으로 이뤄진다. 레오는 질문 하나를 문장으로 만들고 그것을 책에서 요구하는 조건에 맞춰서, 내부의 99/100 이상을 차지하는 숫자들을 조합해 계산한다. 그러면 책은 다시 ‘듣는 페이지’를 거쳐 ‘말하는 페이지’로 독자를 안내한다. 이 계산의 과정을 거치면 책의 내용은 조금씩 달라진다. 수식을 매번 고쳐 적으면서 계산을 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누구냐, 는 질문부터 시작해서 레오는 점점 수수께끼에 다가선다. 어찌 된 일인고 하니, 다음과 같다.(액자의 안)

책은 스스로를 네메시우스라고 소개한다. 그는 인간을 강제로 책으로 만들겠다는 사악한 의도를 가진 알 라시르라는 연금술사에게 희생되었다. 알 라시르는 그 자신이 영생하는 책이 되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지적 능력을 가진 네메시우스를 실험체로 선택했다. 다소 지적 허세와 오만한 성격을 가진 네메시우스는 소실된, 전설적인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 같은 장소를 만드는 것이 일생의 목표였다. 후원을 부탁한다는 알 라시르의 계략에 속아 알 라시르의 거처에서 꼼짝없이 붙잡혀 인간을 뇌로 바꾸는 수술을 당하게 된다.

레오는 네메시우스의 복수를 위해, 수도원에 돌아가 네메시우스 책 원본과 알 라시르의 원본을 훔친다. 그는 자신이 필사한 네메시우스 책(계산을 통해 질문에 대답을 받을 수 있는)이 아닌 원본 책을 제거하고, 사본을 유지하기로 선택한다. 다른 설정도 흥미롭지만, 복제될 수 없는 교유한 존재로 여겨지는 인간이 마치 물건처럼 복제되고 폐기된다는 상상력은 사이버펑크적인 기괴함과 비윤리성을 목격했다는 역겨움을 느끼게 하고, 이게 또 흥미를 유발한다.

당연하게도 전뇌화 된 인간은 이전의 인간과 동일인이라 할 수 없는데, 단순히 말하면 인간은 정보를 처리하는 기관으로서 뇌 이상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흑요석을 깨뜨린 칼날로, 약물로 도포한 두뇌 표면을 회 뜨듯 저미고 전기 신호를 줘서 만든 책은 당연히 인간 존재 전체를 담보할 수 없다. 그건 차라리 여태까지의 기록물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뇌의 주름을 글자 같다고 하고, 두뇌를 책으로 만든다는 상상력은 꽤나 설득력이 있다.

김혜윤의 소설(「블랙박스와의 인터뷰」)에서는 주인공을 지키기 위해 블랙박스로 전뇌화를 결정한 사람이 등장한다. 이때 블랙박스는 그가 선택한 육체라고 할 수 있다. 전뇌화 한 여러 인물은 그들의 새로운 육체 특성에 맞춰 말하고 반응하게 된다. ‘제대로 된’ 인간이었을 때 자신이 누구였는지에 대한 의식은 있다더라도 새로운 육체에 복속된 이상 그들은 더 이상 같은 사람이라고 보기 난감해진다. 우선, 그런 불완전한 육체로는, 그들이 불완전하게나마 전뇌화해서 살아가기로 한 목표, 즉, ‘무결한 인간적 소통’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런 아이디어를 김필산은 조금 더 전진시키고 단순화(상징적이라는 점에서)시켰다. 이는 아마 인물들이 한국인이 아니라는 점에서 기인하기도 할 거다.(김필산은 김혜윤보다 상징적이고 역사적인 관점에서 접근한다. 보다 이론적이고 글 자체가 하나의 알레고리처럼 읽히는 경향이 있다. 김혜윤의 소설에서 전뇌화한 사물들의 처지 역시 비참하기는 마찬가지지만 (비록 삶의 조건들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몰아갔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선택이었으며, 전뇌화 만큼 남겨진 인간의 슬픔이나 죄책감 등에 더욱 치중한 면이 있다.)

