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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진보 - 카렌 암스트롱 자서전
카렌 암스트롱 지음, 이희재 옮김 / 교양인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마음의 진보]

완독. 너무 너무 재미있게 읽었다.지금 가지고 있는 신앙에 극심한 고통과 회의를 느끼고 있다면 한번쯤 읽어 볼만하다. 다만 주의사항은 맨 뒤 100p를 읽지 않고 앞의 환속하는 부분만 읽으면 저자의 서술대로 그냥 지루한 종교 비판, 잠깐의 시시껄렁한 험담 정도가 되어 버린다.(또는 너가 종교를 떠날 비참한 실마리 정도..)

이 책의 진가는 저자가 400페이지가 훨씬 넘게 서술한 자신의 수녀 생활동안 형성된 육체와 정신의 속박에서 고통스럽게 벗어나는 것에 카타르시스를 느끼거나 종교에서 탈각된 비진리의 부스러기를 보며 비웃는 것이 아니라 뒷 부분 100페이지 가량의 유대교, 가톨릭, 개신교, 불교 등의 진리 탐구를 통해 종교가 제시하는 ‘황금률’, ‘공감’, ‘몰아’ 등을 깨달아가는 과정에 있다. 그리고 T.S 엘리엇의 시 <재의 수요일>을 자신의 삶을 통해 깊게 이해해가는 과정에 가치가 있다.

저자는 오히려 신학이 자신의 생을 끌어 올린다고 서술한다. 또한 좋은 신학이란 따뜻하고 마음이 넓어져서 사랑을 베푸는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라 정의한다. 그리고 신앙은 결국 인생이 아무리 비극적으로 보여도 거기에는 궁극적으로 의미와 가치가 있다는 신념을 키워 나가는 것이라 말한다. 자기 자신은 정토 교리를 받아 들이지 않기에 무신론자, 무종교라 말하지만 그는 이미 종교와 신을 찾고 있다 다만 그것을 종교나 신이라 부르지 않기로 자신이 선택했을 뿐이다. 나는 최근 종교학 관련 서적을 읽으며 내가 믿는 종교에 대해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생각한다. 저자가 어느 종교든지 자신의 아픔을 맨 위에 놓고, 그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고 말한다. 현실을 재대로 보지 못 하면 올바르게 살 수 없고, 그것 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스스로의 아픔을 부정하는 사람일수록 남의 아픔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 쉽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결국 모든 종교는 ‘공감’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자신의 아픔을 제대로 깨달을 수록 타인의 아픔을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내가 받고 싶지 않은 고통을 타인에게 주지 않는 ‘황금률’을 실천하게 된다. (*기독교의 경우 긍정적 ‘황금률’, 내가 받고 싶은 것을 남에게 주라.)

이렇게 하기 위해서 모든 종교는 자신의 ‘자아’를 포기하라고 권유한다. 그러한 탈자아를 통해 내 자리에 타인을 받아 들일 수 있게 된다. 믿는다는 뜻을 가진 영어는 ‘believe’의 고어는 ‘beleven’ “사랑한다”라는 뜻이며 라틴어 크레도는 코르 도(나의 심장을 바친다)에서 나왔다고 한다. 결국 믿음이란 명사가 아니라 동사인 것이다.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몇가지 핵심 교리를 받아들이는 것 ‘믿는’것에 중점을 두는 것은 잘 못되었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종교는 ‘믿음’보단 ‘실천’에 그 뜻을 둔다.

저자도 내내 자신의 수녀원 규율이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속박한 것에 상처받았다는 것을 서술했지만 뒷 부분에 유대교와 이슬람교 사람들이 자신의 모든 행동에 ‘성스러움’을 담기 위해서(삶 안에서 신과 함께하기 위해) 형식을 율법화한 이유를 깨닫게 된다. 결국 형식에 내용이 담긴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전통적 규율을 맹목적으로 받아 들이는 것이 아니라 왜 선진들이 그러한 형식을 쌓아 올렸고 그 형식 안에서 신과 함께 했는지에 대하여 끊임 없이 질문하며, 깨닫고 익혀야 한다고 조언한다.

