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옳다 - 정혜신의 적정심리학
정혜신 지음 / 해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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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옳다..

책을 다 읽고 일주일이 넘는 기간 동안 틈날 때마다 글을 썼다. A4 10페이지가 넘는 나의 이야기를 계속 써내려갔다. 말 못하게 힘들었던 그 시간들을 쭉 써내려가다가 마지막에 싹 지웠다.
쓰면서 느꼈다. 이제 진짜 괜찮아졌구나.

나는 꽤 오랜 기간 동안 “나”가 없었다. 밝고 씩씩하게 자라왔지만 모든 선택의 기준은 타인이었다. 엄마한테 혼나지 않도록, 다른 사람에게 비난받지 않도록 애쓰며 살아왔다.
거절하는 법도 몰라서 거절할 일이 생기면 이래저래 핑계를 대거나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

나는 엄마가 진짜 무서웠다. 어릴 적에는 엄마한테 혼나지 않는 것에 내 모든 에너지를 다 썼던 것 같다. 다쳐도 혼나고 친구랑 다퉈도 혼나니까, 다치면 몰래 숨어서 나뭇잎으로 지혈을 했다. 친구랑 다툴 일이 생기지 않게 최대한 친구한테 다 맞춰줬다. 친구 맘 상할까봐 전전긍긍했다. 솔직한 게 너무 어려웠다. 솔직하게 말할 때마다 혼났기 때문에 그러면 안 되는 거라 생각했다. 필요한 게 생겨도 용돈 달라는 말을 못했다. 중학생 때부터 스티커 돌리고, 전단지 돌리면서 돈을 벌어 썼고 7살 땐 엄마 지갑에 손을 댄 적도 있다.(이게 아직도 마음에 남아있다.) 비겁한 방법으로 문제를 피해갈 때마다 죄책감이 컸다.

잘 살고 싶었다. 그런데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건지 몰랐다. 어릴 땐 무조건 엄마한테 순종하고 착한 딸로, 착한 동생으로 사는 게 최선이라 생각했고 그것이 다른 사람을 위한 거라고 생각했다. 가족들은 화가 날 때마다, 힘들 때마다 내게 폭언을 쏟아냈고 나는 그것을 듣고 참는 것이 모두를 위한 거라 생각했다.
잘 들어줘야해. 나까지 안 들어주면 우리가족 모두 큰일날거야. 버티자 버티자 했다.
그러다보니 몸이 반응을 했다. 머리가 빠져서 원형탈모가 생기고, 대상포진과 장염을 번갈아 앓았다. 나를 챙기기 위해 나는 아이들 속에 숨었다.

어릴 때 집에 다른 집 아기들이 많이 왔다. 아기들이 왔을 땐 엄마가 화를 안냈다. 그래서 나는 아기들이 있을 때 안정감을 느꼈다. 내 마음을 아기들에게 더 많이 쏟았고 아기들을 많이 기다렸다. 커서도 그랬다. 힘들 땐 아이들을 찾아갔다. 매일 아이들을 만났다. 아이들 관련된 일들만 했다.

그렇게 가족을 피해 주말에 간 곳이 쌍용차 해고노동자 아이들이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기대어 주말을 보냈다. 그 곳에서 정혜신, 이명수 두 분을 만났다. 아이들이랑 하루를 보내고 끝날 때쯤 부모님들 상담을 마친 두 분이 오셔서 우리를 안아주셨는데 나는 그 때 폭 안기지 못하고 머릿속으로 “오늘 땀 많이 흘렸는데 나한테 냄새가 나면 어쩌지? 오늘 머리를 감았던가?” 하는 생각만 했다. 누군가 안아주는 것이 너무 어색했다.