두뇌를 저며서 옮겨 놓은 책이 ‘작동’하려면 그것을 읽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김혜윤의 전자 기기와 달리 이들은 충분한 전력이 있다고 해도 스스로 말할 수 없다. 오직 읽힐 수만 있는, 이 수동적 행위가, 즉, 독자에 의한 행위가 다시 그들 존재를 재편하며 독자에 의해 새롭게 읽힐 여지를 창조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저자의 죽음’과 같은 인문학적인 개념을 떠올리게도 한다. 『죽음과 지혜의 책Ⅰ』이 무한한 사본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점은, 그리고 그 각각의 책에 대해 가장 밀접해진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은 엄밀한 독서 작업을 상기시킨다. 오만한 알 라시르와 대화를 하면서도 레오가 보여준 자신감은 여기서 비롯되는 것이다. 어떤 인간보다도, 그는 자신이 ‘소유한 책’을 장악하고 책임질 수 있다. 계산의 능숙함에 대한 레오의 자신감 외에도 그가 읽은 책에는 레오의 질문이 맥락적으로 새겨진다는 점에서 그들은 함께 창조한다. 책(독서)이 그를 늙게 만들듯, 그 역시 책을 진행시킨다.

인간 존재를 이루는 것 중 하나는 기억이다. 이는 당연히 자아를 기반으로 한다. 이 자아는 육체적인 감각에 의존하고 형상화 된다. 모든 인간은 자신을 서사적으로 파악하는데 이때 ‘나’는 육체를 지닌 한 사람의 등장인물로 존재한다. 주인공의 몸이 달라진다면 그는 이전의 주인공과는 다른 존재가 된다. 따라서 전뇌화는 한 존재의 변형이지, 이전이 될 수 없다. (이런 사고에 대한 사고 실험적 결론을 제시하는 것이다.) 또한 으레 사후적으로 판단하는 인간의 경향을 고려한다면, 탈 것(육체)의 변화가 낳은 자아의 변화는, 이전의 기억 자체를 다시 변혁시킨다. 갈아탄 탈 것은 이전의 탈 것에 대한 기억을 변이시킨다. 책이 된 최초의 순간 백 퍼센트 온전히 의식 정보가 전이되었다는 가정을 받아들이더라도 말이다. 변질은 숙명이다.

독자(레오)가 정해진 계산식을 통해 이 책의 숫자 배열을 바꿀 순 있어도 책이 된 시점에서 배열되어 있던 숫자 자체를 마음대로 하지는 못한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나는 이것이 자아에서 일종의 본능적이고 유전적인 것, 혹은 그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질서의 일부라고 파악했다. 앞서 언급했듯 이것은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면서 언제든 바뀔 수 있는 유동적인 것이다. 또 기록적인 것이다. 혹은 기록적인 모든 것에 대한 비유이기도 하다. (이것은 역사 자체일 수도 있다.) 이때 자아는 당연히 육체적이다. 육체 역시 기록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육체 자체는 (화재에 의한 책처럼) 훼손되기 쉬우며, 그럴 경우 돌이킬 수 없다.

음흉한 계획의 설계자였던 알 라시르의 생각은 의아했다. 책은 항상 ‘보존’되고 ‘유지’될 수밖에 없는 숙명을 지니고 있다. 영생을 바란다지만, 백 번 양보해서 책이 스스로 사고할 수 있다고 한들, 감각이 없다면 책은 기존의 정보만을 가지고 추론하고 추측하는 행위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 모든 정보가 사실은 나의 안에 이미 존재한다는 신비주의적인 견해도 있지만 과학적으로 증명된 바는 없고. 한편으로는, 알 라시르의 사고 방식이 주관적 지식의 정점에 다다라서(그렇다고 생각을 해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한 사람이나 베타적인 사람을 떠올리게 했다.