마지막으로 마음의 진보 너무 좋은 책이라 생각한다. 특히 믿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종교와 신앙생활에서 비본질적인 요소가 무엇인지 한번 쯤 돌아볼 만한 여백(당혹)을 준다는 점에서 아주 훌륭한 책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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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사는 이유 - 카르페 디엠, 시간의 의미를 기억하라
오스 기니스 지음, 홍병룡 옮김 / IVP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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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세계관에서 시간을 어떻게 바라보고 적용하여
‘오늘을 붙잡는지’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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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사는 이유 - 카르페 디엠, 시간의 의미를 기억하라
오스 기니스 지음, 홍병룡 옮김 / IVP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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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사는 이유 _ 오스기니스

작년에 북클럽에서 회의하는 용기를 읽고 1년만에 오스기니스 책을 다시 손에 잡았다. 개인적으로 오스기니스의 책은 친절하진 않은데, 항상 읽으면서 저자의 통찰력에 감탄하게 되는 것 같다. 처음에는 번역이 잘못되서 그런건가 싶었는데 같은 저자 책을 3권째 읽다보니 원래 글을 쓰는 방식이 이렇구나 이제는 이해하고 알아서 논지 전개를 정리하면서 읽게 된다.

처음 접한 책은 ‘회의하는 용기’ 였고 그 책에서는 회의를 믿음과 불신 사이에서 흔들리는 두 마음으로 정의하고 회의를 9가지로 분류 한다. 그 다음 ‘소명’에서는 소명이란 우리의 직업이 선교사,목사가 되는 것이라기 보다 나를 불러주신 하나님을 바로 알아가는 것이다. 곧 소명(call)이란 하나님(caller)과 친밀한 관계로 초대하는 것이며, 그렇게 부름 받은 나의 소명은 하나님을 위해서 생각하고, 발언하고, 행동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존재에서 행위로 나아가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라고 말한다.

‘오늘을 사는 이유’에서는 현대시대에 중요해진 “시간”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시간의 3가지 주요 개념인 1)순환적 시간관, 2)언약적 시간관, 3)연대기적 시간관을 서술하며 시작한다.

첫번째 순환적 시간관은 아브라함계열 종교를 제외한 동양및 서양 전반에서 받아들인 관점이다.
순환적 시간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감각 가능한 자연에서 모티브를 얻었기에 상당히 보편적인 시간관이다. 시간은 순환하며 우리 인생 역시 연속적인 환생을 경험하게 된다. 순환론적 시간관에서 인생은 바퀴에 매인 삶이며 인간이 참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이 세계,순환하는 역사안에서 초월하는 수 밖에는 없다. 세계와 역사가 환상에 불과하기에, 역사 속에서 우리가 취하는 행동은 의미가 없다. 그래서 흰두교는 요가를 불교에서는 마음챙김,명상 등을 구원의 길로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두번째 언약적 시간관은 성경적 시간관이다. 이는 매우 독특한 시간관으로 시스템 내부에서 그 시스템을 이해한다고 주장하지 않는 유일한 입장이다. 순환론적 시간관과 대조적으로, 이 관점이 성찰이 아닌 계시의 결과라고 주장한다.그러므로 이 진리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주권적 자유가 있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들 역시 자유롭다는 사실이 놓여 있다. 인생, 즉 시간과 역사에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중요성이라는 한 쌍의 진리 아래, 시간과 역사는 어디론가 가고 있고, 우리 각자는 본질적으로 중요한 존재일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삶과 세대, 나아가 전체 역사 안에서 담당할 독특하고 중요한 역할이 있다.