그리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내 아이를 낳으니 엄마의 폭언을 듣는 게 너무 힘들었다. 처음엔 엄마가 문제라고 생각해서 엄마한테 참다 참다 폭발하는 식으로 그만하시라고 말했다. 아이들 듣는다고 나도 이제 엄마라고, 못 듣겠다고 그랬다. 그런 말들은 엄마를 더 화나게 했고 참으면 적당히 혼날 일을 내가 더 키웠다고 자책했다.

그러는 와중에 변화가 조금씩 오고 있었다. 내 이야기를 공감하진 못하더라도 화내지 않고 끝까지 들어주는 신랑이 있었고, 변화해야겠다고 마음먹게 하는 아이들이 있었고, 끝까지 내 편이 되어주시는 정혜신, 이명수 맘 부모님이 계셨다.

나는 늘 운다고 혼이 났다. 울지 좀 말라고, 친구가 맞아도 울고, 내가 혼나도 울고, 누가 아파도 울고, 노래 듣다가 울고, TV 보다가 울고, 그냥 잘 울었다. 감정표현을 눈물로 했던 것 같다. 울지 말란 소리만 듣던 내게 두 분이 얘기하셨다.
너의 눈물이 다른 사람의 마음에 위로가 될 거라고, 잘 우는 건 살아있다는 증거라고, 눈물도 공감의 언어가 될 수 있다고..
우는 걸로 칭찬을 받아본 건 처음이었다. 기분이 정말 이상했다. 울어도 된다고 하니 도리어 눈물이 줄었다. 워낙 많이 울던 나라서 줄어도 많이 울긴 하지만 울지 않고도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신기했다. 그렇게 심리적 지지를 받으며 조금씩 자랐다.

그러다 엄마에게 진짜 내 마음을 얘기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거의 1년 넘게 준비한 것 같다. 나를 돌아보고, 내 마음을 알아차리고, 전하고 싶은 마음을 말로 정리하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엄마에게 진짜 내 마음을 이야기한 그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시간이 다가오자 갑자기 죽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도망가고 싶고, 왜 내가 이 일을 해야 하는 거지? 평생 엄마 때문에 힘들었는데 왜 이 역할까지 내가 해야 하는 거지? 그냥 엄마가 변할 때까지 기다려볼까? 연락을 끊을까? 온갖 생각이 다 들면서 무섭고 두려웠다.
하지만 그 순간 떠오른 사람들이 있었다. 신랑과 아이들 그리고 심리적 지원군인 두 분.
해보자! 피하지 말고 얘기해보자. 바들바들 떨리는 두 손을 불끈 쥐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떨리는 내 몸을 추스르고 용기를 냈다.