이것은 알 라시르가 네메시우스에게 한 말을 통해 드러난 영생에 대한 관념과는 모순된다. 물론 이론적으로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책은 ‘읽히는 행위’를 통해 의도와 상관없이 계속해서 변하는 숙명을 갖고 있다. 시그눔을 발생시키기 위해서는 이 독서 행위가 필요하며, 따라서 독자가 있는 한 시그눔은 계속해서 발생할 수 있으니 영생이라는 말은 틀린 것만은 아닐 거다. 비록 그것이 육체를 지닌 인간으로서 영생과는 다른 개념이겠지만. 시그눔을 발생시키는 것이 타인의 의지나 질문에 의존된다는 반쪽짜리 자유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만 고려한다면 영생은 영생이다. 책이 언제든 불태워질 수 있다는 점만 빼면 말이다. 책 역시 물질인 이상, 장엄한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의 운명처럼 조건 지어진 영생임은 더 강조할 필요 없다. 알 라시르는 네메시우스와 대화에서 자신이 영생이 끝없이 시그눔을 생성하는 과정이라고 했지만, 모순되게도 책이 됨으로써 시그눔 수용체로서 육체를 상실한 셈이 됐다. 즉 인간임을 포기했다.

책이 됨으로써 알 라시르는 자신이 네메시우스에게 설명했던 것처럼 ‘빛이 사물에 부딪쳤다가 망막에 맺힐 때, 뇌에서 발생하는’ 시그눔을 더 이상 수용하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인간은 다른 사람과 만나고 대화하고 싸우고 결혼하면서, 자신의 뇌 속 시그눔을 늘려간다. 이를 경험적 지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경험적 지식은 새로운 지식을 일깨우는 자극제가 될 수 있다. 이 과정은 다시 추론을 낳는다. 소설에서는 이것의 양적 측정을, 알 라시르가 자신과 네메시우스의 쪽 수를 앞서 실험으로 희생됐던 하인들과 비교하는 데에서 드러낸다. 네메시우스의 지식은 약 3000페이지의 분량으로 요약, 변형된다. 소위 뇌의 주름이 많을수록 지혜롭다는 생각은 차치하고, 시그눔을 받아들이는 것이 한 인간을 변화시키고, 그것은 다시 다른 시그눔에 대한 자연적인 갈망을 낳는다는 생각은 명백해 보인다. 그렇다면 알 라시르가 생각한 영생에는 자아를 제외한 세계가 소실되어 있고 그와 상호작용함으로서 진보하는 자아도 없게 된다.

개인적인 동기로 근래 나는 ‘진정한 자아’라는 아름다운 말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많은 교훈적인 콘텐츠에서 나오는 그 말이다. 예를 들어 미국의 하이틴 드라마에서, 늘 존재감 없이 무시당하던 여자아이가 친구들의 시기, 질투를 극복하고 연말 프롬퀸이 된 자리에서 말한다. “이런 거 필요 없어요. 저는 여태 제가 프롬퀸이 되고 싶어 하는 줄 알았지만, 아니었어요. 이런 건 제 진정한 모습이 아니었던 거예요.” 감동적인 말이긴 하지만, 그리고 진정한 자아를 찾으면, 행복의 파랑새를 찾으면 우리는 행복해질 거라는 건 환상일 수밖에 없음을 다들 잠재적으로 알고 있다. 모든 욕망은 타인의 욕망이고, 당연히 프롬퀸에 대한 욕망은, 그녀가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고 싶어하는 들끓는 청춘의 한복판에 있지 않았으면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그녀가 원래부터 눈에 띄는 육체를 갖고 있었어도 그건 당연한 조건이 되었을 것이고. 프롬퀸에 대한 욕망은 소녀가 욕망할 수밖에 없는 육체를 갖고 있기에 탄생했다.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진정한 나’라는, 이 요상한 단어는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나’, 혹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의미할 것인데, 그렇다면 내게 떠오르는 것은 다음과 같다. 누군가의 눈치나 법적인 제재에 구애받지 않고 어떤 본능대로 살아가는 나. 혹은 외부 자극들의 집합인 기억의 축적으로서 지각 없이 살아가는 나일 것이다. 그것은 자동적으로 새로운 시그눔을 발생시키는 삶이며 질문이 없는 삶이다. 진정한 자아는 자신히 저항감을 느끼지 않는 일종의 상태일 것이기 때문이다. 후자는 그래도 선택의 여지가 있겠지만 최근 행동경제학 등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의식 대부분을 점령하고 있는 감정적인 반응들은 대개 무의식이라고 분류될 영역에서 수행되고 있으며, 이성적으로 분류하고 계산하는 영역은 거의 내내 잠들어 있다는 모양이다. 질문하지 않으면 고통받지 않는다. 만약 진정한 자아가 자아 성취의 연속이라고 해도 그것은 도착할 수 없기에 신기루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차피 이것 역시 현재 상태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질문과 같고 끝없는 갈증과 같다. ‘진정한’ 자아는 없다. 자아는 항상 조건지어지고 맥락에서 벗어나기 힘든, 내재적인 것이다.