동양 종교들이 자유라고 여기며 옹호하는 “역사로부터의 탈출”이 아니라, 성경의 관점에서는 자유와 책임은 곧 역사에의 참여와 인생이 세상에서 자유와 정의와 샬롬을 위해 일하겠다는 신념이 된다. 언약적 시간관안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세계를 위해 하나님과 손잡는 협력자가 되어, 시간을 직선적일 뿐 아니라 언약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언약적이기에 우리에게는 시간과 역사 속에 살며 행동 할, 그리고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 할 자유와 책임이 있다.

세번째 연대기적 시간관은 직선적이고 언약적인 시간이되 하나님,초월성,영원성,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잘라 낸채 세속화된 시간이다. 중요한 차이점은 언약적 시간관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보고 그렇게 될 것을 아시는 것인 데 비해, 후자에서 의미는 인간들이 보고 세유려 애쓰는 것이다. 이 차이점은 연대기적이면서 직선적인 시간의 지지자들을 낙관론과 비관론 두 진영으로 나뉘게 된다. 연대기적 시간관은 중요한 의미나 연속성 없이 그저 순간들만 끊임 없이 흐르는 시간들로 채워진 인생관을 만들어 버리기에 인간의 정체성이 뿔뿔이 흩어져 버리기 쉽고, 밀란 쿤데라의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처럼 인간 존재를 가볍게 만들어 버리기 십상이다. (쿤데라에 의하면 일회성은 가벼움, 영원성은 무거움이기 때문이다.-반대개념으로 인생을 너무 무겁게만드는 니체의 ‘영원회기’가 있다.)

상기 3가지 관점을 설명한 것이지만 개인적으로 각 시간관을 대조시켜 성경적 시간관의 장점을 부각시켰다 생각한다.즉 언약적시간관의 특징인 역사안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기위해 위 세가지 시간관을 대조 시켰다고 생각한다. 최근에 공리주의에 대해서 읽었을때 벤담의 공리주의와 존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의 차이점(고급욕구와 저급욕구 분별)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느끼고 감동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차이점은 차이를 만든다. 첫째를 선택해서 역사와 인생에 의미가 없어서 세상을 초월할 것을 선택하느냐 셋째를 선택해서 인생의 가벼움안에서 자신을 어딘가 정초시키지 못한채 정체성을 일어갈 것인지, 니체처럼 과도한 존재의 무거움을 얻을 것인지 중 선택하라면 나는 당연히 대부분 언약적시간관을 선택할 것이라 생각한다.

이후 저자는 현대식 시계 시간관의 압박과 독재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개그우먼 장도연이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라는 말을 유행시킨 것처럼 현대 사회는 과도한 효율성을 추구하고 있다. 이러한 압박은 우리에게 시간은 돈이라는 인식을 하게 만들었고 이러한 일상 언어에 뿌리박힌 표현들이 우리의 시간관을 형성하고, 따라서 은연중에 시간 자체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지시하고 주조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현대인들은 ‘카르페디엠’- 오늘을 붙잡는 것을 대부분 이기적이고 단기적이고 순전히 즉흥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스기니스는 성경적 또는 언약적 시간관에서 ‘카르페디엠’은 더 확실한 토대와 더 강한 추진력, 더 높은 비전이 있다 주장한다. 언약적 시간관에서 ‘과거-현재-미래’는 통전적이다. 회개와 용서는 과거의 견지에서 시간을 구속하는 일의 열쇠이고, 안식일 및 안식 기간은 현재의 견지에서 시간을 구속하는 일의 열쇠다. 즉 성경적 시간관을 사는 우리에게 오늘의 선택은 과거와 미래에 영향을 미치는 의미 있는 선택임으로 오늘을 붙잡는 것, 인생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 삶의 의미를 깨닫는 것은 분리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오스기니스는 그리스도인에게 언약적 시간관, 오늘을 붙잡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서술하며 이와 다른 시간관이 주도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시대를 역행하는 ‘선지자적 반시대성’ 가질 것을 권면한다.