화가 잔뜩 난 엄마 앞에 앉았다. 그 옆에 아빠도 있었다. 엄마는 내게 손가락질 하며 버르장머리 없는 나쁜 기집애라고 했다. 할 말 있으면 해보라고 했다. 나는 온 몸에 힘을 주고 바들바들 떠는 몸을 진정시키며 입을 뗐다. “엄마. 오늘 하루만, 딱 한번만 내 말 끊지 말고 들어줘. 내가 두 손 모아 빌게. 내 얘기 끝까지 한번만 들어줘...” 엄만 그래. 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고 했다. 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 엄마. 음.. 나는 지금 이 순간도 엄마가 많이 무서워. 엄마를 사랑하는데 엄마가 무서워. 나는 그런 아이인 것 같아. 내 얘기를 하는 게 참 무서워.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다른 사람이 날 싫어하지 않을까? 혼내지 않을까를 먼저 생각해. 난 어릴 때부터 엄마가 참 좋았어. 엄만 얼굴도 하얗고 정말 예쁘다고 생각했어. 친구들이 너 엄마 예쁘다고 하면 그게 그렇게 좋았어. 엄마가 내 엄마인 걸 여기저기 알리고 싶었어. 난 엄마한테 사랑을 많이 받고 싶었던 것 같아. 그런데 그 방법을 몰랐어. 근데 엄마가 반장을 하거나 공부를 잘하면 좋아하는 거야. 그래서 엄마한테 사랑받으려고 반장하고 공부했어. 반면에 다치거나 친구와 다투면 엄마한테 혼나니까 다치면 나뭇잎으로 지혈하고 엄마한텐 숨겼어. 친구랑도 다투지 않으려고 뭐든 양보했어. 엄마 아빠가 돈 때문에 싸울 때도 내가 돈 벌어야겠다 생각했던 것 같아. 그래서 열심히 알바를 했어. 엄마 사랑받고 싶어서. 나는 그런 내 마음을 표현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돼. 꾹꾹 참거나 엉엉 울거나 둘 중 하나였던 것 같아. 그런 내가 싫었어. 내 얘기하나 못하는 내가 싫었어. 고등학생 때 선생님이 때리는 데 왜 때리느냔 말도 못하고, 사회생활 할 때도 온갖 안 좋은 일 당할 때도 그냥 가만히 있었어. 이젠 달라지고 싶은데 내가 엄마한테 내 마음을 표현할 수 있어야 바뀔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엄마한테 내 마음을 얘기하는 게 무서웠으니까. 엄마랑 나에게 시간이 많지 않잖아. 우리가 함께 할 날이 별로 없잖아. 시간은 지나가는데, 기회가 지나가는데 이젠 더 이상 미룰 수 없겠다 생각했어. 엄마. 나 엄마 진짜 사랑해. 그리고 엄마한테 진짜 사랑받고 싶어. 우리 서로 화내고 상처주지 말고 남은 시간 사랑하며 살자. 그랬으면 좋겠어 엄마..” 엄만 내 얘기를 들으며 우셨다. 그리고 얘기하셨다.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지금 와서 변하라고? 나는 너보다 더 힘든 삶을 살았는데 한 번도 힘들다는 생각 안 해봤다. 니들은 부모 잘 만나 편히 살았으면서 지금 와서 이딴 소리를 하는 거냐. 자식 새끼 키워봐야 아무 소용없다. 시끄럽다 나가라~” 엄마의 얘기를 듣는데 화가 나지 않았다. 엄마의 진짜 마음을 표현 못하는 엄마가 너무 안쓰러웠다. 나는 운 좋게 맘 엄마와 맘 아부지를 만나서 내 얘기를 하게 되었는데 엄만 그러지 못하는 게 너무 가슴 아팠다. 그때 지성이가 깼다. 그래서 달래러 밖으로 나갔는데 하늘에 보름달이 떠있었다. 나는 보름달을 보며 지성이에게 말했다. “지성아 엄마 이제 살았어... 너 덕분이야 고마워..” 그 다음날도 엄만 아무 말 없었다. 그리고 3일 뒤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딸아. 엄마가 미안하다.. 엄마가 내 딸들을 어떻게 키웠나싶다. 사실 엄마도 힘들었다.. 엄마도 외할아버지가 보증을 잘 못 서는 바람에 갑자기 집이 망해서 외삼촌 집에 식모로 살면서 너무 힘들었다. 매일 싸우는 외삼촌과 외숙모 사이에서 많이 울었다. 공부하고 싶은데 학교도 못가고 조카를 키우는 엄마 인생이 너무 싫었다. 그래서 나는 기필코 아들을 낳아서 나 같은 고생 안하게 해야지 했는데 딸을 낳아서 그냥 보기가 싫었다. 그래서 너희에게 사랑을 주지 못했다. 너무 미안하다.. 이제부터라도 그동안 못 준 사랑 다 줄게...” 하며 엉엉 우셨다. 그리고 엄마의 마음을 얘기한 바로 그 순간이 엄마의 인생 중 가장 마음이 편한 순간이었다고 얘기하셨다.