가끔은 나와 내 선택, 모든 것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읽히는 텍스트처럼 연속적인 것으로 보인다. 네메시우스가 태어날 때부터 부자였던 것이, 그가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아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에 버금가는 지식의 요람을 만들고자 결심하게 된 것이, 알 라시르의 연구에 흥미를 느껴 유대인 캐러밴들과 사막을 건너게 된 것이 모두 연속적이고 거스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소설이기에 이 모든 것은 작가의 구상 속에서 탄생했지만, 그것 자체가 현실의 비유처럼 느껴진다. 생각보다 자유의지라는 것은 불확실한 것이다. 질문을 하면 깨어 있는 사람이 되지만 영원히 고통스러울 것이다. 질문은 욕망이다. 이 알레고리적인 소설을 현실에 가져온다면 우리 각자는 매번 새롭게 쓰이는 책이라고 할 것이다. 그것도 타인에 의해 읽히면서, 자신의 욕망을 새롭게 낫고 대답하게 추동되어지는 불완전한.

다만 우리는 통속의 뇌 그 자체는 아니고, 정도는 세계와 맞닿아 있는 뇌일 것이다.(이것도 장담은 할 수 없다.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감각이 살아 있다는 게, 우리 각각이 매순간 새롭게, 신선하게 맥동하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지도. 냉소적이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나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능력에 대해 회의적이다. 경험은 한계가 있고 그건 육체의 한계성과도 닿아 있기 때문이다. 『죽음과 지혜의 책Ⅰ』이 Ⅱ, Ⅲ, Ⅳ, Ⅴ... Ⅹ, Ⅺ권까지 계속 쓰이는 가장 쉬운 방법은(혹은 3000페이지가 아니라 그 이상의 두꺼운 책이 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숫자 배열을 갖기 위해서는) 세계와 맞닿는 범위가 넓은 육체를 새롭게 창조하는 편이 빠를지도 모른다.)

사사키 아타루는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에서 책 한 권을 소화하는 일의 엄중함에 대해 역설한 바 있다. 모든 책들이, 작가의 두뇌를 자르고, 목숨을 담보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 내용을 받아들이는 것이, 독자 자신의 정신을, 그래서 세계를 통째로 바꿔놓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혹은 그래야만 한다는 것을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교훈이 적지 않다. 현실에서도 1950년부터 일본 고베 사립 ‘나다’(중)학교에서는 나카 간스케의 ‘은수저’를 3년에 걸쳐 천천히 깊게 읽는 실험적인 독서법을 실시해서 사회 각계층의 훌륭한 인재를 길러낸 전례가 있다.