마지막으로 오스기니스는 자신의 가족사를 서술한다. 19세기 말 청나라 의료 선교사로 중국을 섬기는 것을 특권이라 여기며 감사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의료 선교사이자 순교자인 할아버지 묘가 문화혁명 때 홍위병들에게 파헤쳐지는 일도 겪었고, 2차세계대전 때 부모님이 중국에 고립되어 일본군과 공산군과 국민군에 둘러싸이는 상황도 겪고 심각한 기근과 장제스의 무자비한 정책속에서 두 형제를 잃는 고통도 겪었다 그러나 오스기니스 가정은 고난 속에서도 항상 감사를 잃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에 중국에 공산당이 집권하고 부모님이 중국에서 쫃겨났을 때도 중국을 향한 선교의 꿈을 접지 않았다. 이러한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했던 오스기니스 가정이 존경스럽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며 위로와 격려와 앞으로 나아갈 힘을 주신 성령께 감사하다.

회의하는 용기 마지막 장 주님 언제까지 입니까? 에서 처럼 우리에겐 가끔 이유를 알 수 없는 극심한 신앙의 시험이 찾아 올때가 있고 그럴 때 우리는 기다림이란 회의의 문제와 부닥치게 된다. 여기서 오스기니스는 이야기 한다. 인간의 근시안 적인 시각과 생각에 머물지 말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바라보라고 기독교 역사에서 아타나시우스가 정통이 결국 승리 할 것을 알 수 있었겠냐고 우리에게 묻는다. 그렇다 사실 기독교 역사 안에서 지금의 정통은 그 시대상황에서 항상 우세했었기 때문에 승리한 것이 아니였다. 참 교회와 신자는 거의 항상 어두움속에서 빛을 바라봐야 했었다. 오스기니스는 끝은 끝이 아님을 역설하며 우리에게 성어거스틴의 ‘하나님의도성’을 인용한다. “인간의 도성은 항상 줄줄이 무너지겠지만 하나님의 도성은 영원하다.” 이 고백을 자신의 가정사와 기독교사, 신국론을 통해 우리에게 소망과 희망을 이야기 하며 책을 마무리 하게된다.

‘오늘을 사는이유’ 요약및 서평을 마무리하며 간단한 소감은 역시 오스기니스 였다. 항상 그가 제시하는 통찰과 위로는 나에게 큰 방향성이 된다. 꽤 오래 동안 한국교회의 현실에 대해서 회의하고 있고, 오늘날의 어둠속에 압도되어 지식적으로 빛을 바라봐야함을 알고 있음에도 어둠속에서 허우적대는 나를 보며 안타까워 하고 있을 때 다시 한번 생각을 가다듬고 빛으로 나아갈 에너지를 그의 책을 통해 얻게 되었다.

기독교 세계관에서 시간을 어떻게 바라보고 적용하여 ‘오늘을 붙잡는지’ ,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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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사는 이유 _ 오스기니스

작년에 북클럽에서 회의하는 용기를 읽고 1년만에 오스기니스 책을 다시 손에 잡았다. 개인적으로 오스기니스의 책은 친절하진 않은데, 항상 읽으면서 저자의 통찰력에 감탄하게 되는 것 같다. 처음에는 번역이 잘못되서 그런건가 싶었는데 같은 저자 책을 3권째 읽다보니 원래 글을 쓰는 방식이 이렇구나 이제는 이해하고 알아서 논지 전개를 정리하면서 읽게 된다.

처음 접한 책은 ‘회의하는 용기’ 였고 그 책에서는 회의를 믿음과 불신 사이에서 흔들리는 두 마음으로 정의하고 회의를 9가지로 분류 한다. 그 다음 ‘소명’에서는 소명이란 우리의 직업이 선교사,목사가 되는 것이라기 보다 나를 불러주신 하나님을 바로 알아가는 것이다. 곧 소명(call)이란 하나님(caller)과 친밀한 관계로 초대하는 것이며, 그렇게 부름 받은 나의 소명은 하나님을 위해서 생각하고, 발언하고, 행동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존재에서 행위로 나아가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라고 말한다.