이 치유의 힘은 나비효과처럼 다른 가족들에게도 퍼져나갔다. 언니와도 그렇게 마음을 이야기하고 난 후 오랜 갈등을 풀었고, 늘 참기만 하던 아빠도 마음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물론 마음을 들여다보고 꺼내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지만 길을 알았으니 묵묵히 걸어 나갔다. 이제 우리 가족은 한결 편안해진 관계 속에서 타인과의 관계를 돌아보게 되었다. 먼저 손 내밀고 다가가는 여유를 보이고 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어려울 때마다 전화하고 이야기한다.

만나면 1박2일을 못 넘기고 싸우던 우리 가족은 못다한 사랑을 나누고 있다. 나는 엄마에게 드디어 폭 안길 수 있게 되었다. 틈날 때마다 안고 뽀뽀하고 사랑한다고 말한다.

나는 이 책이 나를 살렸다고 생각한다. 운 좋게도 10년 전부터 책 속의 이야기들을 꾸준히 들을 수 있어서 심리적 CPR을 빨리 받았다. 책을 읽는 동안 수많은 일들이 스쳐지나가면서 울고 웃었다. 감사하다. 너무나도 감사하다.

책이 나오고 가족들에게 전부 선물했다. 친정식구는 물론이고 시어머님께도 건네고, 이런 이야기를 오래 나눠왔던 지인들께도 선물했다. 책을 읽으며 느끼는 것들을 함께 이야기 나누고 있다. 이런 과정들이 참 좋다.

잃어버린 “자기”를 찾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런 “자기”들이 모여 “우리”가 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관계가 되는 것을 페이스 북에서 만난 인연들을 통해 느끼고 있다.
나는 나의 이야기가 동화 속 마지막 결말처럼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하고 끝날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지 나도 모르고 그 누구도 모른다. 다만 내가 확실히 알고 있는 건 지금 나는 살아있고, 또 내가 언젠가 죽는 다는 것 이 두 가지 뿐이다.

두렵지만 헤어짐의 순간은 분명 찾아올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사랑하고 또 사랑하려고 한다.
나를 사랑하고 가족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것이다. 사랑을 하는 일에 마음과 힘을 쏟을 것이다. 나의 가족이 소중한 것처럼 다른 이의 가족도 소중하다. 그런 소중한 이들을 지키고 싶다. 다정한 전사가 되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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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름이 2019-03-06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귀한 글을 용기내어 적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다정한 전사이세요.. 당신은.. 이미...

푸름이 2019-03-06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닉네임이 니비.. 날아라 나비야.. 참 좋네요.. 저도 나비 참 좋아해요... 땅을 기어다는 애벌레는..., 하루에 한 나뭇잎 안에서만 지냈을 애벌레는 몰랐을 거예요. 나비의 삶이 어떨지... 모든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것은 아니죠.. 하지만, 번데기를 거쳐 나비가 되면, 원하는 자리, 이 꽃 저 꽃 날아다니며, 얼마나 자유롭고 행복하겠어요. 나비처럼 가고 싶은 곳에 가서, 하고 싶은 것들을 하세요... 날아라 나비야 님

세발자전거 2020-02-28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다정한 전사님, 쓰신 글을 읽고 울컥했네요. 용기내어 적으신 글로 누군가에게 또 용기를 줄거라 생각해요. 전사님의 삶을 응원합니다.

찐스 2021-10-28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글의 어린시절이 저인줄 알았어요ㅡㅜ저도 감정표현을 못하는 어른으로 자랐고 아이들이 좋았어요ㅜ 그냥 아이들이 있을때 편했어요 그래서 직업도 교사를 선택했구요. 그런데 아이를 낳아 길러보니 여기서부터 삐걱대더라구요ㅡㅠ 요즘은 나의 마음 살펴보기를 하는찰라 이책을 읽어볼까 했는데 님글을보며 울컥했네요. 저도 좋은남편건강한마음 남편만나서 치유의 과정이 있는데 우리모두의 삶이 편안하길 나와 잘지내길 바래요.