레오는 네메시우스를 이해하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 조금 더 확장한다면, 독서는 자신을 변혁시키는 과정이고, 이 변혁은 세계(관)를 변혁시키는 순환을 낳는다. 따라서 책과 독자의 관계는 개인과 세계의 관계에도 적용된다.(동시에 타인과 타인이 만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익도 하다. 대화는 증발되기 마련이다. 반면 책은 언어라는 한계성에도 불구하고 레오가 그랬듯 오랜 시간과 공을 들이면서 비교적 자유를 한 뼘 확장시킨다.) 어디 그뿐인가. 단순 비교는 어렵겠지만 한 권의 책, 한 사람을 이해하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또 이 소설은 혹은 한 사람을 한 권의 책이라고 할 때, 그와 관계 맺기에 대한 윤리적인 문제 제기, 문제 의식에 대한 비유로도 읽을 수 있겠다.

한평생을, 한 권의 책을, 혹은 한 사람을 이해하는 데 사용한 레오의 곁을 묵묵히 거드는 우고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다. 그는 태엽장치를 다루는 데에 뛰어난 감각이 있는 장인으로, 처음에 레오에게서 원리를 배울 때, 성부, 성자, 성신의 비유를 통해 학습한다. 이에 관해 레오는 어디까지나 태엽을 움직이는 것은 우고의 지식일 뿐이지, 그가 이것을 성부 태엽, 성자 태엽, 성신 태엽 등으로 부른다는 것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허나 이 비유적인 방식이 과연 실제로 태엽이 작동하는 방식과는 무관할까? 우고는 레오의 시선에서만 관찰되기 때문에 그의 심리는 알 수 없지만, 나는 비유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 사실은 실체와 멀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책에 쓰인 텍스트가 결국 현실에 대한 대체물인 것처럼 이 비유 역시 그렇게 읽힌다면 과장일까. 문학을 존중하고 싶은 사람으로서 나는 우고의 사고방식이 현실과 문학의 관계에 대한 알레고리로도 읽혀서 먹먹한 지점이 있었다.

레오는 죽기 전 네메시우스와 알 라시르의 책을 합본으로 만든다. 그게 악한 인간 알 라시르에 대한 최고의 복수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합본을 통해 끊임없이 대화를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로 만든 것이다. 우고의 오토마톤이 있는 한 계산식은 끊임없이 쓰일 테고, 대화가 끝나는 순간은 쉽사리 오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내밀함을 지키고 싶어하는 알 라시르의 소원은 아마 지켜지지 않을 것이다. 이제 다시는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을, 자신의 희생자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속내를 들키고, 비밀을 내놓아야 하는 형벌은 꽤 끔찍하게 보인다. 적어도 그 당사자에게는 말이다.

그밖에 떠오르는 것들은 많지만 적당히 마무리 짓자면, 역사상 가장 거대했다는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의 사라진 책들과, 종래에 소실된 『죽음과 지혜의 책Ⅰ』의 원본은 기록되지 못한 역사나 기록되었으나 소실된 역사를, 지식을 떠올리게 하며, 한 발 나아가 땅 위에 존재했던 (기록되지 못한) 무수한 인물들의 일평생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레오나르도 브라촐리니’가 죽고, 우고도 죽고, 그의 후손들이 유지하던 오토마톤 계산 작업도 그리 오래가지 못하고 허물어진다. 이는 시간이라는 장대한 것 앞에서 스러지는 인간의 모든 것을 연상시키며, 신화적인 비극, 허무함을 느끼게도 한다. 모두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같은 마무리긴 하지만, 그리고 교훈을 좋아하진 않지만 모든 것은 시간 앞에서는 모든 것이 무용하다, 인간은 유한하다, 라는 교훈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인간이기에 느끼는 서정에 가깝다고 믿기에 그래도 부담이 적었다.