‘오늘을 사는 이유’에서는 현대시대에 중요해진 “시간”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시간의 3가지 주요 개념인 1)순환적 시간관, 2)언약적 시간관, 3)연대기적 시간관을 서술하며 시작한다.

첫번째 순환적 시간관은 아브라함계열 종교를 제외한 동양및 서양 전반에서 받아들인 관점이다.
순환적 시간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감각 가능한 자연에서 모티브를 얻었기에 상당히 보편적인 시간관이다. 시간은 순환하며 우리 인생 역시 연속적인 환생을 경험하게 된다. 순환론적 시간관에서 인생은 바퀴에 매인 삶이며 인간이 참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이 세계,순환하는 역사안에서 초월하는 수 밖에는 없다. 세계와 역사가 환상에 불과하기에, 역사 속에서 우리가 취하는 행동은 의미가 없다. 그래서 흰두교는 요가를 불교에서는 마음챙김,명상 등을 구원의 길로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두번째 언약적 시간관은 성경적 시간관이다. 이는 매우 독특한 시간관으로 시스템 내부에서 그 시스템을 이해한다고 주장하지 않는 유일한 입장이다. 순환론적 시간관과 대조적으로, 이 관점이 성찰이 아닌 계시의 결과라고 주장한다.그러므로 이 진리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주권적 자유가 있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들 역시 자유롭다는 사실이 놓여 있다. 인생, 즉 시간과 역사에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중요성이라는 한 쌍의 진리 아래, 시간과 역사는 어디론가 가고 있고, 우리 각자는 본질적으로 중요한 존재일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삶과 세대, 나아가 전체 역사 안에서 담당할 독특하고 중요한 역할이 있다.

동양 종교들이 자유라고 여기며 옹호하는 “역사로부터의 탈출”이 아니라, 성경의 관점에서는 자유와 책임은 곧 역사에의 참여와 인생이 세상에서 자유와 정의와 샬롬을 위해 일하겠다는 신념이 된다. 언약적 시간관안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세계를 위해 하나님과 손잡는 협력자가 되어, 시간을 직선적일 뿐 아니라 언약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언약적이기에 우리에게는 시간과 역사 속에 살며 행동 할, 그리고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 할 자유와 책임이 있다.

세번째 연대기적 시간관은 직선적이고 언약적인 시간이되 하나님,초월성,영원성,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잘라 낸채 세속화된 시간이다. 중요한 차이점은 언약적 시간관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보고 그렇게 될 것을 아시는 것인 데 비해, 후자에서 의미는 인간들이 보고 세유려 애쓰는 것이다. 이 차이점은 연대기적이면서 직선적인 시간의 지지자들을 낙관론과 비관론 두 진영으로 나뉘게 된다. 연대기적 시간관은 중요한 의미나 연속성 없이 그저 순간들만 끊임 없이 흐르는 시간들로 채워진 인생관을 만들어 버리기에 인간의 정체성이 뿔뿔이 흩어져 버리기 쉽고, 밀란 쿤데라의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처럼 인간 존재를 가볍게 만들어 버리기 십상이다. (쿤데라에 의하면 일회성은 가벼움, 영원성은 무거움이기 때문이다.-반대개념으로 인생을 너무 무겁게만드는 니체의 ‘영원회기’가 있다.)

상기 3가지 관점을 설명한 것이지만 개인적으로 각 시간관을 대조시켜 성경적 시간관의 장점을 부각시켰다 생각한다.즉 언약적시간관의 특징인 역사안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기위해 위 세가지 시간관을 대조 시켰다고 생각한다. 최근에 공리주의에 대해서 읽었을때 벤담의 공리주의와 존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의 차이점(고급욕구와 저급욕구 분별)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느끼고 감동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차이점은 차이를 만든다. 첫째를 선택해서 역사와 인생에 의미가 없어서 세상을 초월할 것을 선택하느냐 셋째를 선택해서 인생의 가벼움안에서 자신을 어딘가 정초시키지 못한채 정체성을 일어갈 것인지, 니체처럼 과도한 존재의 무거움을 얻을 것인지 중 선택하라면 나는 당연히 대부분 언약적시간관을 선택할 것이라 생각한다.