정리하자면, 김필산의 소설 「책이 된 남자」는 알레고리적이다. 물질로서 뇌와 정신, 기계장치와 영혼, 작가와 독자(의 관계), 기록과 해석, 소실과 현전, 감춰진 것과 드러난 것, 실체와 비유 등. 아이작 아시모프의 「최후의 질문」 같이 어떤 종류의 좋은 SF소설이 흔히 ‘미래적 신화’라는 말로 표현된다는 점을 떠올리게 한다. 이 소설은 또 (같은 5회 수상작인 「블랙박스와의 인터뷰」(김혜윤, 우수작)’처럼) 자아와 육체의 상관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나는 개인적인 동기에 의해서 이것에 관해 관심이 있고, 따라서 그것을 중심으로 읽어보려고 했었다.

그러나 물론 이 소설을 리뷰 한 이유는 사실 소설적인 재미 때문이긴 하다. 주인공의 운명에 대한 궁금증, 사악한 의도를 지닌 자에 대한 경악, 한 인물에 대한 복합적인 평가, 현실을 떠올리게 하는 다양한 사건과 묘사 등 말이다. 그러나 그 밖에도 많은 것들을 떠올리게 하는 소설이기도 했다.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어떤 내재적 논리로 진행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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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시간 - 느리게 사는 지혜에 관하여
토마스 기르스트 지음, 이덕임 옮김 / 을유문화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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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기르스트, 『세상의 모든 시간(부제 : 느리게 사는 지혜에 관하여』


※ 본 포스팅은 을유문화사의 서평 이벤트의 일환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이 책은 '느리게 사는 지혜에 관하여'라는 부제가 말하고 있듯 시간을 들여 만든 것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목차를 보면 알 수 있듯 '타임캡슐'처럼 익숙한 것부터 'ASLSP' 같은 생소한 실험 음악에 대한 것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시간을 많이 들인다는 건 노력을 많이 쏟는다는 말과 비슷하면서도 다릅니다. 노력이라고 하면 어쩐지 없는 것까지 짜내는 것 같다, 라는 것은 저만의 인상일까요. 책의 후면에 "모든 가치 있는 일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밥 딜런의 말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이 책의 '주제'를 묻는다면 이것보다 적절한 것은 없을 듯 합니다.

 

그가 소개하고 있는 많은 것들이 '예술품'이라는 것으로 분류될 수 있거나, 그것에 상응하는 가치를 지닌 것입니다. 예술에 관해서는 여러 생각이 있습니다. 저는 예술이 인생보다 길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영원하다고는 더욱 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 개인적인 정의는 그렇습니다. (예술작품에 내재된) 예술성은 그것을 만든 사람의 정신을 상상할 수 있는 데에 있다. 예술은 인공적인 것입니다. 자연적인 것을 모방하더라도 완전한 모방은 불가능하고, 결국은 그것을 모방하고자 하는 인간의 정신과 기술 등에 초점이 있습니다.

 

저는 책을 이렇게 읽었습니다. 저자가 소개하고 있는 많은 시간을 들여 만들거나, 만들어지고 있거나, 만들어진 작품들은 그것을 만들어낸 자의 정신을 담아내고 있다고요. 모든 것이 빨리, 빨리, 를 외치고, 누군가의 말대로 같은 (짧은) 시간에 누가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느냐가 유능함의 조건이 된 시대에, 저자의 생각은 좀 구태의연해 보이기도 합니다. 앞서 예시를 들었던 조선시대 선비의 일화처럼, 요즘의 관점에서 보면 굉장히 시대착오적인 것, 도태된 자의 불평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는 시간을 초 단위로 정밀하게 분절해서 사용하는 시대에 너무 익숙해졌기 때문입니다.

 

시간에 대한 것도 그렇습니다. 저자가 말하고 있듯 정밀하게 분절된 시간을 사용하는 세계관을 갖게 된 것은 근대화가 시작되고, 산업혁명, 즉, 인간을 기계의 부품처럼 사용하면서, 그들의 작업량을 시간을 통해 측량하려는 시도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역사로만 따지면 그렇게 오래되지 않은, 낯선 생활방식이라는 것이죠.