이후 저자는 현대식 시계 시간관의 압박과 독재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개그우먼 장도연이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라는 말을 유행시킨 것처럼 현대 사회는 과도한 효율성을 추구하고 있다. 이러한 압박은 우리에게 시간은 돈이라는 인식을 하게 만들었고 이러한 일상 언어에 뿌리박힌 표현들이 우리의 시간관을 형성하고, 따라서 은연중에 시간 자체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지시하고 주조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현대인들은 ‘카르페디엠’- 오늘을 붙잡는 것을 대부분 이기적이고 단기적이고 순전히 즉흥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스기니스는 성경적 또는 언약적 시간관에서 ‘카르페디엠’은 더 확실한 토대와 더 강한 추진력, 더 높은 비전이 있다 주장한다. 언약적 시간관에서 ‘과거-현재-미래’는 통전적이다. 회개와 용서는 과거의 견지에서 시간을 구속하는 일의 열쇠이고, 안식일 및 안식 기간은 현재의 견지에서 시간을 구속하는 일의 열쇠다. 즉 성경적 시간관을 사는 우리에게 오늘의 선택은 과거와 미래에 영향을 미치는 의미 있는 선택임으로 오늘을 붙잡는 것, 인생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 삶의 의미를 깨닫는 것은 분리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오스기니스는 그리스도인에게 언약적 시간관, 오늘을 붙잡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서술하며 이와 다른 시간관이 주도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시대를 역행하는 ‘선지자적 반시대성’ 가질 것을 권면한다.

마지막으로 오스기니스는 자신의 가족사를 서술한다. 19세기 말 청나라 의료 선교사로 중국을 섬기는 것을 특권이라 여기며 감사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의료 선교사이자 순교자인 할아버지 묘가 문화혁명 때 홍위병들에게 파헤쳐지는 일도 겪었고, 2차세계대전 때 부모님이 중국에 고립되어 일본군과 공산군과 국민군에 둘러싸이는 상황도 겪고 심각한 기근과 장제스의 무자비한 정책속에서 두 형제를 잃는 고통도 겪었다 그러나 오스기니스 가정은 고난 속에서도 항상 감사를 잃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에 중국에 공산당이 집권하고 부모님이 중국에서 쫃겨났을 때도 중국을 향한 선교의 꿈을 접지 않았다. 이러한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했던 오스기니스 가정이 존경스럽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며 위로와 격려와 앞으로 나아갈 힘을 주신 성령께 감사하다.

회의하는 용기 마지막 장 주님 언제까지 입니까? 에서 처럼 우리에겐 가끔 이유를 알 수 없는 극심한 신앙의 시험이 찾아 올때가 있고 그럴 때 우리는 기다림이란 회의의 문제와 부닥치게 된다. 여기서 오스기니스는 이야기 한다. 인간의 근시안 적인 시각과 생각에 머물지 말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바라보라고 기독교 역사에서 아타나시우스가 정통이 결국 승리 할 것을 알 수 있었겠냐고 우리에게 묻는다. 그렇다 사실 기독교 역사 안에서 지금의 정통은 그 시대상황에서 항상 우세했었기 때문에 승리한 것이 아니였다. 참 교회와 신자는 거의 항상 어두움속에서 빛을 바라봐야 했었다. 오스기니스는 끝은 끝이 아님을 역설하며 우리에게 성어거스틴의 ‘하나님의도성’을 인용한다. “인간의 도성은 항상 줄줄이 무너지겠지만 하나님의 도성은 영원하다.” 이 고백을 자신의 가정사와 기독교사, 신국론을 통해 우리에게 소망과 희망을 이야기 하며 책을 마무리 하게된다.

‘오늘을 사는이유’ 요약및 서평을 마무리하며 간단한 소감은 역시 오스기니스 였다. 항상 그가 제시하는 통찰과 위로는 나에게 큰 방향성이 된다. 꽤 오래 동안 한국교회의 현실에 대해서 회의하고 있고, 오늘날의 어둠속에 압도되어 지식적으로 빛을 바라봐야함을 알고 있음에도 어둠속에서 허우적대는 나를 보며 안타까워 하고 있을 때 다시 한번 생각을 가다듬고 빛으로 나아갈 에너지를 그의 책을 통해 얻게 되었다.

기독교 세계관에서 시간을 어떻게 바라보고 적용하여 ‘오늘을 붙잡는지’ ,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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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ucated: A Memoir (Paperback) - '배움의 발견' 원서/오바마 추천도서
Tara Westover / Random House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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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지식적인 책을 많이 읽다보니 무언가를 깨달아서 얻는 희열이나 유익말고 좀 재미있는거 하고 싶다, 즐거운거 하고 싶다는 욕구가 생겨 닌텐도도 다시 잡아보고 북튜버들이 열광했던 테드창의 나의인생이야기,숨도 들여다 봤지만 별 감흥이 없었다. 그러던 중 책지름시즌(아직 안 읽은 책이 쌓여있지만 책을 지르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 또는 아직 못읽는 책을 허세부리기 위해 일단 사는 시즌)을 맞이하였고 사게된 책이 배움의 발견이였다.

읽는 내내 괴로워서 몸이 배배꼬였다.다만 지루하지 않았고 마음속에 엄청나게 많은 감정들 윽,억,헐,아니!!같은 것들이 솟구쳐 올랐다.흥미진진해서 손이 땀이 나는게 아니라 광신도 아버지와 순종적인 어머니 6명의 형제 자매 사이에서 위태위태했던 타라의 어린시절과 많은 사고들이 아찔했다.

공교육을 불신하며 아파도 병원에 가지 않고 어머니의 약초오일로만 치료받는 가족을 보며 안타깝고, 사고가 일어날게 뻔한 환경에서도 아버지가 천사들이 지켜주기때문에 괜찮다는 말을 할때마다 분노가 일어났다.

이러한 가정상황에서 17살이후 처음으로 교육에 발을 딛고 성장하는 타라를 보며 감격하고 그 사이 사이마다 가족의 세상과 교육으로 새롭게 창조된 자신의 세상과의 마찰감으로 인해 괴로워 하는 타라를 보며 참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타인의 눈으로 보았을때 그 곳은 광기어린 미친세상이지만 타라에게 그 세상은 한 때 자신의 전부였고, 보금자리였으며, 가족이였다.

신앙인으로서 근본주의 모르몬교도 아버지의 광신과 잘못된 성경해석 자신의 생각과 다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듯한 과감성! 그리고 점점 그 설교에 대항할 힘을 잃고 남편에게 동조해가는 어머니와 마을 사람들을 보며 이 역시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되었다. (안타깝지만 인간은 연약해서 환경에 굴복할 수 밖에 없고 인간의 정신은 살아남기 위해 현실을 왜곡하고 자기 자신을 속이기 쉽다는 것을 다시한번 알게되다. 하지만 인간은 그러한 환경속에서도 배움을 통해 자신의 세상을 새롭게하고 자신의 본질을 회복할 수 있다는 측면 역시 다시 보게되었다.)

마지막으로 버락 오바마와 모나 심슨의 추천사를 남기며 이 두가지가 나도 이 책을 읽으며 느낀 추천사이다.

"배움을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면서도 자신이 떠나간 세계를 향해 여전히 깊은 이해와 사랑을 보여준다" -오바마

"자아를 찾고, 자신의 가정을 이해해 가는 딸의 이야기.이 이야기가 소설이였다면 훨씬 덜 괴로웠을 것이다."- 모나심슨

#배움의발견#Educ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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