 

저자는 자신의 생각을 군데군데 말하고는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목록들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1세기가 넘도록 풀리지 않은 수학 난제나 '블랙 스완' 같은 철학적이면서도 경제적, 사회적인 비유를 들기도 하고, 심지어는 별로 예술과 거리가 멀어보일 뿐만 아니라 큰 의미도 없어 보이는 역청 실험을 소개하고 있기도 합니다.(엄청나게 긴 시간을 들여서 한 방울의 물이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도록 설계된 - 피치 드롭 실험) 시간에 쫓기고, 또 적응하면서 살고 있는 '보통의' 사람들의 눈에는 기이하고 괴짜처럼 보이는 일들도 많습니다. 무의미해 보이기도 하구요. 아무리 우리가 오래 산다고 해도 1세기 이상을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많은 것들은 최소 1세기는 넘어야 이름을 실을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의 삶을 아득히 초월하는 시간을 상상하게 만듭니다. 괴짜 같다고 했지만 이들을 보고 있자면 이상한 경외심이 듭니다.

 

우체부 슈발은 33년간 돌멩이를 주워 집으로 오면서 '궁전'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관광 명소가 되기도 했죠. 이들과 이들의 작품에서 경외를 느끼게 되는 것은, 그것들이 아득한 시간을 상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제가 예술에서 느끼는 아름다움도 그런 것입니다. 고뇌 끝에 써내려간 한 문장이 감동적인 것처럼, 엄청난 양의 시간을 상상하게 만드는 작품들 역시 압도적인 감동을 줍니다. 시간에 맞춰 산다는 것은 시간의 체계 안에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시간은 보이지 않습니다. 누군가 말했습니다. 인생은 돌이켜 봤을 때 의미를 가지고 그 자리에 서 있다고. 시간은 우리와 함께 발 맞춰 걸어가기 때문에 인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간과 부대껴 살고 있지만 한 번도 시간을 만질 수 없죠. 그것은 오직 돌이켜 봤을 때만 가능합니다.

 

많은 예술가들이 그걸 알고 있었습니다. 예술가들의 작품은 시간이라는 무형의 것을 실체화시키는 한 수단이기도 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 자신을 정확히 바라보고 반성하게 됩니다. 아무래도 제 관심사가 문학이다보니 프루스트와 조이스 같은 작가들에 대한 일화가 눈에 띄었습니다. 프루스트의 책은 읽어볼 엄두도 못 내고 있지만 좋았던 저자의 말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프루스트의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을 우리가 함께 살아보는 것이다."

 

참 적절한 말입니다. 가령, 자가 지망생이, 등단을 하겠다고 언제까지 몇 권의 책을 읽고 몇 편의 글을 쓰겠다는 생각은 저자의 방식으로 말하자면, 짧은 시간에 많은 행위를 하겠다는 것과 동일합니다. 마치 수능을 앞두고 문제집 몇 권을 풀겠다, 라는 수험생처럼요. 알게 모르게 그런 사고방식은 우리 일상에 많이 녹아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문학이 진정 예술이라면 그런 것과 달라야 하지 않을까요?

 

저자는 요즘 예술가들의 세태를 비판하면서(뒤샹의 일화를 통해), 빨리, 빨리, 가 당연해진 시대에는 예술 작품조차 빨리, 빨리 생산되고 소모된다고 아쉬워 하고 있습니다. 팝 아트 같은 것도 있고, 예술의 장르는 다양하기 때문에, 지금 저자의 말도 예술을 규정 짓고 한계 짓는 한 가지일 수도 있지만 저는 이 말에 아주 공감을 했습니다. 그래서 설득력 있게 들렸구요. 저는 그래서 시간을 견디는 타임캡슐 같은 것도 예술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의 구성이 많은 경우 예술품으로 된 것도 그런 의도에서 읽혔습니다. 우리가 예술을 하고, 그것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이유, 그것은 일종의, 우리 존재의 본질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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